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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기와 고약 ② - 고약

종기와 고약 ② - 고약   옛날엔 위생상태도 좋지 않고 몸나 손으로 해야 하는 일이 많아서, 종기나 염증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빈대나 벼룩 같은 해충때문에 더욱 흔해졌다. 이는 전세계적인 현상이었다. 따라서 어느 지역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를 고치기 위한 약들을 찾고 개발하려 애썼다. 그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사용했으므로, 제조법은 지역이나 시대별로 달랐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한방 또는 민간요법 형태로 있었다. 하지만 약효가 확실하진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이 당시의 이런 모든 약을 ‘고약’이라고 통칭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약(국어사전에 ‘주로 헐거나 곪은 데에 붙이는 끈끈한 약’이라고 표현하는 약)은 ‘이명래 고약’에서 비롯됐다.   필자가 이 고약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살 쯤에 목욕탕에 갔다가 온몸에 종기가 생기면서였다. 명함보다도 큰 종기가 10개 정도 생겼는데, 피부과를 갔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이때 누군가의 얘길 듣고 이명래 한의원에 가서 고약을 사다 붙였다. 거짓말처럼 일주일만에 깨끗이 나았다.   그래서 이명래 고약에 대해 알아 봤다.원천 기술은 1895년 충남 아산에 한국 선교사로 들어온 프랑스인 드비즈 신부에 의해서다. 중국에서 체한의학을 배운 그는 한국인을 위해 고약을 만들었는데, 어리지만 영특하고 독실했던 이명래 선생에게 그 비법을 전수하였다. ‘이명래 고약’은 그의 나이 불과 열여섯 되던 1906년에 개발에 성공하여, 종기 환자 치료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엔 단순히 종기뿐만 아니라. 지금도 난치병으로 여겨지는 골수염, 결핵성 임파선염, 관절염을 비롯하여 온갖 염증에 효험이 뛰어난 처방들을 개발하여 환자들을 치료해주었다. 1920년 서울로 올라와 중림동에 고약집을 열었는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후 ‘이명래 고약’은 ‘명래제약(주)’과 ‘명래한의원’ 두 갈래로 전승되어왔다. 약국에서 판매되던 ‘이명래 고약’은 이명래 선생의 막내딸인 이용재 여사(2009년 타계)가 운영하던 ‘명래 제약’ 즉 공장에서 대량 제조한 제품이다. 필자도 어릴 적 종종 사용해봤지만, 효능이 그리 뛰어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은 다른 회사에서 제조 시판 중인데, 요즘 제품은 효능이 어떤지 모르겠다.‘명래한의원’은 이명래 선생의 사위인 이광진 씨에게 물려주었는데, 이광진 씨는 정식으로 한의를 전공한 사람이었다. 바로 이곳의 고약이 정통으로 만들어진 곳이었고, 정말 효능이 뛰어났다. 그는 고약 이외에도 뛰어난 의술로 환자들이 꽤 많았다. 이후 그의 사위인 한의사 임재형 원장이 장인의 가업을 이어받아 운영했는데, 지금은 명맥이 끊긴 것 같다.   과거의 좋은 기억때문일까.항생제나 외과적 수술이 없이도 훌륭하게 치료하는 고약이 사라지지 않고 계승되길 바랄 뿐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종기와 고약 ① - 종기

종기와 고약 ① - 종기   필자가 어렸을 적엔 종기가 흔했다. 필자도 여러 번 고생했다. 당시 가장 손쉬운 치료법은 충분히 곪을 때까지 기다렸다 손으로 짜는 것이었다. 아프긴 해도, 대개 이렇게 낫고 끝났다.   옛날엔 종기가 정말 많았는데, 우선 깨끗하지 못한 환경 탓이 컸다. 목욕도 자주 안 하고, 옷도 자주 갈아입지 않았다, 더구나 영양상태도 지금만 못하여서, 면역력이 떨어진 것도 한몫했다.   종기는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아니 어찌 보면 임금님들이 더 고생을 많이 했고, 종기로 죽기도 했다. 그 이유로 과중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와 복장 때문이었다. 일은 많은데, 비단과 무명 등으로 옷을 겹겹이 입었다. 하지만 더워서 땀이 비 오듯 해도, 한 나라의 왕이 옷을 벗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목욕을 자주 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세균이 증식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 만들어졌다. 특히 당시 왕들은 잘 먹지만 운동은 하지 않아, 당뇨도 많고 면역력이 형편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항생제도 없고, 발달된 외과적 수술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 네 명이 종기로 인해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 제5대 문종은 즉위 전부터 종기로 고생했는데, 세종의 삼년상을 치르며 몸이 약해진 상태에서 등에 난 거대한 종기(등창)가 악화되어 재위 2년 만에 승하했다. 종기만 치료했어도, ‘왕과 사는 남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제9대 성종은 배와 등에 난 종기가 원인이 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성종이 종기만 잘 치료했어도, 연산군이란 폭군은 없었을 수도 있다.제17대 효종은 얼굴에 난 종기를 침으로 찔러 고름을 뽑아내려다, 혈관을 건드리는 의료 사고로 인해 과다출혈로 급서했다. 당시 치료를 맡았던 어의 신가귀는 노안으로 눈이 침침하고 수전증으로 손이 떨렸다고 한다. 결국 침을 잘못 찔러 침 끝이 혈관을 깊게 찔렀고, 효종은 쏟아지는 피를 멈추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과다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으로 신가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제22대 정조는 평소 다혈질적인 성격과 과로로 인해 등에 종기가 자주 났다. 결국 이 종기가 전신으로 퍼지고 혼수 상태에 빠지면서 세상을 떠났다. 정조가 종기를 잘 스렸다면, 조선 후기 세도정치도 없었고 우리나라의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이외에도 제7대 세조는 피부병으로 아주 고생하다가 기적적으로 치유되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야사에 의하면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나타나 "내 아들(단종)을 죽였으니 네 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며 세조의 몸에 침을 뱉었고, 그 자리에 종기가 생겨 온몸으로 퍼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 고약을 사용하면 되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종기가 흔했던 옛날에 고약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효과있는' 고약은 이 당시의 약이 아니라 의외로 근세에 들어와 만들어진 약이다.   고약에 대해선 다음 편에...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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