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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흥망 ② - ᄒᆞᆫ글과 삼보컴퓨터

기술의 흥망 ② - ᄒᆞᆫ글과 삼보컴퓨터   1980년대 중반엔 본격적인 PC시대가 열렸다.이때만 해도 플로피디스크를 사용했다.(오른쪽 사진) 가장 흔히 사용했던 5인치 플로피디스크는 사진 한 장도 저장 못 하는 1.2메가에 불과했지만, 당시엔 미래 기술의 표상처럼 보였다.   필자가 입사 직후 처음 배운 건 DOS시스템이었다. 액셀 비슷한 프로그램인 ‘로터스123(Lotus123)’도 있었고, 그룹사마다 ‘훈민정음’이나 ‘장원’ 같은 독자적인 문서 작성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사용했다. 윈도우가 등장하며 MS 오피스 프로그램으로 모두 대체됐는데, 유일하게 한글 편집 프로그램으로 ᄒᆞᆫ글이 등장해 버텼다. 애국심에 힘입어, 공식적으로는 MS워드 대신 한글과컴퓨터의 ‘ᄒᆞᆫ글’을 많이 사용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경영난에 빠진 한컴이 마이크로소프트(MS)에 2,000만 달러 투자를 받는 대가로 ᄒᆞᆫ글 개발을 포기하려 하자, 전 국민적인 'ᄒᆞᆫ글 살리기 운동'이 일어나 시민 성금으로 한컴을 구해낸 일화는 전설적이다.이찬진 대표 퇴진 이후 한컴은 수차례 주인이 바뀌는 M&A 잔혹사를 겪으며 극심한 혼란을 겪어왔다. 결국 2010년 보안 소프트웨어 기업인 '소프트포럼'의 김상철 회장이 한컴을 인수하여, 지금은 ‘AI·클라우드 기업’으로 변신 중이란다.   1990년대엔 통신과 인터넷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팀이나 부서 당 1대 정도였던 PC가 1인당 한 대씩 지급했고 가정에도 놓이기 시작했다. ‘PC 붐’의 시작이었다.   이에 힘입어 PC 제조 전문회사가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회사가 ‘삼보컴퓨터’였다.(오른쪽 사진)이용태 박사가 창업한 삼보컴퓨터는, 국내 최초 PC 개발을 시작으로 1990년대 '국내 PC 시장‘을 주도했다. 삼보컴퓨터는 국내 성공을 기반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초저가 PC 브랜드 'eMachines'를 앞세워, 미국 베스트바이와 월마트 등에서 HP를 제치고 미국 PC 시장 점유율 3위까지 오르는 등 한국 IT 제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글로벌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초고속 인터넷망 보급과 맞물려 '두루넷' 등을 설립하며, 거대 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역시 또 호사다마(好事多魔). 미국 시장을 잘 모르고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삼보가 미국 시장에서 급성장하자, 글로벌 IT 기업들의 특허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IBM과 HP 등이 PC 제조 기초 기술 등에 대한 특허 침해 소송을 잇따라 제기했다. 자체 핵심 특허가 약했던 삼보는 특허 침해 판결 및 합의를 거치며, 대당 수십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특허 로열티를 미국 기업들에게 지불해야 했다. 성공은 여기에서 끝났다. 박리다매 초저가 PC' 구조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므로, 삼보의 수익성은 적자로 돌아서 버렸다.결국 미국 현지 법인(eMachines 및 삼보 USA)의 거대한 손실이 한국 본사로 전이되면서, 삼보컴퓨터는 2005년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됐다.이 사건은 해외에서 특허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이후 주연컴퓨터 등 PC 전문회사가 생겨났지만, 대기업PC와 조립PC 사이에서 별 강점을 가지지 못하면서 지금은 사실상 사라졌다.   어쨌든 PC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기업에선 문서를 PC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무보조 여직원들이 대신 작성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IMF가 터지면서 구조조정에 들어가자, 사무보조는 없어지고 각자 자신의 문서를 작성해야 했다. 이때부터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며, 보고서의 완성도가 곧 담당자의 능력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렇게 90년대엔 본격적인 ’컴퓨터의 시대‘가 막을 열었다.   <다음에 계속>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기술의 흥망 ① - 테이프와 새한미디어

기술의 흥망 ① - 테이프와 새한미디어   대한민국은 기술의 습득에 진심인 나라다.원조받던 세계 최빈국에서, 불과 70여 년 만에 원조하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유일한 나라다. ‘압축성장’과 함께 그만큼 교육과 기술 습득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필자가 국민학교 시절엔 주판을 배웠다. 칠판 위에 커다란 주판을 걸고 덧셈 뺄셈 등을 배웠다. (곱셈 나눗셈은 어려워서, 선생님들도 가르치지 못했던 것 같다) ‘넣기를’ 하면서 숫자를 부르면, 열심히 주판으로 계산을 하곤 했다.당시엔 주산 9단이 흔했고, TV에서 암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상업고등학교에선 주산은 필수였다. 은행이나 기업은 물론, 상점에서도 주판을 사용했다.   한편 당시 젊은이들은 야전(야외전축)이란 것을 이용했다. 