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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학생의 멋

불량학생의 멋   필자가 어렸을 땐 중고등학생들의 머리스타일이나 복장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지도(?)했다. 하지만 그 나이는 ‘질풍노도의 시기’ 즉 ‘반항’의 시절이었다.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할 수록, 더 하고 싶은 게 본성이다. 좀 삐딱한 게 멋이라고 생각했다.   필자가 어렸을 땐 소위 ‘불량학생‘이 있었다. 교칙이나 규정에 어긋나고, 말썽을 피우고 반항하는 학생들이다. ‘불량학생’을 필두로 ‘시시껄렁’한 다수의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 학교 복장이나 두발 규정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가장 흔한 게 교복 목 부분의 후크를 푸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자를 벗어서 가방에 넣고, 가방은 옆구리에 꼈다. 가방 손잡이를 잡고 드는 게 편한데, 굳이 불량스럽게 보이려 노력했다.나팔바지가 유행하면 바지 아랫단을 넓게 하고, 짧은 기장이 유행하면 흰 양말을 신고 기장이 짧은 바지를 입었다. 선생님이 지적을 하면 ‘교복을 새로 살 돈이 없다’고 둘러댔다. 담배도 중요한 조건이다. 필자의 경험상 고3이면 (흡연량의 차이는 있지만) 절반 이상은 담배를 피웠던 것 같다.교복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학생은 색이 바래서 오래되어 보이는 교복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남학생들은 짧은 머리를 5밀리라도 더 기르려고 기를 썼다. 안되면 구레나룻이라도 길렀다. 이들은 이발할 때마다 구레나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가끔은 하얗게 완전 삭발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엔 이를 ‘백구 친다’라고 했다. 선생님들은 ‘너 무슨 불만 있냐?’라고 하는데, 머리가 아주 짧은 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다. 하지만 새하얗게 백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선 꾸준한 노력과 성실함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런 것과 거리가 먼 ‘백구 학생’은 며칠 지나면 자연스럽게 머리가 검어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부에만 열심인 범생이들을 제외하곤, 많은 학생들이 불량학생 스타일을 따르려 했다.   사실 학생들끼리는 멋을 내거나 반항을 해 보였지만, 어른들 입장에선 별 차이를 못 느꼈고 알아주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그들만의 ‘똥폼’ 또는 ‘허세’에 불과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그랬나 부끄럽기도 하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청강생을 아시나요?

청강생을 아시나요?   대학을 졸업하면 몇 년제냐에 따라 ‘당연히’ 전문학사 또는 학사 학위를 받는다. ‘졸업 논문’이라야 좀 긴 레포트 수준이니까 그냥 패스였다. 따라서 ‘대학 졸업 = (전문)학사 학위’가 된다. 요즘은 대학도 많고 대학 졸업생도 많아서 학사 학위는 학위 취급도 못 받는다. 그리고 어느 대학을 졸업하면 당연히 그 대학 (전문)학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예전엔 ‘학사 가수’라는 타이틀이 붙었던 가수가 있었다. 대표적인 가수가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한 김상희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대학가요제와 함께 대학생 가수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학사 가수’라는 타이틀이나 희귀성은 사라졌다.   그러면 ‘학사 가수’가 왜 타이틀로 붙었을까?당시만 해도 대학과 대학생이 적었다. 게다가 대학을 졸업할 만큼 배우고 경제력도 있는 ‘지성인’이 ‘딴따라’를 한다는 건 굉장히 드물었고 집안의 반대도 심했다. 특히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한 가수라면 더욱 ‘학사 가수’라고 칭할만했다.   그런데 또 한가지, 당시엔 ‘청강생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나무위키에 의하면 ‘청강생제도’란 ‘대학의 입학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돈을 주고 청강생으로 등록해서 정원 외로 원하는 대학교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제도이다. 1949년 대한민국에서 교육법이 최초로 제정될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청강생은 청강(auditing)한 수업에 대해서 '이수증서'를 받을 수 있을 뿐 학위를 받을 수도 없고, 수료라는 표현을 쓸 수도 없다. 대학들의 재정 확충 수단으로 악용되었던 이 제도는 1981년 교육법 개정으로 폐지되었다.’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학들이 장삿속으로 이 제도를 기여입학제처럼 활용해 돈을 받고 정원외로 입학시험을 거치지 않은 청강생을 등록시켜서 학생들과 섞여 수업을 듣게 하고 심지어는 졸업장까지 발급해주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는데 있었다.즉 학사 학위는 없지만 정규 학생들과 똑같이 공부하고, 심한 경우엔 졸업장까지 줬으니 문제가 심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공부는 못하지만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OO대학생 노릇을 하며, 학위 증명을 요구하지만 않으면 OO대 출신으로 취업을 하거나 결혼도 했다.따라서 당시엔 학사 ‘학위’를 따지며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그래서 청강생 출신이지만 졸업했다고 속인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이 나중에 문제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배우 장미희 오미희, 최순실 등)   지금 생각해보면 청강생은 말도 안 되는 제도이지만, 당시 사학재단들은 이 제도로 떼돈을 벌었다.어쨌든 요즘은 널린 게 학사이고 석사 정도는 되어야 학위 취급을 받는다지만, 당시와 비교해보면 학사 학위라도 새삼 소중하게 생각된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여고 여상 여전 여실

