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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① - 황제가 애용한 종이

한지 ① - 황제가 애용한 종이   그동안 유럽의 문화재 복원 시장은 일본의 전통 종이인 '화지(和紙)'가 선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유럽 복원 학계가 한지의 압도적인 우수성에 주목하면서, 2015년 교황 요한 23세의 애장품인 지구본을 복원하는 데 전통 한지를 채택했다. 이탈리아 산업연구센터 등의 실험 결과, 한지는 잘 찢어지지 않고 변형이 적어 "최소 8,000년 이상 지속될 수 있다"는 탁월한 판정을 받았다.   사실 한지는 오래전부터 세계 최고의 종이로 인정받고 있었다.중국 송 원 명 청 왕조 동안 황제와 황실은 물론 관리와 학자들까지, 한지를 최고로 쳤다. 서예와 그림에 미쳐있던 송나라 휘종은 고려지(한지)를 매우 아꼈으며, 당대 중국 문인들은 한지를 일컬어 "누에고치로 만든 것처럼 희고 매끄러우며, 다듬이질을 해 앞뒤가 모두 거울 같다"고 극찬할 정도였다.송나라의 대표 문인 소동파(蘇東坡)도 “종이의 성질이 단단하고 부드러워 서화(글과 그림)를 쓰기에 가장 좋다. 이것은 중국에는 없는 물건이다."라고 극찬했다. 청나라 건륭제는 조선 종이의 매끄러운 특성을 좋아해, 황실에 보관 중이던 조선지로 시를 쓰고 낙관을 남기기도 했다.   오죽하면 1221년 원나라는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자마자, 가장 먼저 종이 10만 장이나 요구했다. 원나라 황실은 황제의 칙서를 쓰거나 중요 문서를 인쇄할 때 반드시 고려지(한지)를 고집했는데, 희고 매끄러우며 두터운 질감이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에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종이를 발명한 국가이고 대나무로 만든 '선지'가 있었지만, 한지의 기술력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었다.이렇게 한지는 엄청난 가치를 지니며, 지금 최고 명품급의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중국과의 무역에서 한지는 사실상 현금이나 황금처럼 통용되는 자산이 되었다. 명나라 초기엔 조선의 종이 수십 장이 황금 한 돈과 맞먹을 정도로 비싸게 거래되었는 기록도 있다. 그러다보니 중국의 고위 관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로비 물품이 바로 한지였다. 사신들이 중국에 갈 때 한지를 챙겨가면, 현지 고관대작들이 서로 얻으려고 줄을 섰다고 한다. 중국 문인들 사이에서는 "조선 종이를 얻는 것이 보물을 얻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한지는 국가 전략 물자가 되었다. 당연히 정부가 관리할 필요가 있었고, 조선지(한지)를 위해 국가기관을 세웠다. 세종 때 (세종대왕은 여기서도 등장한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엄청난 양의 책을 펴내기 시작하면서, 종이의 대량 생산과 품질 개량을 위해 조지소(造紙所)를 세웠다. (세조 때 조지서로 격상됨) 종이를 만들려면 엄청난 양의 깨끗한 물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조지서는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세검정 계곡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진)   물론 한지에도 등급이 있었다.용도와 두께 그리고 도침(다듬이질) 등으로 결정하는데, 가장 난이도가 높은 건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공식 외교 문서의 종이인 표지(表紙)였다. 그다음이 어람지 교지 실록지 등 궁에서 사용하는 최고급 한지가 있었고, 관청에서 행정 문서를 쓸 때 사용한 자지(姿紙)와 선비들이 시를 쓰거나 편지를 보낼 때 쓰던 종이인 시전지(詩箋紙) 등도 고급 한지에 속했다.   이렇게 당시 세계 최고의 종이를 생산했다 건, 그만큼 최고의 기술이라는 의미였다.하지만 그 이면에는 민초들의 큰 희생이 뒤따랐다. (다음 편에...)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한지 ② - 민초들의 고혈

