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header banner1 header banner2
  • 커뮤니티 문답방 · 전문가문답방
    사이트 내 전체검색
더보기 >
전문가 문답방

유전 대(對) 환경 ② - 연산군

유전 대(對) 환경 ② - 연산군   역대 최악의 폭군이라고 하는 연산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일단 생김새부터 일반적 예상과 다르다.조선 후기 문신 이덕형의 ‘죽창한화’에는 어린 시절 연산군을 직접 본 노인의 회상이 실려 있는데, "얼굴빛은 백옥처럼 희고 수염이 적었으며,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눈가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라고 나온다. ‘연산군일기’에는 한양에 올라온 시위군(호위병)이 연산군을 보고 "임금이 허리와 몸이 가늘어서 위엄이 없다"고 사석에서 뒷말을 했다가, 의금부에 잡혀간 기록이 있다고 한다. 즉 덩치가 크고 듬직한 체구를 선호했던 당시 조선 기준에서는 연산군이 너무 마르고 하얗다는 이유로 위엄이 적다고 여겼고, 붉은 눈가와 미끈한 체형 그리고 뽀얀 피부가 요즘 아이돌급 외모였음이 여러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즉 키는 아버지 성종을 닮아 컸는데, 얼굴이나 체격은 어머니 윤씨를 닮아 희고 가늘었다는 얘기다. 폭군이라 해서 무지막지한 외모를 생각했지만, 실제론 여성스러운 외모의 완벽한 사이코패스 스타일이었다.   19세에 즉위한 연산군은 초기엔 유교적 성군의 모습을 갖추려 애썼다고 전한다. ‘연려실기술’에는 "즉위 초에는 모두 영명(英明)한 임금이라 칭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아침마다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는 조회에 성실히 참석했고, 유학을 공부하는 경연에도 착실히 임했으며, 세종·성종 대의 유산인 각종 서적 편찬 사업을 이어받아 마무리했다.또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그의 시문(詩文)을 보면, 시적 감수성과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고도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 성종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이 슬슬 나오기 시작한다.우선 ‘호색한(好色漢)’ 성종의 피를 물려받아, 즉위 초기부터 후궁을 두거나 궁궐 안에서 연회를 열고 기생을 불러 즐겼다. 여기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성종이 밤마다 술 마시고 여자를 밝히던 모습을 봐온 ‘가정교육’도 한몫했을 것이다.게다가 늘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던 ‘애정 결핍’의 연산군이었다. 노비 출신에 여러 번 시집을 가고 자식까지 둔 기생 장녹수에 눈이 멀어 버린다. 장녹수는 연산군보다 10살 정도 연상이었는데, 연산군의 결핍을 아이처럼 달래주기도 하고 때로는 응석을 받아주며 독점적인 총애를 얻었다. 이에 더해 연산군은 내시 몇 명만 데리고 비구니들의 거처인 정업원에 몰래 들어가 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한편 연산군은 왕권을 견제하려는 언관(사간원·사헌부·홍문관 3사) 및 사림파와의 갈등이 지속적으로 누적되었다. 연산군은 남의 간섭을 받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이는 어머니 윤 씨의 ‘참지 못 하는’ 성품을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다. 결국 쌓이고 쌓이던 불만은 무오사화(1498년)라는 불리는 대대적으로 숙청사건을 일으킨다.   나아가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전말을 알고 난 이후엔 완전히 정신줄을 놓으며 미치광이가 된다. 갑자사화(1504년)라는 무자비한 복수극을 벌이는가 하면, 채홍사를 만들어 흥청망청 놀다가 결국 중종반정(1506년)으로 폐위되고 만다.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서도 못돼먹은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다가, 불과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고작 31년 동안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요약하면 연산군은 외모에 있어, 키는 아버지를 닮고 체형과 얼굴은 어머니를 닯았다. 