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header banner1 header banner2
  • 커뮤니티 문답방 · 전문가문답방
    사이트 내 전체검색
더보기 >
전문가 문답방

세계 최고속 이사

세계 최고속 이사   요즘 우리나라에서 이사할 때 대부분 사다리차를 이용한다. 게다가 포장이사를 하면 전문가들이 척척 일을 해주니, 정말 편하고 빠르다. 아침에 시작하면 오후에 끝나고, 저녁에 청소하면 끝이다. (자리 잡는 시간은 빼고) 사다리차를 사용하는 세계 유일한 나라이고, 이사 역시 세계 최고 속도다. ‘빨리빨리의 민족’ 답다.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이사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자기 나라에선 대부분 이삿짐을 직접 나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도 많다. 그래서 외국인들의 이사는 한국처럼 하루에 끝나는 게 아니라, 짐을 싸고 나르고 올리고 풀고 ... 기본이 며칠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침에 짐을 빼면, 오후에 다른 집의 짐이 들어오는 순환 구조다.(그 틈에 재빨리 도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쪽 집에서 돈을 받아서 나가고, 저쪽 집에 돈을 줘야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빨리빨리 이사’는 우리나라 특유의 주택 거래 구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역시 이사를 직접 했다. (트럭 운전기사가 일부 날라줬지만)그래서 “이사한다” 하면, 친지들을 불러 다 같이 짐을 이고 지고 날랐다. 당시엔 장독(항아리)이 많았는데, 가끔 깨져서 난리가 나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도와주러 왔다가 사고가 난 것이므로,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이삿짐을 도와주면 특별히 탕수육까지 사줬다. 그래도 이사를 도와주는 건 서로에게 ‘민폐’이자 ‘신세 지는 일’이었다.   1990년대부터 ‘남들에게 신세 지는 걸 꺼려 하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일꾼을 동원하기 시작했다.저층 아파트나 빌라 같은 주택에선 장롱을 계단으로 올리지 못해 로프에 묶어 창문을 통해 들어 올렸는데, 일꾼들은 이를 ‘로프 작업’이라며 웃돈을 받았다. 고층 아파트엔 곤돌라가 있었다. 곤돌라에 이삿짐을 실어 올렸는데, 창문에 닿지 않도록 외부에서 양쪽으로 한 사람씩 잡아줘야 했다. 하지만 위에서 들어 올리는 곤돌라는 흔들리고, 바람의 영향도 커서 위험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부터 건설 현장에서 자재 운반용으로 쓰이던 사다리차 장비를 이삿짐 현장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누가 맨 처음 했는지 몰라도, 참 아이디어가 좋다) 또한 ‘통인익스프레스’로 시작된 포장이사 문화가 확산되면서, 사다리차는 탑차와 함께 대한민국 이사의 독특한 필수장비로 자리 잡았다. (요즘 고가 주택에는 이사 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다) 외국인들은 사다리차를 보고 처음엔 소방차(굴절사다리차)로 착각해, 불이 자주 난 줄 알았다고 한다.   아무리 이사가 편해졌다 해도, 이사는 참 힘든 일이다. 이사하기 전에 짐 정리도 해야 하고, 가스 차단과 통신 또는 관리비 등 이사 전후에 해야 할 것도 많다. 이사가 편해진 만큼, 이사 비용도 크게 올랐다.   필자는 이사 자체가 싫어, 가급적 한 집에 오래 살려 한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한강, 예전과 지금