여고 여상 여전 여실   거의 30년 전 얘기다. 회사의 ‘고졸’ 여직원이 친구와 얘기하는 걸 옆에서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들의 대화 중에 ‘여고 여상 여전 여실’ 등의 단어가 나왔다. 여자고등학교(일반고) 여자상업고등학교 여자전수학교 여자실업학교 등을 줄인 단어들이다. 대학을 나왔으면 보통 학교 이름은 대던가, 법대 상대 공대 사범대 등을 나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학을 나오지 않은 고졸 출신들은 자기들끼리 이렇게 구분을 했나 보다.   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엔 ‘전수학교’라는 학교가 있었다. 전수학교는 1970년대부터 정규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취업과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설치되었으며, 특히 상업·공업계의 기능을 전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래서 나이 많은 학생들도 많았다. 지금은 대부분 실업계 고등학교로 변경되거나 사라졌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전수학교는 단연 ‘남산공전’ 즉 ‘남산공업전수학교’였다. 특히 야간은 대표적인 ‘깡패학교’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 학교의 선생님들도 보통이 아니란 설도 있었다. 남산공전은 1952년에 직업소년학교로 개교했는데, 이후 ‘고등학교 학력인정 지정학교’가 되면서 ‘고교 졸업’을 하고 싶지만 가정 형편이 어렵거나 공부는 시원치 않은 학생들이 몰렸다. 1983년 ‘남산공전’은 리라아트고등학교로 변경되면서, ‘깡패학교’는 사라졌다.   실업계 고등학교 중엔 ‘실업’고등학교도 꽤 있었다. 줄여서 남학교의 경우 ‘실고’, 여학교의 경우 ‘여실’이라고 불렀다. 상고나 공고와 다르게, 한 학교 안에 전공분야가 여러가지 있었던 게 특징이었다. 이후 실업고등학교 역시 일반고나 특성화 고등학교로 변경되었다.   어느 고등학교를 졸업하든 잊을 수 없는 추억과 친구들이 있다. 특히 어려운 환경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고교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더 많은 것 같다. 친구를 찾거나 졸업 앨범을 넘겨보면서 추억 여행에 나서 보시길 권해드린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사라진 소아마비

사라진 소아마비   필자는 얼마 전 오랜만에 다리는 저는 아주머니를 봤다. 소아마비 장애인이다. 필자가 국민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같은 학년에 3~4명 정도 소아마비 장애 학생이 있었다. 목발을 짚어야 하는, 증상이 심한 학생도 있었다. 당시 성인들 중엔 소아마비 장애로 다리는 절거나 목발을 짚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당시엔 장애인에 대한 배려나 인권 개념이 없었다. 좋게 표현하면 ‘OO가 아프다’ 또는 ‘OO가 좋지 않다’라고 하고, 그냥 ‘*신’이라고도 했다. 철없는 사람들의 놀림감이기도 했다. 심지어 소아마비 장애인이 다리는 절며 걸어가면, 철없는 아이들은 그 옆에서 다리를 저는 흉내를 내며 낄낄거렸다. 대놓고 ‘다리*신’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어느 아버지가 소아마비 장애인인데 그 아들은 아버지가 부끄러워 옆에 가지도 않고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놀리기 때문이었다.참 철없고 부끄러운 시절이었다.   소아마비 장애는 눈에 잘 띄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 있어서, 다른 장애보다 더 많은 것처럼 느껴졌었다.지금은 소아마비 장애인들 다수가 전동휠체어를 이용하기 때문에, 다리를 절거나 목발을 짚는 경우는 드물다. 소아마비 보조기도 있어, 다리 저는 걸 보완해준다.   언젠가부터 소아마비 접종은 의무화되면서 지금은 소아마비 장애인이 크게 줄었도, 지금의 소아마비 장애인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다.   요즘은 누가 장애가 있으면 ‘OO에 장애가 있다’라고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하려 한다. 만약 누구한테 ‘*신’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인격 파탄자’ 취급을 당한다. 그래서 그런지 ‘*신’이란 욕도 사라졌다.   어쨌든 소아마비 백신은 예방 접종으로 장애를 방지하고, 한 사람 또는 그 가족의 인생을 살릴 수 있게 된 위대한 발명이다. 아울러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배려가 나아지고 있는 것도 다행스럽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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