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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약과 모기향

모기약과 모기향   어제 우연히 실로 오랜만에 모기향 피우는 걸 보게 되었다. 순간 어릴 적 모기약(퇴치제) 생각이 떠올랐다. (또 ‘라떼’ 얘기임)   필자가 어렸을 때 (60년대 말 정도로 기억됨) 모기약의 대명사 ‘에프킬라’가 등장했다. 살충제의 가정화가 이뤄진 순간이었다.   당시 에프킬라는 두 종류였다. 입으로 부는 것과 지금도 많이 사용하는 에어로졸 형태다. 그런데 에어로졸은 가격이 비싸서 부잣집이나 사용했다. 일반 가정에선 입으로 부는 에프킬라를 사용했다. 입으로 부는 제품은 유리병에 빨대가 꽂혀 있고, 깔대기 같이 생긴 부분을 입으로 불어서 기압의 차를 이용해 용액을 분사하는 방식이다. 살살 불어선 분사가 안된다. 그래서 대개 남자 어른(주로 아버지)이 불었다. 그런데 구모기가 있을만 한 구석구석에 계속 힘껏 불다 보니, 방 두 개쯤 불고 나면 숨을 하도 들이마셔 어지러워 드러눕기도 했다. (그 참에 자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분사된 모기약이 부는 과정에서 입이나 코로 마구 흡입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엔 모기약이 모기한테만 해롭다는 생각에서인지, 이것을 문제 삼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더니 모기향이 등장했다.꼬불꼬불 동그랗게 생긴 게 참 특이했다. 모기향을 담은 그릇은 재털이 겸용으로 사용하기에 딱 좋았다.항상 자기 전에 모기향을 켜놓고, 얼마 뒤에 꺼지도록 양철 꼭지를 잘 꽂아 줘야 했다. 만약 제대로 되지 않으면 밤새 모기향 전체가 홀랑 타버렸다. 그런 날엔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가 띵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모기향 전체가 연소되면서 얼마나 많은 미세 먼지와 해로운 합성물질이 생겨났고, 그걸 밤새 마셨을까? 하지만 열 번 이상 쓸 모기향을 한 번에 다 태운 걸 더 아까워했다.   이렇게 모기약이 인기를 끈 이유는 필자 생각으론 당시엔 대부분 집이 한옥 구조로 개방형인데다 방충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전에 모기약을 뿌리거나 모기향을 피우고, 잘 때엔 창문이랑 방문을 꼭꼭 닫고 잤다. 더위보다 모기가 더 무서워서다. 물론 젊은 남성들은 창문이나 방문을 열고 자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들의 해로움을 인식하고 방충망이 있는 아파트형 가옥으로 바뀌면서 모기약과 모기향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최근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1,700명이 넘게 사망했다고 하는데, 에프킬라 모기약이나 모기향 피해자는 한 명도 없었다. 진짜 없어서 없는 건지, 잘 몰라서 넘어간 건지 알 수 없다.   지금은 집안에선 주로 훈증기나 매트형의 모기 퇴치제를 사용한다. 하지만 필자는 “모기에게 해를 끼치는 성분이 사람에게는 나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모기 퇴치제 보다 차라리 모기에게 한번 물리고 마는 걸 선택하며살고 있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그리운 영화음악

그리운 영화음악 필자가 영화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김세원의 영화음악실’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였다. 1978년에서 1986년까지 KBS 라디오에서 (필자 기억으론) 밤 10시부터 한 시간 동안 방송했다. 필자가 중 고등학교 시절에 거의 매일 듣던 방송이었다. 성우 김세원은 특유의 차분하고 지적인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김세원입니다”라는 인삿말로 시작해, 외국의 영화와 영화음악을 소개했다. 특히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입니다”라는 목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필자가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란 말을 알게 된 것도 그 방송에서였다.   김세원은 라디오 광고에서도 초특급대우를 받았다. 일반 성우가 30만원 정도 받을 때, ‘김세원입니다’라고 시작하는 광고를 녹음하면 100만원을 받을 정도였다. 그것도 아무 광고나 하지 않고, 본인의 이미지에 맞는 광고만을 선택했다. 그 후에도 ‘짝’ 등의 프로그램 나레이션으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어쨌든 당시 ‘영화음악실’에선 주옥같은 영화음악을 소개했다.