한지 ② - 민초들의 고혈   매년 고급 한지 10만 장을 바쳐야 했던 고려 시대나, 수만 장씩 중국 황실로 보내야 했던 조선 시대나, 한지를 만드는 건 국가적 사업이었다. 최고급 한지 1장당, 어른 키만한 닥나무 가지 5개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따라서 국내외에서 필요한 한지를 만들기 위해, 온 나라의 산과 들에 닥나무 심기를 법으로 강제해야만 했다. (사진: 닥나무)   세종은(여기서도 또 세종대왕이 등장한다) 한지 대량 생산을 위해 전국 모든 고을에, "비어 있는 땅이나 산기슭에 무조건 닥나무를 심으라"고 명령했다. 일명 '닥나무령' (채삼법)이다. 심지어 각 고을 수령(사또)들을 평가할 때 '닥나무를 얼마나 많이 심었는가'를 중요한 채점 기준으로 삼았을 정도다. 당연히 일반 백성들에게도 가구당 수십 그루씩 닥나무를 강제로 심고 가꾸게 했다.   조선 시대에는 각 고을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는 공납(貢納) 제도가 있었다.특히 닥나무가 잘 자라고 물이 맑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의 산간 고을들이 집중 타겟이 되었다. 겨울철 농한기가 되면 관내의 일반 농민들까지 관청의 종이 제작소로 강제 동원되어, 닥나무를 베어 껍질을 벗기고 종이를 뜨게 했다. 부역(노동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부렸기 때문에, 당연히 임금은 커녕 밥 한 끼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날씨는 추운데 얼음물을 만지며 종이를 떠야 하니, 손발이 트고 동상에 걸리는 백성들이 속출했다.조선 시대 종이 공납의 가장 큰 피해자엔 절의 승려들도 있었다. 국가는 절에 엄청난 양의 종이를 공물로 할당했다. 절은 깊은 산속에 있어 닥나무를 구하기 쉬웠고, 흐르는 계곡물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겨울 내내 염불은커녕, 얼음물에서 죽어라 종이만 만들어야 했다. 도저히 그 수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승려들이 밤중에 절을 버리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문을 닫고 사라진 절이 수두룩했다고 할 정도다.   문제는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그냥 넘어갈 관리들이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 조선 최악의 정경유착이자 수탈 시스템인 ‘방납(防納)의 폐단’이 등장한다.방납(防納)에서 ‘방(防)’은 막을 방 자인데, 말 그대로 백성이 직접 가져온 공물을 관청에서 ‘막아서 못 내게 한다’는 뜻이다. 즉 질이 떨어진다는 등 이런저런 핑계와 트집을 잡아, 애써 만들어 가져온 공물을 되돌려 보냈다. 대신 관아 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방납 상인들에게 종이를 10~100배나 주고 사서, 공물로 바치게 유도했다. 관아와 상인이 공모하면서, 공물을 바치는 백성만 죽어난 것이다. 이렇게 퇴짜맞은 공물(종이)를 상인이 헐값에 사서 쓸만한 것을 골라, 또 다른 퇴짜 맞은 백성에게 팔았다.즉 관료와 특권 상인이 결탁해 카르텔을 만들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조직 범죄였던 것이다. 너무나 가혹하고 힘들다보니, 일부 백성들은 닥나무를 불태우고 도망치기도 했다.   이런 지옥같은 상황을 백성들을 구해 준 게 대동법이다.당시 조선 백성들을 파산으로 몰고 갔던 3대 지옥 공물이 바로 '인삼, 종이(한지), 생선'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공물 대신, 가진 땅의 크기에 비례해서 쌀로만 세금을 내게 한 법" 즉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되었다. 1608년(광해군) 경기도에서 처음 시범 도입되어 1708년 숙종 때 완성된,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금 개혁이었다.   세계 최고이자 모두가 탐냈던 한지는 이렇게 수많은 민초들의 고혈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적어도 대동법이 시행되며, 전문 장인들이 제값 받고 만들기 전까지는.   <묻는다칼럼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칭기스칸의 운