여색을 밝힌 건 아버지 성종의 유전과 가정환경 모두의 영향을 받았으며, 참지 못하는 기질은 어머니 윤 씨로부터의 유전이었다. 장녹수에게 빠진 건, 어머니가 없었던 환경 탓이라고 본다.전체적으로 볼 때 연산군은 유전적 기질이 약간 더 많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 광해군의 경우엔 환경적 요인이 더 커 보인다.광해군은 후궁의 아들로 태어나, 임진왜란 발발 후 갑자기 세자에 책봉된 후 목숨을 걸고 전국을 돌며 분조를 이끌었다. 이후 선조로부터의 엄청난 핍박을 견딘 후 보위에 오르지만, ‘적자’ 영창대군과의 갈등으로 압박을 받는다. 영창대군을 죽인 후에는 역모와 암살의 위협속에서 살았다. 이렇게 평생 다져진 마음(?)때문에, 폐위 후에도 18년이나 더 살았다.(향년 만 66세로 장수했다) 그동안 아들 부부와 아내가 먼저 사망하고, 온갖 멸시를 받으며, 병자호란을 지켜봤다. 적장자로 태어나 온실에서만 자랐던 연산군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유전 대(對) 환경 ① - 연산군의 부모

유전 대(對) 환경 ① - 연산군의 부모   사람에게 유전이 중요한지, 아니면 환경이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은 끝이 없다. 다만 유전과 환경 모두 사람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유전과 환경의 영향에 대해 얘기하게 된 계기는, 다름아닌 폭군 ‘연산군’에서 비롯됐다. (이하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필자의 사견을 혼합한 것이니, 토 달지 마시길...)   예종이 즉위 1년 2개월 만에 불과 20세 젊은 나이로 요절한 후, 조카인 성종이 13세(1469년)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성종의 나이가 너무 어려, 할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성종에겐 이미 첫 부인인 공혜왕후가 있었는데, 한명회의 딸이었다. (성종은 원래 3순위였으나, 권력자였던 장인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합작으로 보위에 올렸다는 설이 있다) 공혜왕후는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었음에도 아버지 한명회와 달리(?), 시어머니와 할머니 등 왕실 어른들을 극진히 모셨다. 후궁들에게도 질투를 하지 않고 옷감을 나눠주는 등, 인자한 성품으로 궁중의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성종이 즉위 후 수년이 지나도 공혜왕후에게서 아이가 생기지 않자, 왕실의 후사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1473년(성종 4년, 17세) 후궁들을 간택해 입궁시켰다. 이때 후궁(숙의)으로 들어온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훗날 연산군의 어머니가 되는 (폐비) 윤씨였다.   우선 성종의 외모에 대해 실록에서는 '미풍의(美風儀) 준정(峻整)'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용모가 아름답고 풍채가 훤칠하며 당당하다"는 뜻이다. 성종은 관대하고 온화한 성품에 어울리는 훤칠한 호남형 외모로, 조선 양반 사회에서 생각하는 '덕을 갖춘 군주의 용모'에 딱 맞았다.실록에 따르면, (폐비) 윤씨는 성종에게 "전하의 용모가 아름다우시니, 훗날 나이 들어 늙으시면 반드시 여색을 탐하고 후궁을 바치려는 자들이 몰려들 것입니다"라고 직접 말할 정도였다.   한편 성종은 밤과 낮이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낮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경연에 참석하며 유교적 삶을 살았다. 하지만 밤만 되면 술과 여색으로 밤을 지샜다. 18세가 되던 해 할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성종은 왕으로서 권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벌써부터 후궁을 적극적으로 늘려갔다.   오죽하면 실록에는 성종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후궁의 처소에만 머무르는 것을 두고, 신하들이 "전하께서 여색을 너무 가까이하여 건강을 해치실까 두렵다"라며 간언하는 기록이 수차례 등장한다고 한다. 성종은 결국 12명의 부인(왕비 및 후궁)에게서 28명의 자녀(16남 12녀)를 두었을 만큼, 역대 조선 국왕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여색을 많이 밝힌 임금이었다. 