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탁칼럼 | 식모
24-11-11 10:07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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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아주 어렸을 60년대 중반만 해도 식모가 참 흔했다.
사글세를 살면서도 식모가 있을 정도였다. 당시엔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고, 곤궁한 집안이 많았기 때문이다. 집이나 고향에 있으면 아무리 뭘 해도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든데, 식모살이를 하면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도 고마웠던 시기다. 이들의 부모들은 입 하나 더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으므로, 부모가 어린 여식을 식모로 보내기도 했다. 빠르면 천지분간도 못하는 10살 정도부터 식모를 살았으니, 주인 아주머니한테 꽤나 야단도 많이 맞았다. 아이들한테 ‘식순아 밥 탄다’라며 놀림도 받았을테다. 어린 식모들은 비슷한 나이의 주인집 아이들은 대우 받고 좋은 옷 입고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서러움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당시 식모들은 급여도 없었는데, 다만 식모가 성장해서 시집가면 혼수나 결혼비용을 대줬다.
그러다 60년대 말부턴 식모 대우도 점점 좋아져야 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공장 등으로 취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70년대에 지은 아파트엔 부엌 옆에 작은 방 즉 식모방에 있었다.
반면 식모 잘못 들여서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집을 비운 사이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당시엔 옷을 훔쳐 튀기도 했다.
필자의 기억으론 80년대 초까지도 식모가 있었다. 필자의 외삼촌댁이 꽤 잘 살았는데, 그 댁에 식모가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전의 식모와는 대우가 완전히 달라졌다.
우선 용돈을 줘야 했다. 사실상 월급이었다. 필자의 기억으론 한 달에 3만원 정도는 줬던 것 같다. (80년 기준) 공장에서 죽어라 일해서 받던 월급의 절반이 넘는 금액이다. 하지만 방도 따로 하나 주고, 적은 노동에 의식주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쯤 휴일도 주고, 명절엔 고향 가라고 선물과 용돈을 더 줬다. 일종의 보너스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남아 있질 않는다고 했다. 거꾸로 이 정도 해 줄 여유가 없으면 아예 식모를 구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시대가 바뀌면서 식모가 일종의 직업으로 변모 발전(?)했다. 식모에게 지불하는 비용이 점점 늘자, 필요한 일만 하는 파트 타임 ‘파출부’로 바뀌었고 그 나이도 많아졌다.
지금은 옛날식 식모는 사라지고, '입주형 가사도우미'가 있다.
그들은 주로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을 돌봐주고, 집안일을 해준다. 요즘 강남에선 보통 주 6일 근무에 급여가 월 500만원 정도라고 한다. 게다가 일을 잘하면 보너스도 준다. 함부로 대해도 안 된다. ‘이모’ 또는 ‘여사님’이라고 존대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대우로도 내국인은 구하기 힘들다. 최근 입국한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월 200만원이 넘는 급여를 주면서도 업무 범위가 딱 정해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세금 한푼 없이 월 500만원...
여성들은 나이 들어도, 본인이 성실하고 건강하기만 하면 돈 벌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든 남성들이 부러워할 일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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