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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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은 고(高)씨였을까?
주몽은 고(高)씨였을까?과거 드라마 ‘주몽’이 한창 인기였을 때, 길 가다 얼핏 이런 얘길 들었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주몽은 고씨야?”라고 물으니, 아버지가 ‘고구려니까 고씨지“라고 대답한 장면이다. 당시엔 그냥 흘려 들었는데, 최근 다시 생각나면서 ”그럼 왜 주몽의 후예인 백제 왕족은 부여씨지?”라는 의문이 들었다.갑자기 궁금해져서, 여기저기 조사를 해봤다.(이하는 필자가 수집한 자료와 필자의 상상력으로 짜집기한 내용이니, 토 달지 마시길)우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주몽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의 후손인 부여 금와왕의 아들이다. 하지만 새로 나라를 세우면서, 하늘/태양과 같이 높고 존귀하다는 뜻에서 스스로 ‘고(高)’씨를 성으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2대 ~ 5대 왕의 성으로 해(解)자가 쓰인 걸 보면, 주몽의 성만 고씨라는 건 이상하다. 주몽은 ‘해모수’의 후손이므로 원래 해씨, 즉 ‘해주몽’이었는데 후대에 고씨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중국의 사서에 의하면 고구려 건국 전에 이미 구려(句麗 또는 구리/고리)라는 지역이 있었다고 한다. (성이나 마을을 뜻한다고 한다. 고을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중국 사서에 기록될 정도이니 꽤 큰 지역이나 부족이었을 것이다.이는 주몽이 그 지역에 나라를 세울 때 이름을 구려(구리)라고 만든 게 아니라, 그 지역의 원래 이름인 구려(구리, 고리)을 그대로 국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어느날 국호가 갑자기 구려에서 고구려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가 중요하다.제5대 모본왕(해우 解憂)이 암살당한 뒤 (쿠데타로 추정), 제6대 태조대왕(고궁 高宮)이 즉위하면서 왕족이 바뀌었다. 즉 초기에는 부여계 해씨 집단(연노부/소노부)이 왕족이었는데, 제6대 태조대왕 때부터 계루부 고씨(高氏)로 왕족이 바뀐 것이다. 보통 국가를 새로 창업한 군주에게 붙는 '태조'라는 호칭이 6대 왕에게 붙은 것도, 사실상 계루부 고씨 왕조의 실질적 시작점이 이때였음을 암시한다. 이때부터 왕족의 성인 고(高)를 나라 이름이었던 ‘구려’ 앞에 붙여, 나라 이름이 ‘고구려’가 되었다.요약하면 부여 왕족(해씨) 출신 주몽이 소노부(연노부)의 소서노와 결혼해 그들의 세력을 바탕으로 구려라는 지역에서 ‘구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5대 임금 때 계루부(고씨)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며, 이후부턴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로 6대 태조왕으로 명명하고 국호를 ‘고구려’로 바꿨다.하지만 소노부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기존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정통성과 부여의 후손이란 것을 내세울 필요가 있어, 추모왕(주몽)의 혈통을 이어받은 정통 후계자로 포장한 것이다. 따라서 주몽의 성도 고씨로 바꿔야 했다.그러다 5세기 장수왕 대에 이르러 가운데 자인 '구(句)'를 빼고 ‘고려(高麗)’로 개칭했다. 다만 우리는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굳이 고구려라고 부른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 찍어낸 ‘동국정운’이나 ‘용비어천가’의 주석에는, "麗를 나라 이름일 땐 '리'로 발음한다"고 명시되어 있어, 당시에는 '고리' 또는 '고구리'라 읽었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 ‘고구려’ 또는 ‘고려’라고 읽는 것은 잘못이란 지적이 타당해 보인다.)그러면 백제 왕족은 왜 성으로 부여(扶餘)씨를 사용했을까?온조로 시작한 초기 백제는 해씨(解氏)와 진씨(眞氏) 등의 귀족 연합 정권이었고, 왕족은 해씨였다. 즉 온조의 이름은 ‘해온조’였다. 특히 3세기 백제의 기틀을 잡은 해씨(解氏) 고이왕계는 고대국가로 기틀을 잡았는데, 이 시기 백제의 실권자이자 재상들도 왕족인 해씨(해구, 해충 등)였다.344년 해씨의 계왕(契王)이 즉위했지만 불과 2년 만에 사망하자, 초고왕계인 근초고왕이 정권을 잡았다. (아마도 쿠데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고이왕계인 해씨 세력을 추방 또는 숙청(?)하고, 새로운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국가 정통성의 뿌리인 ‘부여’ 자체를 왕실의 성씨로 채택했다. (당시에는 이렇게 부여라는 나라가 고구려와 백제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조상의 나라’로서, 위상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부여에 대해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게 참으로 안타깝다)이렇게 고구려와 백제 모두 사실상 쿠데타로 왕족이 바뀌면서 왕족의 성도 바뀌었고, 고구려는 나라의 이름까지 바뀌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9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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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안 태어난 게 다행이다
