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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흥망 ① - 테이프와 새한미디어

기술의 흥망 ① - 테이프와 새한미디어   대한민국은 기술의 습득에 진심인 나라다.원조받던 세계 최빈국에서, 불과 70여 년 만에 원조하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유일한 나라다. ‘압축성장’과 함께 그만큼 교육과 기술 습득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필자가 국민학교 시절엔 주판을 배웠다. 칠판 위에 커다란 주판을 걸고 덧셈 뺄셈 등을 배웠다. (곱셈 나눗셈은 어려워서, 선생님들도 가르치지 못했던 것 같다) ‘넣기를’ 하면서 숫자를 부르면, 열심히 주판으로 계산을 하곤 했다.당시엔 주산 9단이 흔했고, TV에서 암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상업고등학교에선 주산은 필수였다. 은행이나 기업은 물론, 상점에서도 주판을 사용했다.   한편 당시 젊은이들은 야전(야외전축)이란 것을 이용했다. 야외에서 여럿이 모여서, 자랑스럽게 복사 LP판을 크게 틀고, 막춤 추는 걸 재미로 여겼다.   7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전산)와 계산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은행이나 기업에선 전산화 도입으로, 주산은 점점 입사와 관련이 없어졌고 계산기로 대체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카세트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일제 카세트녹음기가 야외전축을 대체했다. 음악 방송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는 건, 하나의 신기술이자 즐거움이었다. 필자는 카세트녹음기를 이용해, 친구들과 라디오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다. ‘녹음’이란 게 일반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특히 소니의 워크맨이 등장하면서, 카세트는 전성기를 누린다.카세트가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을 때, 비디오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동네마다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이 우후죽순 생겼다.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화는 기다리다 지쳤고, 유호프로덕션 같은 성인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아날로그 ‘테이프의 시대’였다.   지금의 반도체까지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이 점유율 세계 1위를 찍은 건 아마 테이프가 처음일 것 같다. 대표적인 회사가 1973년 이병철 회장의 둘째 아들인 이창희가 미국 마그네틱미디어와 합작해 세운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로, 1980년에 ‘새한미디어’로 이름을 바꾼 회사다. 이후 1980~1990년대 전 세계 및 국내 비디오·오디오 테이프 시장을 석권하며, 단일 기업 기준 세계 비디오테이프 점유율 1위(약 20%)를 달성했다.(왼쪽 사진) SKC 등과 함께 한국 기업들이 세계 비디오테이프 시장의 약 40% 이상을 쓸어담던 시기다. 특히 새한미디어는 북미와 유럽의 대형 유통망을 뚫으며, 전체 매출의 90% 이상을 해외 수출에 집중하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였을까? 새한미디어가 한창 잘 나가던 1995년 1월, 당시 단일 공장으로 세계 최대 규모였던 충주 비디오테이프 생산 공장에서 큰불이 나 약 300억~400억 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오른쪽 사진) 더 큰 문제는 전 세계 시장에 공급하던 비디오테이프 생산 라인이 멈추면서, 해외 바이어들과의 납기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등 수출망과 글로벌 시장 점유율에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이었다.새한미디어는 긴급 복구와 설비 재투자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이어 터진 IMF금융위기와 CD 등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만약’이란 건 없다지만) 새한미디어가 화재 이후 “기왕 망한 거, 차라리 신기술로 바꾸자” 하면서 투자의 방향을 돌렸으면,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생겼을 지 모른다. 많은 국민들이 안타까워했지만, 그렇게 테이프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기술의 흥망 ③ - 삐삐와 mp3