성종은 재위 25년간 ‘유교적 모범 군주(도학군주)’를 지향하여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경연(학문 토론)과 학문과 정사에 매달렸지만, ‘왕실의 후사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술과 여색을 매우 즐겼다. 이는 과도한 정사 스트레스와 더불어 몸의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만성 피로와 종기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어, 결국 만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럼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외모는 어땠을까?성종실록에는 윤 씨의 외모에 대해 "용모가 아름다워(미색, 美色) 왕의 은총을 독점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또한 성종이 반대를 무릅쓰고 후궁이었던 윤 씨를 두 번째 왕비(계비)로 맞아들인 것을 볼 때, 상당한 미모와 매력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주변의 의견에 따라 정식으로 다른 계비를 맞이했으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윤씨는 중전이 됐으면, 임금이 만날 다른 후궁들과 주색잡기를 해도 모르는 척 했어야 했다. 기록에 따르면 폐비 윤씨는 다른 후궁들을 극도로 질투하고 감정의 기복이 매우 컸는데, 성종과 다투다 그만 용안(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이로써 윤 씨는 졸지에 폐비된다. 이렇게 윤 씨의 아들 연산군이 불과 생후 4개월 만에 어머니와 격리되고, 4세 때 어머니가 사약을 받고 죽는 비극을 맞으며 역사의 풍랑을 예고했다.(생후 4개월이라면, ‘윤 씨는 산후 우울증을 겪고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참 아까운 일이다.)   <다음에 계속>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당구장은 ➀ - 예전엔

당구장은 ➀ - 예전엔   필자가 고등학교 졸업할 당시, 당구는 성인의 상징과 같았다. 미성년자(고등학생까지) 출입금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성인이 되는 관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거의 모든 졸업생들은 담배와 술과 함께 당구를 시작했다. (이전부터 했어도, 공개적으로 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임)   당구장도 정말 많았다. 대로변이면 어디서나 2층의 당구장을 찾을 수 있었다. (지하엔 습기가 차서 공이 잘 굴러가지 않는다며 피했다) 누구나 워낙 흔하게 보다 보니, ※를 아예 당구장 표시라 칭하기도 했다.   당구장엔 늘 젊은 남성들로 늘 붐볐고, 담배 연기가 가득 자욱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당구에 미치는 경우도 많았다.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당구공이 왔다갔다 하며, 삼각함수를 공부한다는 농담을 했다. 하지만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재수생들까지 당구에 빠져, 재수를 망치는 경우도 흔했다.   당시에도 일본식 용어가 많았다. 마세이 오시 히까끼 무시 가라꾸 등 발음이 맞는지도 모르고 엉터리라도, 그런 단어를 말하면 마치 뭐라도 된 듯 여겼다. 지금은 쓰리 쿠션을 많이 하지만, 예전엔 주로 사구를 쳤는데 마지막은 쓰리 쿠션 또는 뱅크샷(가라꾸)으로 마무리해야 게임을 이길 수 있었다.   당구장 한쪽에는 꼭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한 테이블 정도 있었다.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화투패까지 들었다 놨다하는데, 눈빛이 다른 손님과는 확연히 달랐다. 돈이 걸리면 그렇게 되나 보다.   당구장에서 주문해 먹는 짜장면은 참 맛있었다. 여의도 같은 오피스 타운의 당구장에서는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당구장에서 짜장면으로 점심을 해결하며 겸사겸사 당구하는 모습도 많았다.   당시엔 당구 전용 장갑이 없어서, 작업용 목장갑을 끼거나 석회가루를 묻혔야 했다. 