옛날에 안 태어난 게 다행이다 과거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대개 화려한 영웅담을 많이 담는다. 하지만 병사들이나 백성들이 칼에 찔리거나 베이거나 목이 잘려 죽는 장면들을 보면, 정말 잔인하고 끔찍하다. 살아도 포로나 노예가 되어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된다. 게다가 약탈당하고 겁탈당하고...지금은 전쟁에서 총이나 대포로 깔끔하게(?) 죽지만, 과거의 전쟁에선 칼이나 활을 비롯해 돌에 맞거나 불에 타서 죽었다. 특히 예전엔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화살에 독이나 오물을 묻혀 공격했다.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덧나, 고통 속에서 죽거나 수족을 잘라내야 했다. 군대가 진을 치고 장기전에 돌입하면 특히 먹는 게 문제였다. 깨끗한 식수와 먹거리가 부족하다 보니 전염병이 쉽게 돌았다. 불쌍한 병사들은 객지에 나와, 고통 속에 의미없이 죽어갔다.이렇게 1차대전 이전의 전쟁에선 병으로 죽는 병사들이 더 많았다. 1차대전에선 대포와 기관총의 활약(?)으로, 전투나 전투 부상으로 인한 사망이 크게 늘었다. 그래도 병으로 사망하는 병사들의 수는 30%가 훨씬 넘었다.1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참호장면이 많이 나온다. 참호를 파고, 그 안에서 먹고 자고 대기하는 시간이 길었다. 문제는 그 참호가 그냥 땅만 판 거라, 배수 시설 같은 게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비가 오면 오랫동안 참호에 흙탕물이 차 있었다. (사진)특히 화장실용으로 구덩이를 따로 파긴 하지만, 참호의 특성상 거리를 멀리 두기 힘들었다. 참호 안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면, 멀리 가서 묻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오면 넘치기 일쑤여서, 참호에 고인물은 더럽기 그지없었다. 병사들은 ‘온갖 병균 덩어리’ 물 속에서 생활하고, 발은 그 물에 늘 젖어 있었다. 그러니 병사들은 참호 속에서 전염병으로 죽거나, 발이 썩어 발가락과 다리 등을 절단해야 했다. (페니실린 발견 전이다) 한편 ‘대항해 시대’라고 하는 시기가 있었다. 탐험에 나서고 신대륙과 신항로을 발견하던 역동적인 시대였다. 역사적으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영화나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선원들 입장에선 목숨을 건 일이었다.여기서도 먹는 게 가장 문제였다. 나무통에 담아온 물은 며칠만 지나도 상하고 썩었다. 딱딱한 말린 빵엔 벌레가 우글거렸고, 소금에 저린 고기는 너무 딱딱해서 씹기 힘들었다. 그래도 살기 위해선 매일 똑같은 것만 먹어야 했다. 이렇게 한 달 정도 참아내면, 이번엔 괴혈병이 찾아왔다. 잇몸에서 피가 나고 이가 빠지며 피부가 까맣게 변했다. 괴혈병 증상으로도 죽었지만, 이가 빠지니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없어 굶어 죽기도 했다. 습기 속에 쥐와 빈대 등이 창궐한 배 안의 환경은 극악이었다. 항해 도중 사망률이 90% 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생지옥과 다름없었다. 영화와 드라마엔 기사들이 멋있게 활약하던 중세시대에, 백성들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여성들은 걸핏하면 마녀로 몰려, 갖은 고문을 당한 후 불에 태워졌다. 하늘이 그 죄를 묻듯, 유럽에선 페스트가 창궐해 전체 인구의 40% 이상 죽었다. 하지만 이는 평균 수치일 뿐, 심한 지역은 80~90%의 인구가 죽었다. 가족이나 친구 동네 사람들까지, 사실상 나만 빼고 거의 다 죽은 셈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들의 시체를 치워가며, 공포 속에서 버텨야 했다. 그런데 페스트가 창궐한 이유 중 하나가 더러운 환경 탓이었다. 특히 기독교에선 목욕 등 씻는 걸 금기시하면서 전염성을 더 키웠다. 어떻게 평생 씻지 않고 살 수 있지? 매일 샤워하고 머리 감고 수시로 손 씻는 우리에겐, 너무나 더럽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라고 하며,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낭만적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민 초기시절 얘기다.아일랜드에선 1845년부터 1852년 사이에 발생한 대기근으로, 인구가 약 830만 중 약 1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아일랜드인들은 살기 위해 100만 이상이 미국 등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탈출선에 타도, 15% ~ 30%가 병으로 배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오죽하면 배를 관함(Coffin Ships - 배 자체가 시신을 나르는 관이라는 의미)이라고 불렀다. 