칭기스칸의 운   필자가 어렸을 땐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좀 커서는 ‘운7, 기3’으로 바뀌었다. 이제 인생을 사실상 거의 다 살고 나니, 인생은 ‘운9, 기1‘ 또는 ’운7, 복3‘이란 결론을 내렸다. 노력과 성실도 타고난 운이나 복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세계사를 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을 꼽으라면 1위가 칭기스칸이다. 거꾸로 칭기스칸은 세계 최고로 운이 좋았던 인물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칭기스칸은 어릴 때 아버지(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해 노예로 살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극적‘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졌고, 이후에도 몇 번이나 암살이나 기습 위기를 ’극적‘으로 모면했다. 그랬던 그가 몽골을 통일한 것 자체가, ’극적‘이고 운빨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말 ’극적‘으로 우수한 장수들을 품게 된다. (칭기스칸의 탁월한 리더십도 한몫했지만, 그것만으론 설명이 되지 않는다)   몽골을 통일한 칭기스칸은 리더로서 뭔가 보여줘야 했다. 일본이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하자 강력해진 군대로 조선을 침범했듯, 통일 몽골 역시 그동안 단련된 군사력으로 성과를 보이며 리더십을 강화하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첫 대상이 평소에 몽골을 괴롭히던 티베트계의 '서하'였다. 몽골이 자신들도 모르게 급발진한 전투력으로 서하를 공격하자, 이에 놀란 서하는 스스로 속국이 되겠다며 공주와 많은 물자를 바쳤다. 몽골인들은 예상 밖의 첫 성공에서 전리품과 영웅 등장에 열광했고, 칭기스칸의 아래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자 칭기스칸은 자신의 자리와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전쟁과 전리품이 또 필요해 졌다.   이번엔 그동안 몽골을 괴롭혀 왔던 금나라로 복수의 칼을 뻗었다. 칭기스칸은 초기엔 금나라의 북쪽을 공략하여, 요동과 화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전리품과 인구를 얻었다. 하지만 금나라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여서, 더이상 진전이 어려웠다.   한편 당시 칭기스칸은 중앙아시아 강국인 호라즘에 사신을 보내 교역을 청했다. 이때만 해도 칭기스칸은 호라즘과의 교역을 통해 국가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까지가 그의 목표였던 것 같다. (세계 정복은 아예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병력의 수만 믿고 자만했던 호라즘은, 그만 몽골 사신 수 백 명을 죽여버리는 대실수를 해버렸다. 마침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더이상 진척이 없어 곤란해진 칭기스칸은, 실추한 자신의 명예를 만회하기 위해 호라즘으로 병력을 돌렸다. (울고 싶을 때 따귀를 때려준 격인데, 이것도 운이다) 몽골군의 전투력이 최고로 빛을 발하며,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세계 정복의 발단이 된, 바로 그 전쟁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몰려오는 몽골군의 침략에, 성들은 순식간에 무너지거나 스스로 문을 열었다. 그동안 쓸데없이 객기를 부렸던 호라즘의 술탄(황제) 무하마드는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계속 서쪽으로 도망쳤다. 칭기스칸은 제베와 수부타이 장군에게 그를 끝까지 추격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두 장군은 2만의 기병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도망치는 술탄을 끝까지 뒤쫓았다. (결국 술탄 무하마드는 카스피해의 작은 섬에서 병사했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러시아 남부와 흑해 북쪽의 킵차크 초원까지 휩쓸고 돌아왔다. (유럽 원정은 그 다음의 일이다)   한편 몽골은 금나라와 호라즘을 치러 갈 때 서하에게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구했으나, 서하는 이를 거절했고 오히려 몽골의 뒤통수를 치려 했다. 