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의 생각
미국인의 생각 미국 대선에서 예상을 깨고 트럼프 후보가 압승을 거뒀다.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나라가 해리스 후보의 승리를 바랐고 전문가들조차 ‘박빙에 초접전’이라고 예상했지만, 미국인의 선택은 트럼프였다. 조사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샤이 트럼프’가 아주 많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필자는 전문가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이유를 생각해봤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예전만 못하다는 데 있다. 한때 전 세계 GDP의 40%를 차지하던 미국의 경제력이 지금은 25% 밑으로 떨어졌다. 국민들이 그만큼 살기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내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동맹이니 뭐니 남의 나라를 도와주고 어쩌고 할 처지가 아니다. 따라서 국민들이 바라는 게 ‘미국 우선주의’다. 즉 눈치 볼 것 없이, 밀어붙이는 트럼프를 응원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인들도 과거의 영화를 잊을 순 없다. 세계 어디를 가도 ‘미국’ 하면 대우받고 알아줬다. 그만큼 미국이 ‘베풀었기 때문’이다. 부자지만 주변 사람들을 챙기며 존경받았던 ‘경주 최 부자’ 같은 느낌일 것이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그런 자부심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러던 미국인들이 ‘내가 먼저 먹고 살아야 한다’며 주변 사람들을 내치기 시작하면, 스스로 좀 부끄러운 마음도 들 것이다. 그래서 다수의 미국인들이 ‘샤이 트럼프’ 즉 ‘부끄럽지만 트럼프를 지지하며 외부에는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차마 말을 못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어떤 전문가는 트럼프 이전과 이후로 미국 위상과 국제 정책에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도 말한다.어쨌든 미국이 예전의 미국이 아니다. 남과 공존이나 배려는 옛날 얘기다. 동맹을 위한 돈을 안 쓰려고 한다.이것이 미국인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미국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즉시 ‘각자도생’의 길을 마련해야 한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식모
필자가 아주 어렸을 60년대 중반만 해도 식모가 참 흔했다.사글세를 살면서도 식모가 있을 정도였다. 당시엔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고, 곤궁한 집안이 많았기 때문이다. 집이나 고향에 있으면 아무리 뭘 해도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든데, 식모살이를 하면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도 고마웠던 시기다. 이들의 부모들은 입 하나 더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으므로, 부모가 어린 여식을 식모로 보내기도 했다. 빠르면 천지분간도 못하는 10살 정도부터 식모를 살았으니, 주인 아주머니한테 꽤나 야단도 많이 맞았다. 아이들한테 ‘식순아 밥 탄다’라며 놀림도 받았을테다. 어린 식모들은 비슷한 나이의 주인집 아이들은 대우 받고 좋은 옷 입고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서러움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당시 식모들은 급여도 없었는데, 다만 식모가 성장해서 시집가면 혼수나 결혼비용을 대줬다. 그러다 60년대 말부턴 식모 대우도 점점 좋아져야 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공장 등으로 취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70년대에 지은 아파트엔 부엌 옆에 작은 방 즉 식모방에 있었다. 반면 식모 잘못 들여서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집을 비운 사이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당시엔 옷을 훔쳐 튀기도 했다. 필자의 기억으론 80년대 초까지도 식모가 있었다. 필자의 외삼촌댁이 꽤 잘 살았는데, 그 댁에 식모가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다.하지만 이전의 식모와는 대우가 완전히 달라졌다.우선 용돈을 줘야 했다. 사실상 월급이었다. 필자의 기억으론 한 달에 3만원 정도는 줬던 것 같다. (80년 기준) 공장에서 죽어라 일해서 받던 월급의 절반이 넘는 금액이다. 하지만 방도 따로 하나 주고, 적은 노동에 의식주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쯤 휴일도 주고, 명절엔 고향 가라고 선물과 용돈을 더 줬다. 일종의 보너스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남아 있질 않는다고 했다. 거꾸로 이 정도 해 줄 여유가 없으면 아예 식모를 구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시대가 바뀌면서 식모가 일종의 직업으로 변모 발전(?)했다. 식모에게 지불하는 비용이 점점 늘자, 필요한 일만 하는 파트 타임 ‘파출부’로 바뀌었고 그 나이도 많아졌다. 지금은 옛날식 식모는 사라지고, '입주형 가사도우미'가 있다.