한강, 예전과 지금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강 근처에서 살아왔다. 한강이 좋아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군대 있을 때와 신혼 초기 잠깐을 제외하면 늘 한강 근처에 살아왔다. 지금도 출퇴근을 위해 하루에 두 번씩 한강을 건너며 한강을 보는데, 한강은 언제나 아름답고 멋지다. (사실은 휴대폰 들여다보느라, 언제나 한강을 보는 건 아니지만...)   서울처럼 큰 도시에 있는 강 중엔, 아마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큰 강일 게다. 외국인들은 한강을 보면 “바다가 아니냐”며 크기에 놀라곤 한다. 게다가 깨끗하고 재미있는 게 참 많은 강이다. 특히 한강 공원은 외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는데, 한강 공원은 필자가 외국인에게 추천하는 첫번째 관광코스다.   그런데 사실 예전의 한강은 지금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한강은 서울을 가로지르며 두 쪽 낸 원흉(?)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한강 다리를 폭파한 사건을 봐도, 옛날엔 한강을 건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엔 한강에 다리가 몇 개 없었다. 당시 서울의 한강은 교통과 발전을 막는 ‘장애물’이란 인식이 컸다. 또한 필자가 사는 동네 근처는 상습 침수지역이기도 했다. 비가 많이 오면 홍수가 자주 났고, 주민들이 물을 퍼내는 장면에 익숙했다. 한강변 역시 자연상태에 가까워, 뚝섬 등 일부 유원지를 제외하면 놀러 가는 게 위험한 일이었다. 수질도 좋지 않아 낚시로 잡은 물고기조차 먹을 수 없었다.이렇게 서울 사람들은 ‘커다란 한강’을 국가와 사회의 ‘장애와 위협’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한강이 없었으면 또는 템즈강처럼 좁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정도다. 지금은 한강을 따라 도로를 놓는다. 사유지가 아니라 돈도 적게 들고, 신호등도 없어서 동서 방향의 기간 도로가 됐다.게다가 넓은 한강은 탄소와 공해 물질을 흡수한다. 특히 대규모 수면이 바람길 역할을 하여 도심 열섬 현상을 완화하고 공기를 순환시킨다.넓은 강변은 시민공원으로 탈바꿈해, 대규모의 아름다운 휴식처를 제공한다.큰 강 자체가 주는 아름다운 풍광 자체로도 훌륭한 볼거리다. 특히 해질녁의 노을은 대체불가다.물도 깨끗해, 낚시도 즐기고 수달이 살고 있다.그래서 이제 서울에선 ‘커다란 한강’이 국가와 사회의 ‘자원과 축복’으로 생각한다.   예전과 지금의 차이가 발생한 원인은 딱 하나다.‘치수’ 즉 강을 통제하는 기술과 능력이다.과거에는 자연을 통제하지 못해 발생하는 비용과 위험이 더 컸다면, 기술 발전과 자본 증대로 인해 현재는 혜택과 가치라는 장점이 훨씬 커졌다.   이렇게 같은 한강이라도, 시대에 따라 다른 취급(?)을 받고 있다.실제 한강 근처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온 필자의 생각도 그렇게 변해왔다.앞으로도 아름다운 한강 근처에서 살고 싶다. (사진)   “(한)강변 살자♬“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기술의 흥망 ① - 테이프와 새한미디어

기술의 흥망 ① - 테이프와 새한미디어   대한민국은 기술의 습득에 진심인 나라다.원조받던 세계 최빈국에서, 불과 70여 년 만에 원조하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유일한 나라다. ‘압축성장’과 함께 그만큼 교육과 기술 습득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필자가 국민학교 시절엔 주판을 배웠다. 칠판 위에 커다란 주판을 걸고 덧셈 뺄셈 등을 배웠다. (곱셈 나눗셈은 어려워서, 선생님들도 가르치지 못했던 것 같다) ‘넣기를’ 하면서 숫자를 부르면, 열심히 주판으로 계산을 하곤 했다.당시엔 주산 9단이 흔했고, TV에서 암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상업고등학교에선 주산은 필수였다. 은행이나 기업은 물론, 상점에서도 주판을 사용했다.   한편 당시 젊은이들은 야전(야외전축)이란 것을 이용했다. 야외에서 여럿이 모여서, 자랑스럽게 복사 LP판을 크게 틀고, 막춤 추는 걸 재미로 여겼다.   7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전산)와 계산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은행이나 기업에선 전산화 도입으로, 주산은 점점 입사와 관련이 없어졌고 계산기로 대체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카세트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일제 카세트녹음기가 야외전축을 대체했다. 음악 방송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는 건, 하나의 신기술이자 즐거움이었다. 필자는 카세트녹음기를 이용해, 친구들과 라디오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다. ‘녹음’이란 게 일반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특히 소니의 워크맨이 등장하면서, 카세트는 전성기를 누린다.카세트가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을 때, 비디오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동네마다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이 우후죽순 생겼다.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화는 기다리다 지쳤고, 유호프로덕션 같은 성인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아날로그 ‘테이프의 시대’였다.   지금의 반도체까지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이 점유율 세계 1위를 찍은 건 아마 테이프가 처음일 것 같다. 대표적인 회사가 1973년 이병철 회장의 둘째 아들인 이창희가 미국 마그네틱미디어와 합작해 세운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로, 1980년에 ‘새한미디어’로 이름을 바꾼 회사다. 이후 1980~1990년대 전 세계 및 국내 비디오·오디오 테이프 시장을 석권하며, 단일 기업 기준 세계 비디오테이프 점유율 1위(약 20%)를 달성했다.(왼쪽 사진) SKC 등과 함께 한국 기업들이 세계 비디오테이프 시장의 약 40% 이상을 쓸어담던 시기다. 특히 새한미디어는 북미와 유럽의 대형 유통망을 뚫으며, 전체 매출의 90% 이상을 해외 수출에 집중하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였을까? 새한미디어가 한창 잘 나가던 1995년 1월, 당시 단일 공장으로 세계 최대 규모였던 충주 비디오테이프 생산 공장에서 큰불이 나 약 300억~400억 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오른쪽 사진) 더 큰 문제는 전 세계 시장에 공급하던 비디오테이프 생산 라인이 멈추면서, 해외 바이어들과의 납기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등 수출망과 글로벌 시장 점유율에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이었다.새한미디어는 긴급 복구와 설비 재투자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이어 터진 IMF금융위기와 CD 등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만약’이란 건 없다지만) 새한미디어가 화재 이후 “기왕 망한 거, 차라리 신기술로 바꾸자” 하면서 투자의 방향을 돌렸으면,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생겼을 지 모른다. 많은 국민들이 안타까워했지만, 그렇게 테이프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기술의 흥망 ② - ᄒᆞᆫ글과 삼보컴퓨터