뚜껑이 열린 칭기스칸은 호라즘을 박살 낸 직후, 내친김에 서하로 향했다. 이미 내부에서 편이 갈리며 스스로 무너져 있던 서하는 게임이 되지 못했다. 칭기스칸은 서하를 손쉽게 유린하며, 본의 아니게 마지막 원정(1226~1227년)을 마쳤다. (사망) 이렇게 어찌어찌 하다보니, 또 많은 영토와 전리품과 인구를 차지하게 되었다.   칭기스칸이 직간접으로 차지했던 영토와 휩쓸고 돌아왔던 영향권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위 그림과 같다. 세계 최대의 영토를 가졌던 몽골제국(아래 그림)과 비교하면 훨씬 작다. 나머지 영토는 칭기스칸 사후 그의 후손들(오고타이, 바투, 쿠빌라이 등)이 동유럽, 바그다드, 금과 남송까지 정벌한 결과다. 사실 칭기스칸 사후의 정벌 대상이 훨씬 강국들이었고, 더 힘든 전쟁이었다.   하지만 칭기스칸의 후손들은 칭기스칸이 닦아 놓은 자산을 기반으로, 나머지 강국들을 정벌했고, 후손들 역시 칭기스칸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칭기스칸을 내세웠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세계 정복자‘라고 생각하는 칭기스칸의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도 다 칭기스칸의 운(명예운+자식운)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프로만큼 인기있던 고교야구

프로만큼 인기있던 고교야구   제54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진행 중이다. (사진) 예선이 없이 모든 팀이 참가하는 대회라, 무려 104개팀이나 참가했다.필자가 어렸을 땐 고교야구가 정말 인기였다. 생각해보면 각 지역을 응원하는 마음들이 모여 인기를 끌게 된 것 아닌가 싶다. 지금의 프로야구가 담당하던 것을, 당시엔 고교야구가 대신했다는 생각이다.   예전엔 신문사의 역할이 컸다.당시 신문은 지성의 표현이었고, 사회 리더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신춘문예를 비롯해 음악 콩쿠르 등 많은 문화행사를 개최했다. 그 일환으로 고교야구 발전을 위해, 유력 신문사들이 고교야구대회를 주최했다.   중앙일보의 대통령배, 조선일보의 청룡기, 동아일보의 황금사자기, 한국일보의 봉황대기 등이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였다. 특히 과거 봉황대기에는 재일교포팀이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한편 고교야구가 인기를 끌면서, 유력 지방신문사도 이에 동참했다. 매일신문이 대구에서 개최한 대붕기, 부산일보가 부산에서 주최한 화랑대기 등이 대표적이었다. (두 대회 모두 2011년 폐지됨)   고교야구가 인기가 워낙 높다 보니, TV와 라디오로도 생중계했다. 특히 야구장에서 라디오를 동시에 들으면서 경기를 관람하면 더 재미있었다. 필자도 국민학생 시절, 동대문 운동장에 옆에 앉은 아저씨가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듣는 중계를, 몸의 반쯤 기울이고 귀를 쫑긋 세우며 훔쳐 듣곤 했다. 대붕기와 화랑대기는 TV 중계가 없어, 가끔 라디오 중계로 들을 수 있었다.밤에도 경기를 했는데, 경기장 조명이 전기 낭비라며 밤(저녁) 경기를 금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낮에 경기를 중계하면, 그걸 보려는 TV 전기 소비가 더 크다는 비판도 있었다)   고교야구 인기가 치솟다보니, 고교선수 일부는 지금 아이돌 이상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여학생들은 비명을 질렀고, 팬레터가 쏟아졌다. 하지만 아무리 인기가 있던 선수여도, 인기는 고교야구에서 끝났다. 인기 고교야구 선수들이 대학을 가고 실업팀을 가도, 과거의 인기는 고교에서 너무 짧게 끝나 있었다. 게다가 투수의 경우 고교시절 혹사를 당해, 안타깝게도 선수 생명이 그걸로 끝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요즘 고교야구 중계는 가끔 보려 해도, 차마 보질 못 하겠다.너무 앳된 얼굴과 체격에, 프로와 MLB로 높아진 눈으로 보니, 과거에 저런 걸 왜 좋아했나 싶을 정도다.   ‘그때였으니까’ 하며, 채널을 돌리게 된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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