닥터 지바고의 ‘라라의 테마’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 왈츠’ 사랑은 비를 타고의 ‘Singin' in the Rain’ 같은 음악이 단골로 소개되었다.필자 개인적으로 최고의 영화음악을 꼽으라면 클린트우드 주연의 ‘황야의 무법자’(1966년) 주제곡이다. 악기나 목소리가 아닌 휘파람으로 구성되는데 중간엔 말발굽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도 있다. 음악만 들어도 마치 황야에서 모래 바람을 뚫으며 말 타고 온 무법자들이,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쓴 채 담배를 꼬나물면서 상대방을 노려보는 모습이 떠오른다. 속편격인 ‘석양의 무법자’ 역시 휘파람 주제곡이 전편 못지 않다.그 다음으론 ‘스타 워즈’(1977) OST를 꼽고 싶다. 웅장한 스케일이 마치 우주를 보는 듯 하다.   필자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영화음악 중 첫 히트 영화음악은 ‘빨간마후라’(1964년, 신상옥 감독 신영균 주연)가 아닌가 싶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마후라:머플러)”라는 가사의 이 노래는 이후 공군 조종사를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그 다음엔 ‘미워도 다시 한번’(1968년, 정소영 감독, 신영균 문희 주연)이 아닌가 싶다. “이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했고, 순정을 다 바쳐서 믿고 또 믿었건만...” 이미자와 남진이 부른, 정말 처절할 정도로 애절한 노래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최루탄 영화였다.우리나라 영화음악이라면 뭐니뭐니해도 ‘별들의 고향’(1974년, 이장호 감독 신성일 안인숙 주연“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오래간만에 같이 누워 보는군. 아~ 행복해요’라는 대사로 시작해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라는 앳된 목소리의 노래가 나온다. 윤시내가 부른 이 노래는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방송에선 접하기 힘들었지만,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선 대히트였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엔 그만큼 인기를 끈 영화음악이 벌로 없는 것 같다.우리나라도 드라마 OST가 인기를 끈 경우는 많지만, 그만한 영화음악이 있나 싶다.   음악만 들어도 그 영화와 장면들이 생각나는 영화음악이 그립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마르고 닳도록 하던 국민의례

마르고 닳도록 하던 국민의례   요즘도 프로야구를 시작할 땐 국민의례를 한다. 한국시리즈나 올스타전 같은 특별한 경기도 아니고, 모든 경기에서까지 국민의례를 하는 게 맞나 싶긴 하다.(논의는 별도로 하고 ‘라떼’ 얘기로 넘어간다)   필자가 어렸을 때엔 어디서나 국민의례는 당연한 것이었다.매주 운동장에서 하던 아침 조회 시작은 국민의례였다. 그것도 애국가 4절까지 불렀다. 중간엔 ‘국기에 대한 맹세’도 나왔다.반에서 학급회의를 할 때에도 국민의례부터 시작했다.   필자가 중학교 입학해서 처음 등교하는데 선배들이 정문에서 거수 경례를 하고 들어갔다. 필자도 어설프게 흉내를 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알고 보니 학교 본관에 있는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한 것이다.   영화를 한 편 보려고 해도 국민의례를 해야 했다.영화가 시작하기 전 애국가가 나오면, 관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예를 표해야 했다. 그 전엔 ‘대한뉴스’라는, ‘뉴스’도 아닌 대통령 주연의 정부 홍보영화을 봐야 했다. 영화 한 편 보려고 참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압권은 ‘국기 하강식’이었다. 오후 5시경이었나? 길을 가다 보면 어디선가의 스피커에서 ‘지금부터 국기 하강식을 거행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또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그러면 길을 가던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제자리에 서서 예를 표해야 했다. 일종의 ‘국민의례’였다. 이 모습을 본 한 외국인이 감동을 받았다는 보도도 나왔다. 