야외에서 여럿이 모여서, 자랑스럽게 복사 LP판을 크게 틀고, 막춤 추는 걸 재미로 여겼다.   7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전산)와 계산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은행이나 기업에선 전산화 도입으로, 주산은 점점 입사와 관련이 없어졌고 계산기로 대체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카세트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일제 카세트녹음기가 야외전축을 대체했다. 음악 방송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는 건, 하나의 신기술이자 즐거움이었다. 필자는 카세트녹음기를 이용해, 친구들과 라디오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다. ‘녹음’이란 게 일반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특히 소니의 워크맨이 등장하면서, 카세트는 전성기를 누린다.카세트가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을 때, 비디오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동네마다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이 우후죽순 생겼다.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화는 기다리다 지쳤고, 유호프로덕션 같은 성인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아날로그 ‘테이프의 시대’였다.   지금의 반도체까지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이 점유율 세계 1위를 찍은 건 아마 테이프가 처음일 것 같다. 대표적인 회사가 1973년 이병철 회장의 둘째 아들인 이창희가 미국 마그네틱미디어와 합작해 세운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로, 1980년에 ‘새한미디어’로 이름을 바꾼 회사다. 이후 1980~1990년대 전 세계 및 국내 비디오·오디오 테이프 시장을 석권하며, 단일 기업 기준 세계 비디오테이프 점유율 1위(약 20%)를 달성했다.(왼쪽 사진) SKC 등과 함께 한국 기업들이 세계 비디오테이프 시장의 약 40% 이상을 쓸어담던 시기다. 특히 새한미디어는 북미와 유럽의 대형 유통망을 뚫으며, 전체 매출의 90% 이상을 해외 수출에 집중하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였을까? 새한미디어가 한창 잘 나가던 1995년 1월, 당시 단일 공장으로 세계 최대 규모였던 충주 비디오테이프 생산 공장에서 큰불이 나 약 300억~400억 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오른쪽 사진) 더 큰 문제는 전 세계 시장에 공급하던 비디오테이프 생산 라인이 멈추면서, 해외 바이어들과의 납기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등 수출망과 글로벌 시장 점유율에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이었다.새한미디어는 긴급 복구와 설비 재투자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이어 터진 IMF금융위기와 CD 등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만약’이란 건 없다지만) 새한미디어가 화재 이후 “기왕 망한 거, 차라리 신기술로 바꾸자” 하면서 투자의 방향을 돌렸으면,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생겼을 지 모른다. 많은 국민들이 안타까워했지만, 그렇게 테이프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기술의 흥망 ③ - 삐삐와 mp3

기술의 흥망 ③ - 삐삐와 mp3   1990년대는 아날로그가 점차 저물고, 디지털 문화가 시작하는 시기였다.   1990년대 초엔 삐삐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1993년 서울이동통신 등 민간 사업자(015 사업자들)의 참여로 요금이 대폭 내려가며, 중고등학생까지 "1인 1삐삐" 시대가 열렸다. 1997년에는 가입자 수가 1,500만 명을 넘어서며 국민 절반 가까이 사용하는 최전성기를 누렸다. 공중전화 앞 길게 늘어선 줄과 '삐삐 용어(예: 8282, 1004 등의 숫자 암호)'가 시대의 상징이었다. (사진)이때 삐삐 단말기를 만든 팬택이나 스탠더드텔레콤 같은 기업은 1990년대 중반 1억 달러가 넘는 수출고를 올리며, 글로벌 시장에서 주요 공급업체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휴대폰이 일반화되면서, 삐삐의 시대는 갑자기 몰락했다. 하지만 이 당시 개발했던 세계 최고 수준의 ‘삐삐 기술’은 그대로 남아, 'CDMA 휴대폰 강국'(세계 2위)의 기술적 토대가 되고 '세계 진동벨 시장 독점'이라는 유산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후반에는 디지털 시대에 걸맞는 파격적인 신기술이 한국에서 개발되었다. 바로 mp3다.1997년 국내 벤처기업 '디지털캐스트(대표 황창규)'가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중견기업 '한아시스템'이 자금을 대어, 1998년 3월 '엠피맨(MPMan F10)'이라는 이름으로 상용화에 성공했다.그런데 당시 메모리 용량은 고작 32MB여서, MP3 노래를 6~8곡 정도만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테이프나 CD 없이 디지털 파일만으로 음악을 들고 다닌다"는 개념 자체는 가히 혁명적이었다.출시 초기 국내에서는 "노래가 6곡밖에 안 들어가는데 너무 비싸다(당시 약 20만 원대)"거나 "음원 불법 복제를 부추긴다"는 음반 업계의 반발을 받았다. 