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header banner1 header banner2
  • 커뮤니티 문답방 · 전문가문답방
    사이트 내 전체검색
더보기 >
전문가 문답방

식당 테이블이 입식으로 바뀐 이유

식당 테이블이 입식으로 바뀐 이유   예전엔 식당에 좌식 테이블이 많았다. 고깃집이나 한식당은 특히 좌식이 많았다. 그런데 최근엔 좌식 테이블 식당을 찾기 힘들다.왜 바뀌었을까?   우선 생활습관(라이프 스타일)이 바뀌었다.국민들이 집에서부터 소파 식탁 침대로 이어지는 입식 생활에 적응하면서, 바닥에 앉을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인지 젊을수록 양반다리나 쪼그려 앉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좌식 테이블 사용에 불편한 점이 많다.나이 좀 먹을 사람들은 앉았다 일어날 때 다리가 저려, ‘에고고... ’란 소리가 자동으로 나온다.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발에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한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면 신발도 젖어서, 벗고 신는 것 자체도 괴롭고 냄새도 더 심하다. 어떤 사람은 발 냄새가 메주 비슷하게 아주 고약한 경우도 있어, 밥맛 떨어지게 하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또한 오래 앉아 있으면 피가 안 통하고, 바지와 치마가 구겨지는 것도 문제다.특히 식당 바닥이 미끄러운 경우가 많은데,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지나다가 넘어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종업원들에겐 더 문제다.무거운 뚝배기나 뜨거운 국물이 담긴 쟁반을 들고 이동하다가, 쏟거나 넘어지는 사고 위험도 훨씬 높다. (필자의 후배도 식사하다가 큰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종업원 아주머니는 치료비를 물어야 했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불판을 갈거나 상을 닦고 치우고, 방에 오르내리는 작업은 신체 피로도가 훨씬 높다. 종업원 입장에선 같은 값이면 피하고 싶다.   그런데 최근 좌식에서 입식 테이블로 급속히 바뀐 이유가 또 있단다.바로 식당 좌식 테이블을 입식으로 바꾸는 지원 사업이 지방자치단체(시·군·구)별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2017년부터 일부 지자체에서 시작해, 코로나 전후에 모든 지자체에서 적극 실시해 왔다. 식당마다 소요 비용의 50%에서 최대 90%까지 지원하는데, 보통 업소당 100만 원 ~ 300만 원 정도에서 지자체 재정 여건이나 대규모 위생환경 개선 사업과 맞물릴 때는 최대 2,000만 원까지 통 크게 지원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지자체가 나서서 지원하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이유에 더해, 외국인 관광객의 증가와 장애인 문제 해결 등의 이유가 있다.생각해보니 좌식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과 좌식이면 정말 불편할 장애인들을 고려하면, 참 잘하는 지원과 변화라 생각된다.   지자체가 예산을 들여 이런 민간 지원사업까지 하는 걸 보면, 사회가 점점 타인을 배려하며 성숙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유전 대(對) 환경 ② - 연산군

