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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② - 민초들의 고혈

한지 ② - 민초들의 고혈   매년 고급 한지 10만 장을 바쳐야 했던 고려 시대나, 수만 장씩 중국 황실로 보내야 했던 조선 시대나, 한지를 만드는 건 국가적 사업이었다. 최고급 한지 1장당, 어른 키만한 닥나무 가지 5개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따라서 국내외에서 필요한 한지를 만들기 위해, 온 나라의 산과 들에 닥나무 심기를 법으로 강제해야만 했다. (사진: 닥나무)   세종은(여기서도 또 세종대왕이 등장한다) 한지 대량 생산을 위해 전국 모든 고을에, "비어 있는 땅이나 산기슭에 무조건 닥나무를 심으라"고 명령했다. 일명 '닥나무령' (채삼법)이다. 심지어 각 고을 수령(사또)들을 평가할 때 '닥나무를 얼마나 많이 심었는가'를 중요한 채점 기준으로 삼았을 정도다. 당연히 일반 백성들에게도 가구당 수십 그루씩 닥나무를 강제로 심고 가꾸게 했다.   조선 시대에는 각 고을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는 공납(貢納) 제도가 있었다.특히 닥나무가 잘 자라고 물이 맑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의 산간 고을들이 집중 타겟이 되었다. 겨울철 농한기가 되면 관내의 일반 농민들까지 관청의 종이 제작소로 강제 동원되어, 닥나무를 베어 껍질을 벗기고 종이를 뜨게 했다. 부역(노동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부렸기 때문에, 당연히 임금은 커녕 밥 한 끼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날씨는 추운데 얼음물을 만지며 종이를 떠야 하니, 손발이 트고 동상에 걸리는 백성들이 속출했다.조선 시대 종이 공납의 가장 큰 피해자엔 절의 승려들도 있었다. 국가는 절에 엄청난 양의 종이를 공물로 할당했다. 절은 깊은 산속에 있어 닥나무를 구하기 쉬웠고, 흐르는 계곡물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겨울 내내 염불은커녕, 얼음물에서 죽어라 종이만 만들어야 했다. 도저히 그 수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승려들이 밤중에 절을 버리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문을 닫고 사라진 절이 수두룩했다고 할 정도다.   문제는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그냥 넘어갈 관리들이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 조선 최악의 정경유착이자 수탈 시스템인 ‘방납(防納)의 폐단’이 등장한다.방납(防納)에서 ‘방(防)’은 막을 방 자인데, 말 그대로 백성이 직접 가져온 공물을 관청에서 ‘막아서 못 내게 한다’는 뜻이다. 즉 질이 떨어진다는 등 이런저런 핑계와 트집을 잡아, 애써 만들어 가져온 공물을 되돌려 보냈다. 대신 관아 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방납 상인들에게 종이를 10~100배나 주고 사서, 공물로 바치게 유도했다. 관아와 상인이 공모하면서, 공물을 바치는 백성만 죽어난 것이다. 이렇게 퇴짜맞은 공물(종이)를 상인이 헐값에 사서 쓸만한 것을 골라, 또 다른 퇴짜 맞은 백성에게 팔았다.즉 관료와 특권 상인이 결탁해 카르텔을 만들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조직 범죄였던 것이다. 너무나 가혹하고 힘들다보니, 일부 백성들은 닥나무를 불태우고 도망치기도 했다.   이런 지옥같은 상황을 백성들을 구해 준 게 대동법이다.당시 조선 백성들을 파산으로 몰고 갔던 3대 지옥 공물이 바로 '인삼, 종이(한지), 생선'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공물 대신, 가진 땅의 크기에 비례해서 쌀로만 세금을 내게 한 법" 즉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되었다. 1608년(광해군) 경기도에서 처음 시범 도입되어 1708년 숙종 때 완성된,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금 개혁이었다.   세계 최고이자 모두가 탐냈던 한지는 이렇게 수많은 민초들의 고혈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적어도 대동법이 시행되며, 전문 장인들이 제값 받고 만들기 전까지는.   <묻는다칼럼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칭기스칸의 운