기술의 흥망 ③ - 삐삐와 mp3   1990년대는 아날로그가 점차 저물고, 디지털 문화가 시작하는 시기였다.   1990년대 초엔 삐삐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1993년 서울이동통신 등 민간 사업자(015 사업자들)의 참여로 요금이 대폭 내려가며, 중고등학생까지 "1인 1삐삐" 시대가 열렸다. 1997년에는 가입자 수가 1,500만 명을 넘어서며 국민 절반 가까이 사용하는 최전성기를 누렸다. 공중전화 앞 길게 늘어선 줄과 '삐삐 용어(예: 8282, 1004 등의 숫자 암호)'가 시대의 상징이었다. (사진)이때 삐삐 단말기를 만든 팬택이나 스탠더드텔레콤 같은 기업은 1990년대 중반 1억 달러가 넘는 수출고를 올리며, 글로벌 시장에서 주요 공급업체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휴대폰이 일반화되면서, 삐삐의 시대는 갑자기 몰락했다. 하지만 이 당시 개발했던 세계 최고 수준의 ‘삐삐 기술’은 그대로 남아, 'CDMA 휴대폰 강국'(세계 2위)의 기술적 토대가 되고 '세계 진동벨 시장 독점'이라는 유산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후반에는 디지털 시대에 걸맞는 파격적인 신기술이 한국에서 개발되었다. 바로 mp3다.1997년 국내 벤처기업 '디지털캐스트(대표 황창규)'가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중견기업 '한아시스템'이 자금을 대어, 1998년 3월 '엠피맨(MPMan F10)'이라는 이름으로 상용화에 성공했다.그런데 당시 메모리 용량은 고작 32MB여서, MP3 노래를 6~8곡 정도만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테이프나 CD 없이 디지털 파일만으로 음악을 들고 다닌다"는 개념 자체는 가히 혁명적이었다.출시 초기 국내에서는 "노래가 6곡밖에 안 들어가는데 너무 비싸다(당시 약 20만 원대)"거나 "음원 불법 복제를 부추긴다"는 음반 업계의 반발을 받았다. 자금난과 특허의 중요성을 몰랐던 디지털캐스트는 MP3P 원천 특허를 미국 기업인 'S3(소닉블루)'에 헐값에 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이 미국 기업이 만든 'Rio 500'이라는 제품이 미국 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앞서 언급했던 삼보컴퓨터에 이어, 특허에 대한 개념 부족이 나은 참사였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깝다.   이후 국내 기업인 레인콤(아이리버)이 독보적인 디자인으로 2000년대 초반 세계 MP3P 시장 1위를 차지하며, 잠시 한국의 자존심을 세웠다. 하지만 곧 애플이 '아이팟(iPod)'과 '아이튠즈(음원 플랫폼)'를 출시하면서, 주도권은 완전히 미국 애플로 넘어갔다.   그럼에도불구하고 1990년대는 반도체 세계 1위와 함께, 삐삐 휴대폰 등 통신기기와 mp3 등으로 ‘기술 한국’을 전세계에 각인시키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다음에 계속>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기술의 흥망 ④ - 새롬기술과 벤처기업 붐

기술의 흥망 ④ - 새롬기술과 벤처기업 붐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가 덮치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다.IMF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정부는 신성장 동력 확보 및 고용 창출을 위해 IT·벤처기업 육성을 국정 핵심 과제로 잡았다. 특히 코스닥(KOSDAQ) 시장의 요건을 완화하고 스톡옵션 비과세 혜택을 확대되면서, 2000년대 초까지 ‘벤처기업 붐’을 이끌었다.   그러자 별 것 아닌 기술에 떼돈이 몰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새롬기술’이다.새롬기술은 1999년 10월, 컴퓨터로 미국 등 전 세계에 무료로 전화를 걸 수 있는 ‘다이얼패드 서비스’를 발표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당시 비싼 국제전화비를 대폭 아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발표 직후 가입자가 폭주했다. 1999년 8월 공모가 2,300원(액면가 500원 기준)으로 코스닥에 상장한 후, 6개월만에 150배 폭등하며 주당 308,000원(2000년 3월 6일 장중 기록)까지 치솟으며 재계 서열 7위에 올라버렸다. (사진) 이러한 과열 현상이 9시 뉴스에도 방송됐고, 얼마나 오를지가 초미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료 전화를 제공하고 광고 수익을 얻는 모델이었는데, 별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자 금세 거품이 꺼져버렸다. 나중에 ‘역대 최대의 작전’이라고도 평가했는데, 결국 따라다닌 투자자들만 큰 손해를 봤다.   “당장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문자 수(회원 수)’만 늘이면, 향후 광고나 커머스로 돈을 벌 수 있다"며 ‘닷컴 기업’에도 ‘눈먼 돈’이 몰렸다. 대표적인 기업이 1997년 설립된 골드뱅크다. 이 회사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광고를 시청하면 회원에게 현금이나 포인트를 적립해 주는, ‘인터넷 보상형 광고’ 모델로 주목을 받았다. 1998년 코스닥에 상장한 후 단 몇 개월 만에 약 38배(최저가 대비 기준)까지 폭등하며, 닷컴 열풍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회원 수만 늘어날 뿐, 실제로 광고가 없어 곧 한계가 왔다. 또 ‘눈 먼’ 투자자들만 망했다.   당시에는 이렇게 실질적인 매출이나 구체적인 수익 모델이 없더라도, 상호에 ‘.com(닷컴)’ ‘기술(테크)’ 같은 단어만 들어 있으면 ‘미래 가치’라며 대규모 자금이 몰렸다. 기업 M&A 시장에도 큰 자금이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 그야말로 ‘묻지마 투자’였다. 그러자 기존의 전통적인 사명을 버리고 회사 이름 뒤에 .com을 붙이거나 IT 느낌이 나는 이름으로 바꾸기만 해도, 주식이 상한가를 기록할 정도였다.재무제표보다 사업계획서나 아이디어 발표회(IR) 한 번으로 수십억~수백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는 경우도 흔했다.   IMF 위기로 투자받지 못해 한동안 쩔쩔맸는데, 갑자기 세상이 바뀌며 몫돈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자기 돈 좀 투자받아 달라’며 애원(?)