그들은 주로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을 돌봐주고, 집안일을 해준다. 요즘 강남에선 보통 주 6일 근무에 급여가 월 500만원 정도라고 한다. 게다가 일을 잘하면 보너스도 준다. 함부로 대해도 안 된다. ‘이모’ 또는 ‘여사님’이라고 존대해야 한다.그런데 이런 대우로도 내국인은 구하기 힘들다. 최근 입국한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월 200만원이 넘는 급여를 주면서도 업무 범위가 딱 정해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세금 한푼 없이 월 500만원...여성들은 나이 들어도, 본인이 성실하고 건강하기만 하면 돈 벌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나이든 남성들이 부러워할 일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사라진 범죄
사라진 범죄 요즘 국제 보도를 보면 파리나 로마같이 유럽 유명 도시에 소매치기가 정말 극성이다. 아예 대놓고 훔쳐가고, 들켜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다. 심지어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문이 닫히는 순간에 채가는 경우도 있다. 영상으로 볼 땐 청소년들이 많은 게 특징이다.그런데 당국은 뭘 하는지 모르겠다. CCTV에 다 찍히고 증거도 넘치는데, 안 잡는 건지 처벌이 약한 건지 모르겠다. 지금 우리나라엔 소매치기가 사실상 사라진 셈이다. 있어 봤자 러시아 소매치기단 같은 외국인이나, 소매치기로 교도소 생활을 하다 출소해 또 소매치기하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예전엔 우리나라도 소매치기가 많았다. 당시엔 ‘쓰리꾼’이라고 했다. (일본말이나 파생어인 줄 알았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소매치기'의 비표준어’라고 나온다) 몸을 고의로 부딪히면서 주의를 돌려 속주머니나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빼가는가 하면, 몰래 핸드백을 열어 지갑을 훔쳐가는 경우가 많았다. ‘안창따기’ 혹은 ‘밑창따기’ 같이 예리한 면도칼을 사용하여, 남성의 상의를 기술적으로 찢거나 여성 핸드백의 밑창을 찢어 훔쳐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한때 소매치기를 막기 위해 핸드백에 동전을 깔고 다니란 캠페인도 있었다. 밑창이 따이면 동전이 우수수 떨어지며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한편 만약 어떤 사람이 소매치기 당하는 걸 눈치채고 소리를 지르면, 그 칼로 얼굴을 그었다는 설이 파다했다. 그래서 당시 소매치기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꽤 활동하던(?) 소매치기는, 2000년대에 들면서 급격히 줄어든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대부분 신용카드를 사용하면서, 현금을 안 가지고 다니기 때문이다. 기껏 훔쳐봤자 지갑엔 돈이 별로 없었다. 요즘은 아예 현금 없이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따라서 소매치기 해 봤자, 남는 게 없다. 괜시리 신용카드 잘못 사용했다간 더 큰 사달이 난다.또 다른 이유는 CCTV다. 버스나 지하철 쇼핑센터 어디에나 CCTV가 주시하고 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된다.하지만 특히 지방의 전통시장 같은 곳엔 소매치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노인들이 현금을 가지고 다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소매치기가 사라지면서 또 다른 범죄가 늘겠지만, 대중교통 이용할 때 맘 놓고 있는 것만도 좋아진 세상이다. 이런 걸 보면 우리나라는 치안이 꽤 좋은 나라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사라진 낭만 캠퍼스
사라진 낭만 캠퍼스 필자가 고교시절, 대학생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대학생이 되면 뭐 하고 놀까’를 늘 생각했었다. 당시 대학가요제 여파로 그룹사운드(밴드)가 유행이었는데 이를 꿈꾸기도 했었다. 이를 두고 좋게 ‘낭만’이라고 했고, 그래서 대학 캠퍼스를 ‘낭만이 가득한 캠퍼스’라고도 칭했다. 당시엔 실제로 대학생이 되면 공부를 안 했다. 만날 술 마시고 기타 치며 놀러 다녔다. 돈이 어디서 났는지, 방석집이나 대폿집은 늘 대학생들로 붐볐다.특히 1980년 전까지만 해도 학점이 절대평가라 학점 걱정 없고, 따라서 졸업 걱정도 없었다. 심지어 어떤 교수는 시험 답안지를 선풍기로 날려서, 가까운데 떨어진 시험지부터 좋은 점수를 줬다고 했다. 시험지에 답을 많이 적으면 무겁기 때문에, 바람에 멀리 날아가지 못한다는 우스개소리였다.하지만 선진국에선 대학 입학은 쉬워도 졸업은 어렵기 때문에, 대학 가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거꾸로 간다는 비판이 늘 있었다. 대학 교육이 엉터리라는 지적이다. 바로 이때 ‘대학교육 정상화 방안’가 등장했으니, 바로 1980년 신군부에 의해서였다.이들은 대학생들이 너무 공부를 안 하기 때문에, 대학에서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등장한 방안이 ‘졸업정원제’와 ‘상대평가제’다. 입학 인원을 30% 늘이되, 졸업할 땐 30%를 탈락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상대평가제를 도입해 철저한 성적 관리를 하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사교육의 원흉인 대학 본고사를 폐지하고 학력고사와 내신으로만 전형하면서, 모든 사교육을 금지시켰다.너무나 급작스런 조치에 학교와 학생 모두 당황했고, 재수 학원을 제외한 모든 학원은 문을 닫아야 했다. 지금 같으면 난리가 났겠지만, 무시무시한 군부 독재라 가능했다. 당시 대학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걸 막으려 이런 정책을 도입했다고 비난했다. ‘대학교육 정상화 방안’과 관계없이 민주화운동(데모)은 늘어만 갔고, 졸업정원제나 상대평가제와 관계없이 모두 무사히(?) 졸업했다. 과거에 비하면 지금 대학 캠퍼스 분위기는 살벌(?)하다.이념이나 총학생회엔 관심이 없고, 데모도 낭만도 없다. 혼자 점심을 먹는 학생들이 절반이다.2학년 되면 벌써 취업 준비를 한다. 좋은 곳에 취업하려면 성적이 중요하니, 평소 학과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이곳은 40여년 전만 해도 공부와 담 쌓고, ‘낭만’을 노래하던 대학 캠퍼스였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가슴이 메는 유서