칭기스칸의 운   필자가 어렸을 땐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좀 커서는 ‘운7, 기3’으로 바뀌었다. 이제 인생을 사실상 거의 다 살고 나니, 인생은 ‘운9, 기1‘ 또는 ’운7, 복3‘이란 결론을 내렸다. 노력과 성실도 타고난 운이나 복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세계사를 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을 꼽으라면 1위가 칭기스칸이다. 거꾸로 칭기스칸은 세계 최고로 운이 좋았던 인물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칭기스칸은 어릴 때 아버지(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해 노예로 살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극적‘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졌고, 이후에도 몇 번이나 암살이나 기습 위기를 ’극적‘으로 모면했다. 그랬던 그가 몽골을 통일한 것 자체가, ’극적‘이고 운빨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말 ’극적‘으로 우수한 장수들을 품게 된다. (칭기스칸의 탁월한 리더십도 한몫했지만, 그것만으론 설명이 되지 않는다)   몽골을 통일한 칭기스칸은 리더로서 뭔가 보여줘야 했다. 일본이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하자 강력해진 군대로 조선을 침범했듯, 통일 몽골 역시 그동안 단련된 군사력으로 성과를 보이며 리더십을 강화하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첫 대상이 평소에 몽골을 괴롭히던 티베트계의 '서하'였다. 몽골이 자신들도 모르게 급발진한 전투력으로 서하를 공격하자, 이에 놀란 서하는 스스로 속국이 되겠다며 공주와 많은 물자를 바쳤다. 몽골인들은 예상 밖의 첫 성공에서 전리품과 영웅 등장에 열광했고, 칭기스칸의 아래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자 칭기스칸은 자신의 자리와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전쟁과 전리품이 또 필요해 졌다.   이번엔 그동안 몽골을 괴롭혀 왔던 금나라로 복수의 칼을 뻗었다. 칭기스칸은 초기엔 금나라의 북쪽을 공략하여, 요동과 화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전리품과 인구를 얻었다. 하지만 금나라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여서, 더이상 진전이 어려웠다.   한편 당시 칭기스칸은 중앙아시아 강국인 호라즘에 사신을 보내 교역을 청했다. 이때만 해도 칭기스칸은 호라즘과의 교역을 통해 국가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까지가 그의 목표였던 것 같다. (세계 정복은 아예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병력의 수만 믿고 자만했던 호라즘은, 그만 몽골 사신 수 백 명을 죽여버리는 대실수를 해버렸다. 마침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더이상 진척이 없어 곤란해진 칭기스칸은, 실추한 자신의 명예를 만회하기 위해 호라즘으로 병력을 돌렸다. (울고 싶을 때 따귀를 때려준 격인데, 이것도 운이다) 몽골군의 전투력이 최고로 빛을 발하며,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세계 정복의 발단이 된, 바로 그 전쟁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몰려오는 몽골군의 침략에, 성들은 순식간에 무너지거나 스스로 문을 열었다. 그동안 쓸데없이 객기를 부렸던 호라즘의 술탄(황제) 무하마드는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계속 서쪽으로 도망쳤다. 칭기스칸은 제베와 수부타이 장군에게 그를 끝까지 추격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두 장군은 2만의 기병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도망치는 술탄을 끝까지 뒤쫓았다. (결국 술탄 무하마드는 카스피해의 작은 섬에서 병사했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러시아 남부와 흑해 북쪽의 킵차크 초원까지 휩쓸고 돌아왔다. (유럽 원정은 그 다음의 일이다)   한편 몽골은 금나라와 호라즘을 치러 갈 때 서하에게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구했으나, 서하는 이를 거절했고 오히려 몽골의 뒤통수를 치려 했다. 