기술의 흥망 ② - ᄒᆞᆫ글과 삼보컴퓨터   1980년대 중반엔 본격적인 PC시대가 열렸다.이때만 해도 플로피디스크를 사용했다.(오른쪽 사진) 가장 흔히 사용했던 5인치 플로피디스크는 사진 한 장도 저장 못 하는 1.2메가에 불과했지만, 당시엔 미래 기술의 표상처럼 보였다.   필자가 입사 직후 처음 배운 건 DOS시스템이었다. 액셀 비슷한 프로그램인 ‘로터스123(Lotus123)’도 있었고, 그룹사마다 ‘훈민정음’이나 ‘장원’ 같은 독자적인 문서 작성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사용했다. 윈도우가 등장하며 MS 오피스 프로그램으로 모두 대체됐는데, 유일하게 한글 편집 프로그램으로 ᄒᆞᆫ글이 등장해 버텼다. 애국심에 힘입어, 공식적으로는 MS워드 대신 한글과컴퓨터의 ‘ᄒᆞᆫ글’을 많이 사용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경영난에 빠진 한컴이 마이크로소프트(MS)에 2,000만 달러 투자를 받는 대가로 ᄒᆞᆫ글 개발을 포기하려 하자, 전 국민적인 'ᄒᆞᆫ글 살리기 운동'이 일어나 시민 성금으로 한컴을 구해낸 일화는 전설적이다.이찬진 대표 퇴진 이후 한컴은 수차례 주인이 바뀌는 M&A 잔혹사를 겪으며 극심한 혼란을 겪어왔다. 결국 2010년 보안 소프트웨어 기업인 '소프트포럼'의 김상철 회장이 한컴을 인수하여, 지금은 ‘AI·클라우드 기업’으로 변신 중이란다.   1990년대엔 통신과 인터넷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팀이나 부서 당 1대 정도였던 PC가 1인당 한 대씩 지급했고 가정에도 놓이기 시작했다. ‘PC 붐’의 시작이었다.   이에 힘입어 PC 제조 전문회사가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회사가 ‘삼보컴퓨터’였다.(오른쪽 사진)이용태 박사가 창업한 삼보컴퓨터는, 국내 최초 PC 개발을 시작으로 1990년대 '국내 PC 시장‘을 주도했다. 삼보컴퓨터는 국내 성공을 기반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초저가 PC 브랜드 'eMachines'를 앞세워, 미국 베스트바이와 월마트 등에서 HP를 제치고 미국 PC 시장 점유율 3위까지 오르는 등 한국 IT 제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글로벌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초고속 인터넷망 보급과 맞물려 '두루넷' 등을 설립하며, 거대 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역시 또 호사다마(好事多魔). 미국 시장을 잘 모르고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삼보가 미국 시장에서 급성장하자, 글로벌 IT 기업들의 특허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IBM과 HP 등이 PC 제조 기초 기술 등에 대한 특허 침해 소송을 잇따라 제기했다. 자체 핵심 특허가 약했던 삼보는 특허 침해 판결 및 합의를 거치며, 대당 수십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특허 로열티를 미국 기업들에게 지불해야 했다. 성공은 여기에서 끝났다. 박리다매 초저가 PC' 구조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므로, 삼보의 수익성은 적자로 돌아서 버렸다.결국 미국 현지 법인(eMachines 및 삼보 USA)의 거대한 손실이 한국 본사로 전이되면서, 삼보컴퓨터는 2005년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됐다.이 사건은 해외에서 특허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이후 주연컴퓨터 등 PC 전문회사가 생겨났지만, 대기업PC와 조립PC 사이에서 별 강점을 가지지 못하면서 지금은 사실상 사라졌다.   어쨌든 PC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기업에선 문서를 PC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무보조 여직원들이 대신 작성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IMF가 터지면서 구조조정에 들어가자, 사무보조는 없어지고 각자 자신의 문서를 작성해야 했다. 이때부터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며, 보고서의 완성도가 곧 담당자의 능력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렇게 90년대엔 본격적인 ’컴퓨터의 시대‘가 막을 열었다.   <다음에 계속>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자유문답방
커뮤니티 문답방
  • 게시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