한꺼번에 많은 승객들이 몰리자, 화물선까지 동원해 정원을 훨씬 넘는 사람들을 짐짝처럼 태운 탓에 질병이 만연했다.운이 좋게 살아남아 미국 등에 도착했어도, 기다리는 건 삶을 위한 투쟁뿐이었다. 정해진 일자리를 놓고 기존 현지인들과 목숨 걸고 싸워야 했고, 심지어 어린 아이들조차 중노동에 시달리며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앓다가 죽었다.‘이민자의 나라’라는 낭만은 없었다. 그래서 옛날이 아닌 지금 태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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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대(對) 환경 ① - 연산군의 부모
유전 대(對) 환경 ① - 연산군의 부모 사람에게 유전이 중요한지, 아니면 환경이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은 끝이 없다. 다만 유전과 환경 모두 사람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유전과 환경의 영향에 대해 얘기하게 된 계기는, 다름아닌 폭군 ‘연산군’에서 비롯됐다. (이하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필자의 사견을 혼합한 것이니, 토 달지 마시길...) 예종이 즉위 1년 2개월 만에 불과 20세 젊은 나이로 요절한 후, 조카인 성종이 13세(1469년)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성종의 나이가 너무 어려, 할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성종에겐 이미 첫 부인인 공혜왕후가 있었는데, 한명회의 딸이었다. (성종은 원래 3순위였으나, 권력자였던 장인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합작으로 보위에 올렸다는 설이 있다) 공혜왕후는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었음에도 아버지 한명회와 달리(?), 시어머니와 할머니 등 왕실 어른들을 극진히 모셨다. 후궁들에게도 질투를 하지 않고 옷감을 나눠주는 등, 인자한 성품으로 궁중의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성종이 즉위 후 수년이 지나도 공혜왕후에게서 아이가 생기지 않자, 왕실의 후사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1473년(성종 4년, 17세) 후궁들을 간택해 입궁시켰다. 이때 후궁(숙의)으로 들어온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훗날 연산군의 어머니가 되는 (폐비) 윤씨였다. 우선 성종의 외모에 대해 실록에서는 '미풍의(美風儀) 준정(峻整)'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용모가 아름답고 풍채가 훤칠하며 당당하다"는 뜻이다. 성종은 관대하고 온화한 성품에 어울리는 훤칠한 호남형 외모로, 조선 양반 사회에서 생각하는 '덕을 갖춘 군주의 용모'에 딱 맞았다.실록에 따르면, (폐비) 윤씨는 성종에게 "전하의 용모가 아름다우시니, 훗날 나이 들어 늙으시면 반드시 여색을 탐하고 후궁을 바치려는 자들이 몰려들 것입니다"라고 직접 말할 정도였다. 한편 성종은 밤과 낮이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낮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경연에 참석하며 유교적 삶을 살았다. 하지만 밤만 되면 술과 여색으로 밤을 지샜다. 18세가 되던 해 할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성종은 왕으로서 권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벌써부터 후궁을 적극적으로 늘려갔다. 오죽하면 실록에는 성종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후궁의 처소에만 머무르는 것을 두고, 신하들이 "전하께서 여색을 너무 가까이하여 건강을 해치실까 두렵다"라며 간언하는 기록이 수차례 등장한다고 한다. 성종은 결국 12명의 부인(왕비 및 후궁)에게서 28명의 자녀(16남 12녀)를 두었을 만큼, 역대 조선 국왕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여색을 많이 밝힌 임금이었다. 성종은 재위 25년간 ‘유교적 모범 군주(도학군주)’를 지향하여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경연(학문 토론)과 학문과 정사에 매달렸지만, ‘왕실의 후사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술과 여색을 매우 즐겼다. 이는 과도한 정사 스트레스와 더불어 몸의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만성 피로와 종기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어, 결국 만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럼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외모는 어땠을까?