뚜껑이 열린 칭기스칸은 호라즘을 박살 낸 직후, 내친김에 서하로 향했다. 이미 내부에서 편이 갈리며 스스로 무너져 있던 서하는 게임이 되지 못했다. 칭기스칸은 서하를 손쉽게 유린하며, 본의 아니게 마지막 원정(1226~1227년)을 마쳤다. (사망) 이렇게 어찌어찌 하다보니, 또 많은 영토와 전리품과 인구를 차지하게 되었다.   칭기스칸이 직간접으로 차지했던 영토와 휩쓸고 돌아왔던 영향권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위 그림과 같다. 세계 최대의 영토를 가졌던 몽골제국(아래 그림)과 비교하면 훨씬 작다. 나머지 영토는 칭기스칸 사후 그의 후손들(오고타이, 바투, 쿠빌라이 등)이 동유럽, 바그다드, 금과 남송까지 정벌한 결과다. 사실 칭기스칸 사후의 정벌 대상이 훨씬 강국들이었고, 더 힘든 전쟁이었다.   하지만 칭기스칸의 후손들은 칭기스칸이 닦아 놓은 자산을 기반으로, 나머지 강국들을 정벌했고, 후손들 역시 칭기스칸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칭기스칸을 내세웠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세계 정복자‘라고 생각하는 칭기스칸의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도 다 칭기스칸의 운(명예운+자식운)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프로만큼 인기있던 고교야구

프로만큼 인기있던 고교야구   제54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진행 중이다. (사진) 예선이 없이 모든 팀이 참가하는 대회라, 무려 104개팀이나 참가했다.필자가 어렸을 땐 고교야구가 정말 인기였다. 생각해보면 각 지역을 응원하는 마음들이 모여 인기를 끌게 된 것 아닌가 싶다. 지금의 프로야구가 담당하던 것을, 당시엔 고교야구가 대신했다는 생각이다.   예전엔 신문사의 역할이 컸다.당시 신문은 지성의 표현이었고, 사회 리더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신춘문예를 비롯해 음악 콩쿠르 등 많은 문화행사를 개최했다. 그 일환으로 고교야구 발전을 위해, 유력 신문사들이 고교야구대회를 주최했다.   중앙일보의 대통령배, 조선일보의 청룡기, 동아일보의 황금사자기, 한국일보의 봉황대기 등이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였다. 특히 과거 봉황대기에는 재일교포팀이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한편 고교야구가 인기를 끌면서, 유력 지방신문사도 이에 동참했다. 매일신문이 대구에서 개최한 대붕기, 부산일보가 부산에서 주최한 화랑대기 등이 대표적이었다. (두 대회 모두 2011년 폐지됨)   고교야구가 인기가 워낙 높다 보니, TV와 라디오로도 생중계했다. 특히 야구장에서 라디오를 동시에 들으면서 경기를 관람하면 더 재미있었다. 필자도 국민학생 시절, 동대문 운동장에 옆에 앉은 아저씨가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듣는 중계를, 몸의 반쯤 기울이고 귀를 쫑긋 세우며 훔쳐 듣곤 했다. 대붕기와 화랑대기는 TV 중계가 없어, 가끔 라디오 중계로 들을 수 있었다.밤에도 경기를 했는데, 경기장 조명이 전기 낭비라며 밤(저녁) 경기를 금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낮에 경기를 중계하면, 그걸 보려는 TV 전기 소비가 더 크다는 비판도 있었다)   고교야구 인기가 치솟다보니, 고교선수 일부는 지금 아이돌 이상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여학생들은 비명을 질렀고, 팬레터가 쏟아졌다. 하지만 아무리 인기가 있던 선수여도, 인기는 고교야구에서 끝났다. 인기 고교야구 선수들이 대학을 가고 실업팀을 가도, 과거의 인기는 고교에서 너무 짧게 끝나 있었다. 게다가 투수의 경우 고교시절 혹사를 당해, 안타깝게도 선수 생명이 그걸로 끝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요즘 고교야구 중계는 가끔 보려 해도, 차마 보질 못 하겠다.너무 앳된 얼굴과 체격에, 프로와 MLB로 높아진 눈으로 보니, 과거에 저런 걸 왜 좋아했나 싶을 정도다.   ‘그때였으니까’ 하며, 채널을 돌리게 된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주몽은 고(高)씨였을까?