유전 대(對) 환경 ② - 연산군   역대 최악의 폭군이라고 하는 연산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일단 생김새부터 일반적 예상과 다르다.조선 후기 문신 이덕형의 ‘죽창한화’에는 어린 시절 연산군을 직접 본 노인의 회상이 실려 있는데, "얼굴빛은 백옥처럼 희고 수염이 적었으며,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눈가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라고 나온다. ‘연산군일기’에는 한양에 올라온 시위군(호위병)이 연산군을 보고 "임금이 허리와 몸이 가늘어서 위엄이 없다"고 사석에서 뒷말을 했다가, 의금부에 잡혀간 기록이 있다고 한다. 즉 덩치가 크고 듬직한 체구를 선호했던 당시 조선 기준에서는 연산군이 너무 마르고 하얗다는 이유로 위엄이 적다고 여겼고, 붉은 눈가와 미끈한 체형 그리고 뽀얀 피부가 요즘 아이돌급 외모였음이 여러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즉 키는 아버지 성종을 닮아 컸는데, 얼굴이나 체격은 어머니 윤씨를 닮아 희고 가늘었다는 얘기다. 폭군이라 해서 무지막지한 외모를 생각했지만, 실제론 여성스러운 외모의 완벽한 사이코패스 스타일이었다.   19세에 즉위한 연산군은 초기엔 유교적 성군의 모습을 갖추려 애썼다고 전한다. ‘연려실기술’에는 "즉위 초에는 모두 영명(英明)한 임금이라 칭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아침마다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는 조회에 성실히 참석했고, 유학을 공부하는 경연에도 착실히 임했으며, 세종·성종 대의 유산인 각종 서적 편찬 사업을 이어받아 마무리했다.또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그의 시문(詩文)을 보면, 시적 감수성과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고도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 성종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이 슬슬 나오기 시작한다.우선 ‘호색한(好色漢)’ 성종의 피를 물려받아, 즉위 초기부터 후궁을 두거나 궁궐 안에서 연회를 열고 기생을 불러 즐겼다. 여기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성종이 밤마다 술 마시고 여자를 밝히던 모습을 봐온 ‘가정교육’도 한몫했을 것이다.게다가 늘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던 ‘애정 결핍’의 연산군이었다. 노비 출신에 여러 번 시집을 가고 자식까지 둔 기생 장녹수에 눈이 멀어 버린다. 장녹수는 연산군보다 10살 정도 연상이었는데, 연산군의 결핍을 아이처럼 달래주기도 하고 때로는 응석을 받아주며 독점적인 총애를 얻었다. 이에 더해 연산군은 내시 몇 명만 데리고 비구니들의 거처인 정업원에 몰래 들어가 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한편 연산군은 왕권을 견제하려는 언관(사간원·사헌부·홍문관 3사) 및 사림파와의 갈등이 지속적으로 누적되었다. 연산군은 남의 간섭을 받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이는 어머니 윤 씨의 ‘참지 못 하는’ 성품을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다. 결국 쌓이고 쌓이던 불만은 무오사화(1498년)라는 불리는 대대적으로 숙청사건을 일으킨다.   나아가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전말을 알고 난 이후엔 완전히 정신줄을 놓으며 미치광이가 된다. 갑자사화(1504년)라는 무자비한 복수극을 벌이는가 하면, 채홍사를 만들어 흥청망청 놀다가 결국 중종반정(1506년)으로 폐위되고 만다.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서도 못돼먹은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다가, 불과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고작 31년 동안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요약하면 연산군은 외모에 있어, 키는 아버지를 닮고 체형과 얼굴은 어머니를 닯았다. 여색을 밝힌 건 아버지 성종의 유전과 가정환경 모두의 영향을 받았으며, 참지 못하는 기질은 어머니 윤 씨로부터의 유전이었다. 장녹수에게 빠진 건, 어머니가 없었던 환경 탓이라고 본다.전체적으로 볼 때 연산군은 유전적 기질이 약간 더 많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 광해군의 경우엔 환경적 요인이 더 커 보인다.광해군은 후궁의 아들로 태어나, 임진왜란 발발 후 갑자기 세자에 책봉된 후 목숨을 걸고 전국을 돌며 분조를 이끌었다. 이후 선조로부터의 엄청난 핍박을 견딘 후 보위에 오르지만, ‘적자’ 영창대군과의 갈등으로 압박을 받는다. 영창대군을 죽인 후에는 역모와 암살의 위협속에서 살았다. 이렇게 평생 다져진 마음(?)때문에, 폐위 후에도 18년이나 더 살았다.(향년 만 66세로 장수했다) 그동안 아들 부부와 아내가 먼저 사망하고, 온갖 멸시를 받으며, 병자호란을 지켜봤다. 적장자로 태어나 온실에서만 자랐던 연산군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코끼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동물은?

코끼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동물은?   육상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코끼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동물, 코끼리가 보거나 느끼기만 하면 기겁하고 도망가는 동물은 무엇일까?(힌트: 아주 작은 동물이다)   쥐?아니다. (필자도 쥐인 줄 알았다)더 작은 동물이다.바로바로...벌이다.   “코끼리 가죽이 얼마나 두꺼운데, 그까짓 벌을 무서워 해?”라고 생각하겠지만, 코끼리에게도 아주 약한 부분이 있다. 바로 코 안과 귀 뒤, 눈 주위, 입안 등이란다. 이 부위는 피부가 얇고 민감해서, 벌에 쏘이면 극심한 통증을 느낀다. 특히 벌이 코 안으로 들어가 쏘게 되면, 통증은 물론이고 호흡 장애까지 생길 수 있다.   최근 인간이 농장을 만들어 코끼리 서식지를 파괴하면서, 코끼리와 인간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영악한’ 인간들이 코끼리가 벌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농장 주변에 벌집을 매달아 철사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왼쪽 사진)효과는 아주 좋았다. 코끼리가 농장의 벌집이나 연결된 철사를 건드리면, 벌떼가 뛰쳐나와 코끼리를 공격했다. 코끼리는 기겁하며 도망치기 바빴다. 2017년 케냐에선 이 방법으로 코끼리의 침입을 80%나 막아냈다고 한다.게다가 농민이 벌을 키우는건 자연스럽게 양봉으로 이어졌고, 꿀이 생산되었다. 보츠나와에선 이렇게 생산된 꿀을 모아 팔면서, 여성 농부 1,500명 이상이 일자리를 얻었다고 한다.그야말로 일석이조에 일거양득(一擧兩得), ‘도랑 치고, 가재 잡고’다.   그러면 코끼리는 쥐를 무서워하지 않을까?그렇다,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그동안 우리는 어릴 적 잘못된 지식으로 세뇌를 당해, ‘코끼리가 쥐만 보면 펄쩍 뛰면서 달아난다’고 잘못 배웠다.왜 잘못 배웠을까?아마도 어릴 적 읽었던 〈쥐의 신랑 감 찾기〉또는 〈쥐 양반의 사위 찾기〉라는 동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위를 얻고 싶었던 쥐 아버지가 돌고 돌아, 결국 가장 훌륭한 신랑감은 같은 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거기에 코끼리가 등장한다. (아주 다양한 버전이 있는데, 코끼리가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코끼리는 쥐에게 "나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세지만, 작은 쥐가 내 코 속으로 들어오거나 발가락 사이를 갉아먹으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 나보다 쥐가 더 무섭고 센 존재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이 동화의 영향인지, 코끼리가 쥐를 가장 무서워한다는 이야기와 그림(오른쪽 그림)이 많았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사실 덩치가 산 만한 코끼리가 겁이 많은 쥐를 무서워할 리 없다. 하지만 동화나 잘못된 주장은 ‘약자도 강자를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위한 교훈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잘못된 사실에 입각해 동화를 지어내지 말고, 차라리 과학적 사실에 근거해 벌이 주인공이면 어떨까? 쥐보다도 작은 벌을 코끼리가 무서워한다는 건, 사실이면서도 더 극적이지 않을까?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당구장은 ➀ - 예전엔