자금난과 특허의 중요성을 몰랐던 디지털캐스트는 MP3P 원천 특허를 미국 기업인 'S3(소닉블루)'에 헐값에 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이 미국 기업이 만든 'Rio 500'이라는 제품이 미국 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앞서 언급했던 삼보컴퓨터에 이어, 특허에 대한 개념 부족이 나은 참사였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깝다.   이후 국내 기업인 레인콤(아이리버)이 독보적인 디자인으로 2000년대 초반 세계 MP3P 시장 1위를 차지하며, 잠시 한국의 자존심을 세웠다. 하지만 곧 애플이 '아이팟(iPod)'과 '아이튠즈(음원 플랫폼)'를 출시하면서, 주도권은 완전히 미국 애플로 넘어갔다.   그럼에도불구하고 1990년대는 반도체 세계 1위와 함께, 삐삐 휴대폰 등 통신기기와 mp3 등으로 ‘기술 한국’을 전세계에 각인시키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다음에 계속>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기술의 흥망 ④ - 새롬기술과 벤처기업 붐

기술의 흥망 ④ - 새롬기술과 벤처기업 붐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가 덮치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다.IMF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정부는 신성장 동력 확보 및 고용 창출을 위해 IT·벤처기업 육성을 국정 핵심 과제로 잡았다. 특히 코스닥(KOSDAQ) 시장의 요건을 완화하고 스톡옵션 비과세 혜택을 확대되면서, 2000년대 초까지 ‘벤처기업 붐’을 이끌었다.   그러자 별 것 아닌 기술에 떼돈이 몰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새롬기술’이다.새롬기술은 1999년 10월, 컴퓨터로 미국 등 전 세계에 무료로 전화를 걸 수 있는 ‘다이얼패드 서비스’를 발표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당시 비싼 국제전화비를 대폭 아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발표 직후 가입자가 폭주했다. 1999년 8월 공모가 2,300원(액면가 500원 기준)으로 코스닥에 상장한 후, 6개월만에 150배 폭등하며 주당 308,000원(2000년 3월 6일 장중 기록)까지 치솟으며 재계 서열 7위에 올라버렸다. (사진) 이러한 과열 현상이 9시 뉴스에도 방송됐고, 얼마나 오를지가 초미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료 전화를 제공하고 광고 수익을 얻는 모델이었는데, 별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자 금세 거품이 꺼져버렸다. 나중에 ‘역대 최대의 작전’이라고도 평가했는데, 결국 따라다닌 투자자들만 큰 손해를 봤다.   “당장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문자 수(회원 수)’만 늘이면, 향후 광고나 커머스로 돈을 벌 수 있다"며 ‘닷컴 기업’에도 ‘눈먼 돈’이 몰렸다. 대표적인 기업이 1997년 설립된 골드뱅크다. 이 회사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광고를 시청하면 회원에게 현금이나 포인트를 적립해 주는, ‘인터넷 보상형 광고’ 모델로 주목을 받았다. 1998년 코스닥에 상장한 후 단 몇 개월 만에 약 38배(최저가 대비 기준)까지 폭등하며, 닷컴 열풍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회원 수만 늘어날 뿐, 실제로 광고가 없어 곧 한계가 왔다. 또 ‘눈 먼’ 투자자들만 망했다.   당시에는 이렇게 실질적인 매출이나 구체적인 수익 모델이 없더라도, 상호에 ‘.com(닷컴)’ ‘기술(테크)’ 같은 단어만 들어 있으면 ‘미래 가치’라며 대규모 자금이 몰렸다. 기업 M&A 시장에도 큰 자금이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 그야말로 ‘묻지마 투자’였다. 그러자 기존의 전통적인 사명을 버리고 회사 이름 뒤에 .com을 붙이거나 IT 느낌이 나는 이름으로 바꾸기만 해도, 주식이 상한가를 기록할 정도였다.재무제표보다 사업계획서나 아이디어 발표회(IR) 한 번으로 수십억~수백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는 경우도 흔했다.   IMF 위기로 투자받지 못해 한동안 쩔쩔맸는데, 갑자기 세상이 바뀌며 몫돈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자기 돈 좀 투자받아 달라’며 애원(?)했다. 참 희한한 세상이었다. 돈이 마구 몰려들어 오자 벤처기업들은 임차료 비싼 테헤란로에 사무실을 차렸고, CEO들은 매일 밤 강남 룸싸롱에서 아낌없이 남의 돈을 펑펑 써 댔다. 강남 룸싸롱의 황금시대이기도 했다. 이렇게 눈먼 돈들은 벤처업자(?)들의 배만 불리고,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벤처기업에 목돈이 모이고 스톡옵션이 활성화되면서, 인재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대기업 연구소에 다니던 많은 엘리트들이 스톡옵션과 ‘한방’을 노리고 벤처기업으로 옮겨갔다. 액면 500원짜리 스톡옵션 주식이 ‘10만원 이상 갈 것’이라는 경우도 흔했다. 오죽하면 대기업에 그대로 남았던 연구원과 기술자들을 보고, ‘오라는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남은 사람들’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하지만 꿈을 안고 벤처로 간 이들 중 상당수는 ‘버블 붕괴’와 함께 빚더미에 올라야 했다. 이때 인생이 완전히 꼬여버린 이공계 출신 인재들이 정말 많았는데, 일부는 그 여파로 지금까지도 어렵게 살고 있다.   <다음에 계속>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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