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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로 다닌다?

세트로 다닌다?   얼마 전 아내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그 집은 세트로 다닌다’라는 말을 했다. ‘부부가 가급적이면 함께 한다’는 뜻이다. 새삼스럽게 ‘왜 우리랑 다르지?’라는 의문이 생겼다.   생각해보니 우선 나이가 달랐다. 아내는 처가에서 맞이(66년생)고 바로 밑에 여동생(68년생) 그 밑에 남동생(70년생) 그 밑에 막내 여동생(73년생)이 있다. 그런데 70년대생 동생들이 세트로 다닌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필자의 딸(91년생)도 세트로 다닌다. 필자의 형제들은 형(56년생)과 누나(58년생) 그리고 막내인 필자(62년생)이다. 필자의 집과 처가의 둘째 즉 60년대 생까지는 세트로 다니지 않는다. 즉 가족 모임처럼 꼭 같이 다녀야 할 경우엔 모를까, 친구끼리 부부 모임 같은 건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편이나 아내나 각자 모임이나 약속에 다닌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전문가가 아니지만 나름대로 생각을 해봤다. 우선 나이가 많을수록 보수적이란 생각이다. 부부유별(夫婦有別)이나 남녀칠세부동석과 같은 생각이 아직 남아 있어서, 웬만한 곳이 부부끼리 함께 가거나 모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좀 사는 집에선, 아내가 안방(안채)을 차지하고 남편은 사랑방(사랑채)에 기거했었다.그리고 바깥양반(남편)은 나가서 경제적 책임을 졌고, 안사람(아내)는 집안일과 육아를 전담했다. 집안 살림은 여자의 몫이었고, 광(창고)열쇠도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물려줬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부부들은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세트로 다니고 모이는 것에 익숙하다. 경제적이나 집안일 그리고 육아에 이르기까지, 부부가 공동으로 부담한다.   필자는 꼰대여서 그런지, 젊은 부부 스타일은 답답해서 힘들 것 같다. 아무리 부부라도 각자의 생활이나 활동이 있을 수 있고,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필자의 부부는 평일이라면 어떤 약속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술 좀 그만 또는 적게 마시란 잔소리는 듣는다) 다만 휴일엔 가급적 집에 있는 게, 무언의 합의 사항이다.   물론 어떤 스타일이 더 낫고 못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또 부부 마다의 스타일이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생각도 바뀌게 마련이다. 문제만 없다면 그냥 살던 대로 편하게 사는 게 최선이 아닌가 싶다.   <묻는다일보 바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주산과 주판은 어디로?

주산과 주판은 어디로?   지난 번 계산기 얘기를 올리고 나니 문득 주판 생각이 떠올랐다.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주산은 교육 과정이었다. 선생님이 커다란 주산을 칠판에 걸어 놓고 가르치고, 학생들은 주판 하나씩 준비해 와 실습을 했다. 필자도 주산 수련장을 사서 풀어본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땐 필자의 누나가 쓰던 주판을 뒤집어 발로 타고 밀고 다니려다 야단 맞은 기억도 있다. 주판이 지금의 롤러스케이트처럼 잘 미끄러졌기 때문이다.필자의 누나가 쓰던 주판은 나무알이었다. 틩기는 촉감이 좋았다. 주판엔 위층 한 줄 아랫층에 다섯 줄로 주판알이 있었는데, 사실 맨 아래인 다섯번 째 주판알은 사용할 일이 없었다. 위층 하나가 5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주판알이 플라스틱으로 바뀌고 아랫층 주판알이 4개로 줄어든 제품으로 대체되었다. 왠지 손 느낌도 안 좋고, 허전해 보였다.   주산학원도 인기였다. 주산을 배우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소문이 퍼져서, 주산을 배우기 위해 학원을 가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그러면 당연히 급수를 따게 되고, 주산학원은 늘어갔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넣기를, 00000원이요 *****원이요...”라며 불러주는 숫자를 주판으로 계산하는 시험과목도 있었다. 당시엔 계산기가 없을 때여서, 상업계열에선 주산이 필수였다. 특히 상고에 진학하거나 취업하기 위해선 주산 급수를 따야 했다. 회사에서도 사람들은 모두 주판을 사용했고, 특히 회계 담당부서에선 주산하는 직원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전산이라곤 없는 시기여서, 회계 경리 부서엔 직원이 많았고 그들은 열심히 주판알을 틩겼다.   주산은 9단이 최고였는데, 가끔 방송에 나와 암산을 시범보이기도 했다.한번은 출연자가 20대 초반의 여성으로 기억되는데, 그 여성이 세계암산대회 우승자라고 소개했다. 당시엔 어떤 분야든 세계대회 우승자라고 하면, 국위 선양을 했다고 큰 환대를 받을 때였다. 그때마다 ‘역시 한국사람들은 머리가 좋아’라고 자화자찬했다. (어린 마음에 ‘머리가 좋은데 왜 이렇게 못 살아’라는 근원적 의문이 들었다)암산 시범 방식은 이랬다. 큰 종이에 수십 자리의 숫자를 수십 줄 적어 놓은 문제지를 걸면, 세계암산대회 우승자인 주산 9단이 눈으로 대충(?) 훑어보고는 금세 답을 적었다. 물론 정답이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으로 읽는 시간보다도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나중엔 세계 어딘가에서 계산기 대표선수와 주산 대표선수가 맞붙어 주산 선수가 이겼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만큼 주산이 우수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게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교구용으로 주판을 판매하지만, 실제 주판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많던 주산학원도 안 보인다.주산을 시작할 때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가운데 막대기를 훑어서 주판알을 위와 아래로 옮겨 놓고, 똑딱 소리를 내며 주판알을 틩기다가 끝나면 주판을 흔들며 털던 촉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극장에 관한 기억