당구장은 ➀ - 예전엔   필자가 고등학교 졸업할 당시, 당구는 성인의 상징과 같았다. 미성년자(고등학생까지) 출입금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성인이 되는 관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거의 모든 졸업생들은 담배와 술과 함께 당구를 시작했다. (이전부터 했어도, 공개적으로 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임)   당구장도 정말 많았다. 대로변이면 어디서나 2층의 당구장을 찾을 수 있었다. (지하엔 습기가 차서 공이 잘 굴러가지 않는다며 피했다) 누구나 워낙 흔하게 보다 보니, ※를 아예 당구장 표시라 칭하기도 했다.   당구장엔 늘 젊은 남성들로 늘 붐볐고, 담배 연기가 가득 자욱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당구에 미치는 경우도 많았다.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당구공이 왔다갔다 하며, 삼각함수를 공부한다는 농담을 했다. 하지만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재수생들까지 당구에 빠져, 재수를 망치는 경우도 흔했다.   당시에도 일본식 용어가 많았다. 마세이 오시 히까끼 무시 가라꾸 등 발음이 맞는지도 모르고 엉터리라도, 그런 단어를 말하면 마치 뭐라도 된 듯 여겼다. 지금은 쓰리 쿠션을 많이 하지만, 예전엔 주로 사구를 쳤는데 마지막은 쓰리 쿠션 또는 뱅크샷(가라꾸)으로 마무리해야 게임을 이길 수 있었다.   당구장 한쪽에는 꼭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한 테이블 정도 있었다.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화투패까지 들었다 놨다하는데, 눈빛이 다른 손님과는 확연히 달랐다. 돈이 걸리면 그렇게 되나 보다.   당구장에서 주문해 먹는 짜장면은 참 맛있었다. 여의도 같은 오피스 타운의 당구장에서는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당구장에서 짜장면으로 점심을 해결하며 겸사겸사 당구하는 모습도 많았다.   당시엔 당구 전용 장갑이 없어서, 작업용 목장갑을 끼거나 석회가루를 묻혔야 했다. 석회가루도 처음엔 석회가루가 들어 있는 주머니가 많았는데, 어느 순간 석회 덩어리가 등장해 그걸 만지면 석회가루가 손에 묻어나며 가루 날림을 줄여줬다. 당구를 하고 나면 당연히 석회 가루가 옷에도 묻었다. 초크 가루까지 합쳐져, 본의 아니게 당구를 쳤다는 표시를 냈다.   필자가 처음 당구장을 갔을 때만 해도 당구공이 두 가지였다. 국산공(코스모스공/막공)과 고급 벨기공이다. 게임 가격도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벨기공이란 건 ’벨기에공‘ 즉 벨기에에서 제작되어 수입한 공이란 뜻이었다. 제미나이에게 물어보니, 벨기에의 당구공 제조 전문 기업인 아라미스(Aramith / Saluc 사)에서 제작한 고품질 당구공을 의미한단다. (지금도 전세계 대표 당구공이라고 한다) 이후 빠른 속도로 모든 당구공이 벨기공으로 바뀌며, 굳이 구분을 하지 않아도 벨기공이 당연한 것이 됐다.   <다음에 계속>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자유문답방
커뮤니티 문답방
  • 게시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