성종실록에는 윤 씨의 외모에 대해 "용모가 아름다워(미색, 美色) 왕의 은총을 독점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또한 성종이 반대를 무릅쓰고 후궁이었던 윤 씨를 두 번째 왕비(계비)로 맞아들인 것을 볼 때, 상당한 미모와 매력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주변의 의견에 따라 정식으로 다른 계비를 맞이했으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윤씨는 중전이 됐으면, 임금이 만날 다른 후궁들과 주색잡기를 해도 모르는 척 했어야 했다. 기록에 따르면 폐비 윤씨는 다른 후궁들을 극도로 질투하고 감정의 기복이 매우 컸는데, 성종과 다투다 그만 용안(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이로써 윤 씨는 졸지에 폐비된다. 이렇게 윤 씨의 아들 연산군이 불과 생후 4개월 만에 어머니와 격리되고, 4세 때 어머니가 사약을 받고 죽는 비극을 맞으며 역사의 풍랑을 예고했다.(생후 4개월이라면, ‘윤 씨는 산후 우울증을 겪고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참 아까운 일이다.) <다음에 계속>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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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중성과를 너무 자화자찬 하는 거 아닙니까?답한다일보
문대통령을 중국 공항에 영접나온 사람이 왕이 외교부장이 아니라 그 아래 사람이 나왔다면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는 것이고(필리핀 대통령이 왔을 때에는 왕이 외교부장이 영접을 나왔다던데)사드 갈등도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 봉합 수준 같고3박4일동안 문대통령이 10번을 식사를 했는데 그중 8번을 혼밥을 했다면이건 뭔가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대통령이 외국을 그것도 국빈 방문을 할 때 식사 한번 하는 게 얼마나 주요한 건데...뭔가가 시원하거나 깔끔하지 않은 방중 결과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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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의회 강감창 의원에게 물어 보겠습니다답한다일보
몇 달 전에 서울시림대 문제에 대해 제기하신 적이 있습니다.전체 학생 중 지방 학생 (비 서울지역 학생) 수가 3/4를 넘는데왜 서울시 세금으로 그들의 등록금을 지원해주는가?아주 공감이 가고 옳으신 말씀입니다.그런데 그후에 어떻게 되었나요?지방학생이라면 최소한 국립대 수준으로는 등록금을 내야하는 거 아닙니까?이 사안에 대해 후속 조치 상황과 계획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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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앞 고가공원 없애면 안됩니까?배재탁
가뜩이나 막히는 구간인데 고가도로를 공원으로 만들고 나서만리동쪽에서 명동쪽으로 가는 데평일 오후에 전에보다 20~30분이 더 걸립니다.이게 뭡니까?게다가 고가 공원이라고 가보면 정말 볼 것도 없고 사람도 없고그거 왜 한겁니까?서울시민들이 그것때문에 얼마나 불편한데요시간낭비, 연료낭비, 환경오염.............차차리 돈이 좀 들더라도 전에 고가 그대로 좀 놔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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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장님께 여쭤보겠습니다묻는다일보
잠실 주공5단지에 사는 주민입니다.내년에 지방 선거가 있는데 이번에도 출마하십니까?물론 공천을 받아야 하겠지만... 임기중에 특별한 공적이 있으신가요?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눈에 띄는 게 없는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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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데 해결방안 없습니까?묻는다일보
중구청 바로 맞은 편에 있는 동림비즈센터에 사무실이 있습니다.아시다시피 허구헌 날 중구청 핲에서 시위를 하는 데 정말 시끄러워서 일을 못하겠어요.분명 소음 기준을 포과하는 거 같은데도 경찰은 보고만 있고...노점상들이 먹고살자고 집회하는 건 좋은데남한테 이렇게 피해를 주면 되나요무슨 해결방안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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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제도 너무 복잡한 거 아닙니까?진주아줌마
전형 방식을 다양화하고 기회를 여러번 주는 건 좋지만아무리 그래도너무 복잡하니 이젠 대학입시를 위한 컨설팅을 돈 내고 받는 일이 비일비재입니다.대학입시 전문기관에서 개최하는 대입설명회는 사람들이 넘치고............학교마다 전형마다 너무나 다양하고 조건이 다르다보니애들한테 뭘 시켜야 할지 몰라 이거저거 더시키게 되고...웬만한 사람들 머리로는 작전이 안짜져요교육 정상화를 하려면 대입 부터 좀 단순화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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