석회가루도 처음엔 석회가루가 들어 있는 주머니가 많았는데, 어느 순간 석회 덩어리가 등장해 그걸 만지면 석회가루가 손에 묻어나며 가루 날림을 줄여줬다. 당구를 하고 나면 당연히 석회 가루가 옷에도 묻었다. 초크 가루까지 합쳐져, 본의 아니게 당구를 쳤다는 표시를 냈다.   필자가 처음 당구장을 갔을 때만 해도 당구공이 두 가지였다. 국산공(코스모스공/막공)과 고급 벨기공이다. 게임 가격도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벨기공이란 건 ’벨기에공‘ 즉 벨기에에서 제작되어 수입한 공이란 뜻이었다. 제미나이에게 물어보니, 벨기에의 당구공 제조 전문 기업인 아라미스(Aramith / Saluc 사)에서 제작한 고품질 당구공을 의미한단다. (지금도 전세계 대표 당구공이라고 한다) 이후 빠른 속도로 모든 당구공이 벨기공으로 바뀌며, 굳이 구분을 하지 않아도 벨기공이 당연한 것이 됐다.   <다음에 계속>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세계 최고속 이사

세계 최고속 이사   요즘 우리나라에서 이사할 때 대부분 사다리차를 이용한다. 게다가 포장이사를 하면 전문가들이 척척 일을 해주니, 정말 편하고 빠르다. 아침에 시작하면 오후에 끝나고, 저녁에 청소하면 끝이다. (자리 잡는 시간은 빼고) 사다리차를 사용하는 세계 유일한 나라이고, 이사 역시 세계 최고 속도다. ‘빨리빨리의 민족’ 답다.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이사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자기 나라에선 대부분 이삿짐을 직접 나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도 많다. 그래서 외국인들의 이사는 한국처럼 하루에 끝나는 게 아니라, 짐을 싸고 나르고 올리고 풀고 ... 기본이 며칠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침에 짐을 빼면, 오후에 다른 집의 짐이 들어오는 순환 구조다.(그 틈에 재빨리 도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쪽 집에서 돈을 받아서 나가고, 저쪽 집에 돈을 줘야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빨리빨리 이사’는 우리나라 특유의 주택 거래 구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역시 이사를 직접 했다. (트럭 운전기사가 일부 날라줬지만)그래서 “이사한다” 하면, 친지들을 불러 다 같이 짐을 이고 지고 날랐다. 당시엔 장독(항아리)이 많았는데, 가끔 깨져서 난리가 나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도와주러 왔다가 사고가 난 것이므로,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이삿짐을 도와주면 특별히 탕수육까지 사줬다. 그래도 이사를 도와주는 건 서로에게 ‘민폐’이자 ‘신세 지는 일’이었다.   1990년대부터 ‘남들에게 신세 지는 걸 꺼려 하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일꾼을 동원하기 시작했다.저층 아파트나 빌라 같은 주택에선 장롱을 계단으로 올리지 못해 로프에 묶어 창문을 통해 들어 올렸는데, 일꾼들은 이를 ‘로프 작업’이라며 웃돈을 받았다. 고층 아파트엔 곤돌라가 있었다. 곤돌라에 이삿짐을 실어 올렸는데, 창문에 닿지 않도록 외부에서 양쪽으로 한 사람씩 잡아줘야 했다. 하지만 위에서 들어 올리는 곤돌라는 흔들리고, 바람의 영향도 커서 위험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부터 건설 현장에서 자재 운반용으로 쓰이던 사다리차 장비를 이삿짐 현장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누가 맨 처음 했는지 몰라도, 참 아이디어가 좋다) 또한 ‘통인익스프레스’로 시작된 포장이사 문화가 확산되면서, 사다리차는 탑차와 함께 대한민국 이사의 독특한 필수장비로 자리 잡았다. (요즘 고가 주택에는 이사 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다) 외국인들은 사다리차를 보고 처음엔 소방차(굴절사다리차)로 착각해, 불이 자주 난 줄 알았다고 한다.   아무리 이사가 편해졌다 해도, 이사는 참 힘든 일이다. 이사하기 전에 짐 정리도 해야 하고, 가스 차단과 통신 또는 관리비 등 이사 전후에 해야 할 것도 많다. 이사가 편해진 만큼, 이사 비용도 크게 올랐다.   필자는 이사 자체가 싫어, 가급적 한 집에 오래 살려 한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자유문답방
커뮤니티 문답방
  • 게시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