하지만 대다수의 외국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는지, 반대로 공포심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 남북한이 똑같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하루종일 애국가를 ‘마르고 닳도록’ 부르거나 접해야 했다.냉전과 독재 시대에서 나온 극단적 국가주의였다.하지만 당시엔 그게 애국이고 나라사랑이라고 생각했었다.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 사랑할 줄 모르는 ‘나쁜 놈’ 또는 ‘버릇없는 놈’ 취급을 했다.   문득 생각해보니 애국가를 부르거나 들어본 적이 꽤 오래된 것 같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신기하고 웃겼던 ’유쾌한 청백전‘

신기하고 웃겼던 ’유쾌한 청백전‘   요즘 나라 안팎이나 주변을 둘러봐도 유쾌한 일이 없다. 게다가 엄청난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 요즘은 TV프로그램을 봐도 웃음을 짓는 경우가 별로 없다. ’프로그램은 정말 많은데 왜 필자는 유쾌하지 않을까?‘ (사실은 필자가 늙어서 그럴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다가 문득 70년대 ’유쾌한 청백전‘이 생각났다.   무명의 초짜(?) 아나운서 변웅전을 스타로 만들어준 바로 그 프로그램이다. (변웅전은 그후 승승장구하다가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당시 아나운서로서는 훤칠하게 잘생긴 변웅전 아나운서는 특유의 “허허허...”하는 웃음소리로 효과음향을 대신하며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이끌었다.   필자의 기억으론 ’유쾌한 청백전‘은 TV 연예프로그램으로선 최초의 정규 프로그램이었다. (이전에 KBS배 정탈 전국노래자랑이 있었다. 지금의 전국노래자랑과 달리 가수를 뽑는 전문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신생 TV였던 MBC가 당시 정동 방송국(현재 경향신문 빌딩) 지하에 공개 스튜디오를 짓고, 야심차게 새롭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선보이던 시기였다.   ’유쾌한 청백전‘에는 당대 최고의 가수 남진을 비롯해 유명한 연예인들은 모두 거쳐 갔다. 매년 당선된 새로운 미스코리아들이 출연했고, 뽀빠이 이상용 같은 신인들이 유명해진 것도 여기서였다. 때론 드라마 수사반장 출연진과 진짜 모델인 수사관들이 함께 출연하기도 했고, 귀순용사 특집도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인기 있었던 건 원맨쇼였다. 당시 원맨쇼 하면 3인방이 있었다. 신선삼과 남보원 그리고 백남봉이다. 이들이 각자 따로 출연할 때도 있었지만, 가끔 세 사람이 동시에 출연해 합동 공연을 하면 정말 웃기고 신기했다. 기차 소리는 기본이고, 하다못해 지하철 공사하는 소리까지 냈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각자 소리를 내니, 신기하고 재미있음에 박수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쓰리보이‘ 신선삼은 코로 피리(지금의 리코더)를 불어 웃음을 사기도 했다. (필자의 어머니는 ’아유 더러워‘ 하면서도 웃으셨다)   다음으로 웃긴 건 코미디언들이었다. 남철 남성남 박시명 등이 단골 출연자였다.당시 코디미언들은 망가지는 것으로 웃겼다. 이런저런 게임을 하면서 몸으로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필자의 기억으론 ’탄말 찬말‘이란 게임이 있었는데, 같은 편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을 팔에 끼면 목이 끼워진 사람은 상체를 굽혀 말이 된다. 그러면 상대방이 그 말에 올라타는 게임이다. ’찬말‘ 하면 말이 뒷발로 찰 수 있고, ’탄말‘ 할 때 말에게 올라탈 수 있는 게임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억지스럽고 유치하지만, 웃을 거리가 없던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했다.   그외에 뻐꾹이 소리를 기가막히게 냈던 김뻐꾹 등 신기하고 재미있는 출연자들이 많았다.승리팀에게는 선물을 줬는데, 진로소주 6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보면 유치할 수 있지만, 당시엔 정말 유쾌한 프로그램이었다.’유쾌한 청백전‘이 오랜 시간동안 인기를 끌자 ’명랑운동회‘로 이를 확대해 개편했으나, 예전만큼 인기를 끌진 못했다.   어쨌든 지금도 여기저기서 ’유쾌한 청백전‘이란 말을 인용하는 걸 보면, 그 잔상이 남아 있나 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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