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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문편지 이야기 - ① 허구헌날 쓰던...

위문편지 이야기 - ① 허구헌날 쓰던...   요즘 언론에는 지난해 12월 30일 모 여고에서 작성한 국군위문편지가 도마 위에 올랐다.어떤 여고 2학년생은 "군생활 힘드신가요? 그래도 열심히 사세요^^ 앞으로 인생에 시련이 많을 건데 이 정도는 이겨줘야 사나이가 아닐까요?"라며 "군대에서 노래도 부르잖아요. 사나이로 태어나서 어쩌구"라고 썼다가 지우기도 했다. 그리고 "추운데 눈 오면 열심히 치우세요^^"라고 덧붙였다.또 다른 위문 편지에는 "아름다운 계절이니 군대에서 비누는 줍지 마시고 편안한 하루가 되길 바란다"며 "이 편지를 받는 분께 죄송하지만 집 가고 싶은 마음은 똑같을 것"이라고 쓰여있다. '비누는 줍지 마시고'라는 대목은 ‘자위행위’의 은어가 아닌가 싶다.   이런 편지들이 군인을 조롱한다는 내용으로 사회적 문제가 일자, 청와대 국민청원엔 ’여고생이 다른 남성을 위문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위문편지 중단을 촉구하는 글이 올라왔다.하지만 나름 알아보니, 요즘은 강제로 쓰는 경우는 없고, 만약 위문편지를 쓰면 봉사활동 12시간을 준다고 한다. (학교마다 다를 수 있음) 어쨌든 이런 편지를 쓰는 여학생들은 학교나 가정 교육 또는 본인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필자는 아직도 위문편지라는 게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필자가 어렸을 때 참 위문편지 많이 썼다. (또 ’라떼‘ 얘기임) 수시로 썼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썼는지 추산이 안된다.   당시엔 군인이면 20살 짜리도 무조건 군인아저씨였다. 그래서 항상 모든 위문편지 시작은 ’국군장병아저씨께’로 시작했다. (필자의 아내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국군장병 아저씨께”라고 썼다고 한다) 내용도 똑같았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국군아저씨 덕분에 우리는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다‘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식으로 맺었다. 아무리 길게 써 봤자 10줄을 못 넘겼다. 하지만 편지지와 봉투를 선생님이 나눠주시면, 어린 마음에 ’애국‘한다는 마음으로 연필로 꼭꼭 편지를 눌러 썼다.   하지만 갈수록 성의가 없어졌다. 빨리 끝내려다 보니 글씨도 엉망이고 내용도 똑같았다. 누가 언제 써도 판박이다. 언제나 내용이 똑같은 편지를 보고 국군아저씨들이 좋아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 커서 고등학교 때 쓰려니, 아저씨도 아니고 적으면 두어 살 많은 형하테 이런 걸 써야 하나 싶기도 했다. 필자가 고등학생 때엔 ’저도 곧 군대에 가서 형님의 뒤를 이어 나라를 열심히 지키겠습니다‘라고 쓴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 들어 알고 보니 어린 생각이 맞았다. 편지를 받는 국군아저씨들도 특히 남학생들이 쓴 편지는 휙휙 눈으로 대충 훑어보거나, 아예 뜯지도 않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여학생들이 보낸 편지만 인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쓸데 없는 일을 왜 시켰을까?내일 위문편지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연탄’하면 떠오르는 - ① 연탄재

‘연탄’하면 떠오르는 - ① 연탄재필자가 오후에 자주 찾는 곳이 인현시장이다. 사무실에서도 가깝고 비교적 식사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연탄 기부 배너를 보게 되었다. (사진 참조) 요즘 연탄 한 장에 800원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불현듯 어렸을 때 연탄 생각이 났다. (또 ‘라떼’ 얘기임)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가정이 연탄을 땠다. 연탄으로 요리도 하고, 겨울에 방도 덥혔다. 보통 연탄을 사용하는 온돌식이었다. 당시엔 기름값이 워낙 비쌌고, 도시가스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일러가 있어도 대개 연탄 보일러였다.그런데 연탄을 사용하는 게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연탄은 부피가 커서 광(창고) 같은 공간이 있어야 했다. 물에 약해서 비를 맞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12월 초 쯤 김장과 함께, 연탄을 100장 이상 광에 채워 넣어야 월동 준비가 끝났다. 게다가 아궁이마다 하루에 한두번씩 연탄을 갈아 줘야 해서, 겨울에 어머니들은 꼭 잠자다 한번 깨서 연탄을 갈아줘야 했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다.그런데 연탄재도 큰 문제였다. 시인 안도현은 ‘너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지만, 사실 연탄재는 정말 쓸모가 없었다.가정에서 배출되는 쓰레기의 대부분이 연탄재였다. 간혹 쓸데가 있었는데, 겨울에 눈이 왔을 때 모래 대용으로 빙판이나 계단에 부숴서 뿌리는 정도였다. 그 많은 연탄재는 정부 입장에서도 골칫거리였다. 언젠가 연탄재를 이용해 벽돌을 생산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뉴스가 있었으나, 흐지부지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생산성이나 품질에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70년대 중반 이후 중앙난방을 하는 아파트가 많아지고 가스 보일러가 보급되면서 연탄은 사라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도 수만 가구가 연탄을 사용하고 있는데, 대개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로 차도 못 들어가는 비좁은 길에 집에 산다. 그래서 연탄 배달 자원봉사자들이 고마울 수밖에 없다.어쨌든 새까만 연탄이 불을 때고 나면 허옇게 변해서 버려지는 것이, 사람도 검은 머리가 허옇게 변하면서 쓸모없이 되어 가는 게 닮은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이 든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연탄’하면 떠오르는 - ② 연탄가스