주몽은 고(高)씨였을까?   과거 드라마 ‘주몽’이 한창 인기였을 때, 길 가다 얼핏 이런 얘길 들었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주몽은 고씨야?”라고 물으니, 아버지가 ‘고구려니까 고씨지“라고 대답한 장면이다. 당시엔 그냥 흘려 들었는데, 최근 다시 생각나면서 ”그럼 왜 주몽의 후예인 백제 왕족은 부여씨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여기저기 조사를 해봤다.(이하는 필자가 수집한 자료와 필자의 상상력으로 짜집기한 내용이니, 토 달지 마시길)   우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주몽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의 후손인 부여 금와왕의 아들이다. 하지만 새로 나라를 세우면서, 하늘/태양과 같이 높고 존귀하다는 뜻에서 스스로 ‘고(高)’씨를 성으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2대 ~ 5대 왕의 성으로 해(解)자가 쓰인 걸 보면, 주몽의 성만 고씨라는 건 이상하다. 주몽은 ‘해모수’의 후손이므로 원래 해씨, 즉 ‘해주몽’이었는데 후대에 고씨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중국의 사서에 의하면 고구려 건국 전에 이미 구려(句麗 또는 구리/고리)라는 지역이 있었다고 한다. (성이나 마을을 뜻한다고 한다. 고을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중국 사서에 기록될 정도이니 꽤 큰 지역이나 부족이었을 것이다.이는 주몽이 그 지역에 나라를 세울 때 이름을 구려(구리)라고 만든 게 아니라, 그 지역의 원래 이름인 구려(구리, 고리)을 그대로 국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느날 국호가 갑자기 구려에서 고구려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가 중요하다.제5대 모본왕(해우 解憂)이 암살당한 뒤 (쿠데타로 추정), 제6대 태조대왕(고궁 高宮)이 즉위하면서 왕족이 바뀌었다. 즉 초기에는 부여계 해씨 집단(연노부/소노부)이 왕족이었는데, 제6대 태조대왕 때부터 계루부 고씨(高氏)로 왕족이 바뀐 것이다. 보통 국가를 새로 창업한 군주에게 붙는 '태조'라는 호칭이 6대 왕에게 붙은 것도, 사실상 계루부 고씨 왕조의 실질적 시작점이 이때였음을 암시한다. 이때부터 왕족의 성인 고(高)를 나라 이름이었던 ‘구려’ 앞에 붙여, 나라 이름이 ‘고구려’가 되었다.   요약하면 부여 왕족(해씨) 출신 주몽이 소노부(연노부)의 소서노와 결혼해 그들의 세력을 바탕으로 구려라는 지역에서 ‘구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5대 임금 때 계루부(고씨)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며, 이후부턴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로 6대 태조왕으로 명명하고 국호를 ‘고구려’로 바꿨다.하지만 소노부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기존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정통성과 부여의 후손이란 것을 내세울 필요가 있어, 추모왕(주몽)의 혈통을 이어받은 정통 후계자로 포장한 것이다. 따라서 주몽의 성도 고씨로 바꿔야 했다.   그러다 5세기 장수왕 대에 이르러 가운데 자인 '구(句)'를 빼고 ‘고려(高麗)’로 개칭했다. 다만 우리는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굳이 고구려라고 부른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 찍어낸 ‘동국정운’이나 ‘용비어천가’의 주석에는, "麗를 나라 이름일 땐 '리'로 발음한다"고 명시되어 있어, 당시에는 '고리' 또는 '고구리'라 읽었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 ‘고구려’ 또는 ‘고려’라고 읽는 것은 잘못이란 지적이 타당해 보인다.)   그러면 백제 왕족은 왜 성으로 부여(扶餘)씨를 사용했을까?온조로 시작한 초기 백제는 해씨(解氏)와 진씨(眞氏) 등의 귀족 연합 정권이었고, 왕족은 해씨였다. 즉 온조의 이름은 ‘해온조’였다. 특히 3세기 백제의 기틀을 잡은 해씨(解氏) 고이왕계는 고대국가로 기틀을 잡았는데, 이 시기 백제의 실권자이자 재상들도 왕족인 해씨(해구, 해충 등)였다.344년 해씨의 계왕(契王)이 즉위했지만 불과 2년 만에 사망하자, 초고왕계인 근초고왕이 정권을 잡았다. (아마도 쿠데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고이왕계인 해씨 세력을 추방 또는 숙청(?)하고, 새로운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국가 정통성의 뿌리인 ‘부여’ 자체를 왕실의 성씨로 채택했다.   (당시에는 이렇게 부여라는 나라가 고구려와 백제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조상의 나라’로서, 위상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부여에 대해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게 참으로 안타깝다)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 모두 사실상 쿠데타로 왕족이 바뀌면서 왕족의 성도 바뀌었고, 고구려는 나라의 이름까지 바뀌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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