했다. 참 희한한 세상이었다. 돈이 마구 몰려들어 오자 벤처기업들은 임차료 비싼 테헤란로에 사무실을 차렸고, CEO들은 매일 밤 강남 룸싸롱에서 아낌없이 남의 돈을 펑펑 써 댔다. 강남 룸싸롱의 황금시대이기도 했다. 이렇게 눈먼 돈들은 벤처업자(?)들의 배만 불리고,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벤처기업에 목돈이 모이고 스톡옵션이 활성화되면서, 인재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대기업 연구소에 다니던 많은 엘리트들이 스톡옵션과 ‘한방’을 노리고 벤처기업으로 옮겨갔다. 액면 500원짜리 스톡옵션 주식이 ‘10만원 이상 갈 것’이라는 경우도 흔했다. 오죽하면 대기업에 그대로 남았던 연구원과 기술자들을 보고, ‘오라는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남은 사람들’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하지만 꿈을 안고 벤처로 간 이들 중 상당수는 ‘버블 붕괴’와 함께 빚더미에 올라야 했다. 이때 인생이 완전히 꼬여버린 이공계 출신 인재들이 정말 많았는데, 일부는 그 여파로 지금까지도 어렵게 살고 있다.   <다음에 계속>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기술의 흥망 ⑤ - 통신과 변혁의 시대

기술의 흥망 ⑤ - 통신과 변혁의 시대   1990년 후반은 컴퓨터 보급과 통신의 발전이 맞물리며, 획기적인 변화가 많았던 시기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전화선을 이용한 느린 속도의 PC통신(천리안, 하이텔 등 - 사진)과 모뎀(V.90 등) 시절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사업'과 맞물려, 전국에 광케이블과 초고속망이 폭발적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1998년 7월엔 두루넷이 세계 최고 수준인 최대 10Mbps 속도의 초고속 인터넷 상용 서비스를 시작했다. 1999년 4월엔 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이 기존 전화선을 활용한 ADSL(비대칭 디지털 가입자 회선) 서비스를 도입하면서, 집집마다 초고속 인터넷이 연결됐다. 가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2002년 10월에는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가 1,000만 명을 돌파하였다. 이는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IT·인터넷 강국으로 도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통신의 발전과 정부의 전자상거래 육성 정책 등으로 온라인 쇼핑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96년 인터파크와 롯데인터넷백화점이 국내 최초의 종합 인터넷 쇼핑몰로 문을 열었고, 1999년엔 옥션(Auction)은 온라인 경매 사이트로 출발해 누구나 물건을 팔 수 있는 C2C(개인 간 거래) 시장의 발판이 되었다.   이처럼 변화가 워낙 빨리 일어나다 보니, 일반 국민도 정신이 없어졌다.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면 아무 것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컴퓨터 사용법을 배워야 했다. 우선 홈페이지에 가입하고, 이메일은 물론 인터넷 뱅킹이나 쇼핑을 할 줄 알아야 했다. 또한 본인 인증부터 공인인증서 관리 또는 보안 시스템과 업데이트, 심지어 바이러스 백신과 컴퓨터 관리도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처리 과정이 헷갈리고 복잡해서, 욕이 나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다들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특히 IMF 외환위기는 인력을 최소화하면서, 컴퓨터를 이용하여 각자의 업무와 능력을 극대화하게 만들었다.   한편 1995년엔 케이블TV가 시작되면서 ‘다채널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초기엔 망 설치가 늦어진데다 IMF까지 겪으면서, 많은 채널의 주인이 바뀌었다. 정부도 별도로 추진했던 케이블TV 망 보급의 한계를 인정하고, 1998년부터 기존의 거대한 유선방송들을 케이블TV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가입자가 급증하면서, 채널도 증가하여 ‘본격적인’ 다채널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2000년대 이후 VOD 서비스의 시작과 종편채널 및 넷플릭스 등장을 계기로, 그동안 막강했던 지상파의 위상은 점점 초라한 수준으로 몰락하게 된다) 이렇게 1990년대 후반은 IMF를 거치면서 고생은 많았지만, 기업의 내실이 다져지고 기술 혁신과 보급을 이룬 독특한 시대였다.   전세계가 변화의 바람을 맞이했지만, 특히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동안 특화된 경험을 바탕으로, 기꺼이 변화를 체득하며 발전시켰다. 이렇게 국가와 국민과 기업의 빠른 변화와 신기술 습득력은 기술 발전과 국가 경쟁력 향상의 밑바탕이 되었다.   특히 웬만해선 만족하지 않고 빨리빨리 속도를 주문하는 국민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정부와 기업들은 진땀을 흘려야 했는데, 이것은 향후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하는데 일등공신이기도 했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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