가슴이 메는 유서 지난 9월, 사채업자들의 협박을 못이기고 스스로 세상을 떠난 30대 싱글맘 A 씨가 남긴 유서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빌린 건 수십만 원 정도가 대부분이었는데 A씨는 말도 안 되게 많은 금액을 갚으라는 협박에 시달렸다. 돈을 갚기로 한 시간보다 1분이 늦을 때마다 10만 원씩 더 내라는 압박도 받았다.사채업자들은 심지어 A씨는 물론 가족과 지인들에게도 쉴 새 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해댔고, A씨 딸이 다니는 유치원에까지 전화했다. A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채업자들은 불법 추심을 멈추지 않고, 남은 가족에게 전화해 A씨 대신 돈을 갚으라며 위협했다.정말 악랄한 놈들이다. 그런데 A씨가 남긴 유서엔 구구절절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고스란히 남겨있다.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담긴 문장이 있다.‘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보는 너의 얼굴이, 목소리가, 웃음이, 장난치는 짓궂음이 하나하나 모든 게 대못처럼 박힌다. 주말 동안 먹고 싶어 했던 빼빼로, 젤리 직접 전해줄 수 없어 정말 미안하고, 사랑한다, 내 새끼’라며 사랑한다는 말을 끝도 없이 적었다.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도 홀로 자신의 어린 딸을 돌보던 아버지에게는 ‘아버지가 끝까지 눈에 밟혔다’며 ‘철없는 선택을 해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정말 너무나 안타깝고, 유서 한 문장 한 문장에 가슴이 멘다.유서라는 게 다 슬픈 내용이겠지만, 이렇게 가슴에 와 꽂히는 유서가 또 있을까 싶다.특히 A씨가 필자의 딸과 비슷한 연령대일 것 같아 더욱 와 닿는다.그런 상황에서도 딸에게 얹혀 사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떨까? A씨도 사채가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얼마나 궁했으면 사채를 썼을까. A씨의 딸에겐 엄마가 돈 벌러 미국에 갔다고 했단다.자세한 사정을 모르니 더 이상 뭐라 할 수가 없다. 악랄한 사채업자들에 대한 경찰 조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전에 공권력이나 정부의 도움을 받기는 어려웠을까?사정을 알리면 주변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을까? 더 이상 이런 일이 없는 세상이 되길 바랄 뿐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신박한 김밥축제
신박한 김밥축제 기초 지자체마다 축제 경쟁이다. 지자체 단체장들은 축제의 성공 여부에 자리를 걸 정도다.하지만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고 성공적인 지역 축제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그들만의 축제로 끝나기 일쑤다. 그런데 최근 기발한 발상 '한방'으로 대박이 터진 축제가 있다.김천시가 지난 26~27일 주최한 '제1회 김천김빕축제'다. MZ세대를 대상으로 ‘김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김밥천국’이라는 답변이 상당수를 차지한데 기인해 김밥축제를 기획했다고 한다. 최근 김밥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K-푸드이긴 하지만,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김밥을 먹으려고 일부러 김천을 찾을까 싶었다. 그래서 김천시는 2만명 방문을 예상하고, 김밥은 1만명 분을 준비했다고 한다, 말이 1만명 분이지 실로 엄청난 양이다. 한 줄 길이를 20cm만 잡아도, 이어 붙이면 도합 2km이 이른다. 그이 따른 재료의 양도 엄청났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 방문객 2만명의 무려 5배인 10만명이나 찾아와서, 김밥을 못 먹고 간 사람이 다수라고 한다. 김천 인구가 15만명인데 이틀동안 10만명이 방문했다니, 축제기간 동안 김천시에 얼마나 사람들이 붐볐을지 짐작이 간다. 게다가 김밥을 담아낸 접시가 뻥튀기였다. 김밥도 먹고 뻥튀기도 먹고 환경도 보호하고 재미도 있고... 정말 참신한 아이디어다. (사진 왼쪽)김밥축제 마스코트 '꼬달이'도 인기였다고 한다. (사진 오른쪽)김밥 종류도 흔히 접하는 야채김밥이나 치즈김밥 또는 참치김밥 같은 게 아니라, 오단이김밥, 톳김밥, 다담김밥, 사명대사호국김밥, 지례흑돼지김밥 등 다양한 김밥이 판매됐다. 그리고 깁밥을 반줄씩 판매해, 다양한 김밥을 맛볼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정말 잘 준비된 즐거운 축제였다는 평이다. 다른 지자체들도 잘 기획하여, 특색있고 준비된 지역 축제들이 성황리에 열리길 기대해 본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