‘연탄’하면 떠오르는 - ② 연탄가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날씨가 추워지면 난방을 위해 아궁이에 연탄을 때야 했다. (그 당시엔 “때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데 연탄을 땔 때 발생하는 연탄가스가 가장 큰 문제였다. 연탄가스는 연탄이 제대로 연소가 되지 못해 발생하는 일산화탄소다. 심하면 사망에 이르거나 뇌 손상을 입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야 했다. 사람들은 연탄을 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탄가스를 잘 막는 수밖에 없었다. 연탄가스는 주로 방바닥과 벽 사이의 작은 틈에서 들어오기 때문에, 특히 구석구석을 장판지로 꼼꼼히 붙여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보이지 않는 틈으로 가스가 새들어와, 연탄가스의 피해를 안 겪어 본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필자도 10살 쯤에 한번 가스를 맡아서(당시엔 ’중독‘이란 표현보다 ’맡았다‘ 또는 ’마셨다‘는 표현을 썼다) 하루 종일 머리가 띵했던 적이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고 했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지만, 연탄가스 사망자는 주변에서도 가끔 발생하는 흔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 관련 기사가 대서특필했다. ’동치미 국물‘ 또는 ’김칫국물‘이 연탄가스에 특효라는 보도였다. 연탄가스를 맡고 위중한 사람이 동치미 국물을 마시고 나았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이를 입증하는 보도도 뒤따랐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입증은 되지 못했다.   그런데 희한하게 대입 수험생들이 대입 시험 직전에 연탄가스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평소에 공부를 잘하는 학생인데 운이 없게 연탄가스를 맡아서 시험을 잘 못 봤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뻥‘이었다. 당시의 어머니들은 자식들이 공부 잘하는 게 자랑이었다. 만약 초등학교 때 반에서 10등 정도 하는 학생이 어쩌다 한번 시험에서 반에서 3등 정도 하면, 그의 어머니는 주변에 ’우리 애가 반에서 3등 안에 든다‘고 자랑한다. 문제는 평소엔 10등 정도 하는 그 학생이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대개 석차가 20등 밑으로 점점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이미 주변에 얘기해 놓은 게 있어서, ”요즘도 공부 잘하지? 반에서 3등 안에 든다며?”라는 질문을 받으면 자존심 상 “그렇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학 시험 결과가 나오면 ’그 전날 연탄가스를 마셔서 시험을 잘 못 봤다‘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연탄과 함께 연탄가스도 사라졌다.대개 뭔가 사라지는 건 아쉽지만, 연탄재와 연탄가스는 전혀 아쉽지 않고 반갑기만 하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위문편지 이야기 - ② 그래도 역할을 했다

위문편지 이야기 - ② 그래도 역할을 했다   50~60년대 군대는 정말 춥고 배고픈 곳이었다. 하도 배가 고파 무를 뽑고 난 밭에 부러진 무 조각도 좋아라 주워 먹을 정도였다. 게다가 군기는 엄청나게 강했다. 말이 군기지 만날 두들겨 맞았다. 지금은 ‘가혹행위’라고 하지만 필자가 군에 이을 때만 해도 ‘구타 금지’가 표어처럼 있었다. 물론 구타를 하는데도 나름 이유도 있었고, 구타가 좋아서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거라 믿고 싶다. 하지만 여름이면 밤에 속옷만 입혀 밖에 세워 놓고 ‘모기 회식’을 한다거나, 겨울에 찬물 속에 뛰어들게 하는 건 단순히 군기 차원은 아닌 것 같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군 내무반엔 TV가 없었다. (일반 가정에도 잘 사는 집만 있었다)그런데 혈기가 넘치는 20대 남성들만 있는데 즐길 거리가 없었다. 그러니 딴 생각 못하게 괴롭히거나, 누군가를 괴롭히며 즐거움으로 삼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나마 유일한(?) 즐거움은 위문편지였다. 필자가 어렸을 때 그렇게 쓰기 싫었던 위문편지가, 고생하는 군인 아저씨들에겐 작은 ‘위문’이 되었다.   그런데 70대 후반부터 군대 내 배식도 좋아지고, 무엇보다 TV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80년대 초에는 모든 내부반에 칼라TV와 VTR(비디오 플레이어)이 설치되었다. 보고 싶은 여성 가수나 탤런트도 보고, 영화도 빌려볼 수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 이후 구타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군대 내에서 구타가 사라진 건 군 사병들의 의식 향상이 가장 큰 이유지만, 즐거움을 주는 ‘오락 거리’도 큰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더 재미있는 게 있는데, 굳이 즐겁기 위해 남을 괴롭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후 강제로 쓰는 위문편지의 인기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학생들이 쓰는 편지나 읽어볼 뿐, 남학생들의 편지는 찬밥신세였다. 결국 언제부터인가 강제로 쓰는 위문편지가 사라졌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쓰는 ‘위문’의 효용성이 줄고, 국군장병아저씨들도 위문편지보다 TV나 비디오에서 더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흔히 어떤 역사적 사건을 볼 때, 지금이 아닌 당시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한때 위문편지는 아무런 즐거움 없이 고생하는 군인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의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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