극장에 관한 기억   요즘 한국영화가 위기라고 한다. 관객수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OTT의 보급을 들었다. 한 달에 영화 한 편 값도 안 되는 금액으로 넷플릭스 같은 곳에서 영화나 드라마 서비스를 무한정 받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OTT 가입자가 크게 늘면서, 웬만한 영화가 아니면 굳이 영화관에 가서 돈을 쓸 이유가 없어졌다.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어릴 적 영화관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개봉관과 제2개봉관 등으로 극장이 나뉘어 있었다. 개봉관은 처음 개봉하는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으로, 서울에는 단성사 등의 극장이 있었다. 개봉관에서 상영을 마친 영화는 제2개봉관인 계림 아세아 극장 등으로 옮겨갔고, 그 다음엔 성남 금성 등으로 극장으로, 그러다가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던 극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동네 극장은 대부분 썰렁했고, ‘영화도 보고 쇼도 보고’하는 극장도 있었다.   필자가 대학 다니던 시절, 개봉 영화를 보려면 주로 종로로 갔다. 그런데 대부분 매진인 경우가 많았다. “암표 있어요‘라며 가다 오는 암표 장사가 득실거렸다.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엔 암표 값도 내려갔다. 재수가 좋으면 거의 제값 주고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돈이 없는 젊은이들은 피카디리 단성사에서 서울극장 – 명보 – 스카라 – 국도 – 대한극장까지 걸어오면서 극장을 탐방(?)하기도 했다.   그런데 개봉관에서 동네 극장까지 넘어갈수록 간판도 차이가 컸다.당시엔 영화 간판을 일일이 그렸는데, 동네 극장에 오면 이게 그 배우가 맞는지 구분조차 안 됐다. 특히 동네 극장에선 상영 중에 필름이 끊어지기 일쑤였다. 여러 단계를 거치는 동안 필름이 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름이 끊기면 관객들은 휘파람을 불거나 야유를 보냈다. 관객들은 기사가 필름을 잘라먹는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동네 구멍가게 같은 곳엔 극장의 포스터를 붙였다. 포스터를 붙여주는 대가로 가게 주인에게 극장 입장권을 두 장씩 줬다. (완전 무료 입장권은 아니고 10원 정도를 내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가게 주인은 그걸 다시 팔았다.   당시 극장 중 거의 대부분은 사라졌다. 그래도 근처에 가면 한참을 줄 서서 표를 사던 기억이 난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바른생활과 반공도덕

바른생활과 반공도덕   필자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바른생활’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국산사자음미실바’라고 하는 과목 중 맨 마지막 과목이었다. 사회 생활을 하는데 있어 규범과 도덕을 가르치는데 목적이 있었다. 바른생활은 너무나 올바른(?) 내용만 있어서 시험을 보면 100점 짜리가 수두룩했다. 요즘도 법과 규범을 잘 지키는 사람을 ‘바른생활 사나이’ 등으로 칭하는 걸 보면, 바른생활이란 과목의 힘이 꽤 대단했나 보다.그런데 어느 경우엔 바른생활 대신 ‘반공도덕’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바른생활은 도덕인데 앞에 ‘반공’이 더 붙은 것이다.   당시엔 반공 방첩 승공 등의 단어가 생활화되었다. 왼쪽 가슴에 이런 표찰을 붙이고 다니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다. 학교에서도 북한이 얼마나 악랄하고 나쁜 지에 대해 가르쳤다. 북한은 주민들에게 ‘천리마 운동’ ‘새벽별 보기 운동’ 같은 걸 강요하면서 노동력을 수탈하고 있다고 배웠다. 북한 사람들이 참 불쌍하게 느껴졌다.   반공 포스터엔 북한 사람은 머리에 뿔이 달려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런 게 하도 많다 보니, 정말 뿔 딸린 나쁜 사람처럼 세뇌되었다. 하지만 이후 ‘남북이산가족상봉’에 나타난 북한 사람들은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북한 역시 비슷하게 선전하고 세뇌하던 시절이었다.   정부는 특히 ‘간첩 신고’에 대해 강조했다.학생들은 학교에서도 자주 간첩 식별법에 대해 배웠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을 비방한다’ 거나 ‘밤에 몰래 라디오를 듣는다’ 혹은 ‘담배값을 모른다’ 같은 경우다. 이런 사람들은 신고해 ‘간첩을 잡으면’ 엄청난 포상금을 준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정작 신고 당해 잡혀간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당시 간첩 신고는 반공 교육과 함께 국민들이 서로를 감시하게 하려는 정부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식의 ‘반공도덕’이 진정 ‘바른생활’이라니, 정말 어이없을 뿐이다.하지만 당시엔 냉전 시대의 참혹했던 현실이었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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