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부곡
노오란 장미꽃을 한 송이씩 망사로 싸서 만든 화려한 꽃다발을 가을 성큼 다가와 단풍 곱게 물든 오솔 길을 지나 아버지 계신 곳에 꽂아 드리니 마음 한 구석 애잔히 자리 잡고 있는 옛 사랑이 물밀 듯 밀려온다. 평생 근검절약하시고 부지런하시며 속 깊은 아버지가 하늘나라 가신 것이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 벌써 18주기가 되었다. 어쩜 그리도 빠를까! 한 바퀴 더 구르고 나면 나도 한 겨울에 서 있게 되는 건가?11월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배가 많이 아프다 하셔 119에 실려 가셨는데 위에 구멍이 뚫린 ‘위천공’이란 진단을 받고 촉을 다투며 급하다고 하여 한밤중 수술 동의서에 싸인을 하고 나니 맥이 풀리고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했다. 어두운 밤 길고 길게 느껴지던 셀 수 없는 시간을 헤아리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수술을 잘 마쳤다며 제거한 부위를 직접 보여주니 두려움이 확 밀려오고 한 동안 우울하여 감정을 추수 릴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올라오신 아버지 몸을 만져 보니 바짝 마른 몸과 거친 손! ‘어느새 이렇게 늙으셨나?’ 속이 아려왔다. 며칠 동안 조금씩 회복이 되어 한시름 놓았는데 어쩐 일인지 별안간 상태가 안 좋아지시더니 수술 보름 만에 길고 긴 이별 여행을 하게 되었다. 임종 순간 하늘도 서러웠는지 11월 중순인데 별안간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천지개벽 할 것 같은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게 쳐 대며 대낮인데 온 세상이 깜깜해져 나도 한참을 ‘꺼이꺼이’ 통곡을 했다.어릴 때 나는 아버지 배 위에서 춤을 추고 재롱을 부렸다. 노래하라 하면 노래하고 춤추라 하면 춤을 추고... 말씀이 별로 없으시고 무뚝뚝하셨지만 아버지는 온 정성을 쏟으셨다.병원에 입원하여 초등학교 입학식 참석도 못하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는 다칠세라 깨질세라 전전긍긍하시며 아침이면 씻겨주시고 머리도 감겨 주시며 양 갈래로 머리를 땋기도 하고 말아 올려 주기도 하며 뿌듯해 하셨다. 엄마는 머리를 잘 만지지 못한다고 핑계를 대시며 귀밑 2센티 단발머리 되기 전까지 아버지는 나의 전속 미용사이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자상한 아버지 사랑이라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온 가족 월미도 해변으로 놀러가 아버지가 따라 주던 처음 맛보는 사이다에 코가 찌릿하여 깜짝 놀라 호들갑 떨던 기억도 나고 가끔 영화의 거리 충무로에 데리고 가서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보여 주시고 짜장면도 사 주시고 그런데 ‘다 못 먹지?’하며 짜장면을 덜어 가시면 속으로 얼마나 아깝던지... 다 먹을 수 있는데.. 그 짜장면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맛 참으로 행복했던 기억으로 그득하다. 예전엔 아버지 밥상을 따로 차려 드렸는데 아버지 밥상에는 우리 상에 없는 굴비와 계란찜이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계란찜 두어 수저 드시고 우리 상으로 밀어 주시고 굴비도 뼈를 발라 우리 상에 슬쩍 올려 주시면 우리는 신이 나서 맛나게 나누어 먹던 기억도 새롭다.그러던 1960년대 어느 날 아버지 사업이 크게 망하면서 집안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번 씩 많은 손님들이 오셔서 불고기 파티를 했었는데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우리가 살던 집까지 팔아 빚 정리를 하며 아버지는 큰 충격으로 긴 시간 칩거 생활을 하시게 되었다.다행이 생활력 강한 어머니는 이에 굴하지 않고 쌀과 연탄을 파는 가게를 내셨고 나는 졸지에 부잣집 딸에서 가게 집 딸로 변신하게 되었다.어느 날 엄마가 천식으로 숨이 차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데 연탄 주문이 들어와 연탄 배달을 하게 되었다. 연탄집게를 양 손에 들고 연탄을 2장씩 나르는데 세상 태어나 이렇게 힘든 일을 처음 해 본 나는 어찌나 힘이 들던지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연탄 100장을 2장씩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왔다 갔다 하는데 그 길이 왜 그리 멀고도 먼지... 그 느낌 지금도 생생하다. 나중에 아버지가 아시고 연탄 팔지 말라고 불처럼 화를 내셔서 연탄 가게는 문을 닫게 되었지만 그 덕분인지 나는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 되었다.아버지는 몸이 몹시 날래고 빠르신데 나는 몸이 허약하고 비실거린다고 새벽마다 모래주머니를 내 다리에 채우고 함께 달리기를 하셨다. 운동 선수 훈련하듯 강도를 높이며... 지금도 그때의 힘들었던 순간과 신선한 공기가 새록새록하고 그 덕인지 건강은 많이 좋아졌다. 사실 겁 많은 나는 아버지가 많이 무서웠었다.청춘 시절은 사춘기와 가난이 함께 뒹글다 보니 독일 철학자 비판 정신을 가졌던 ‘쇼펜하우어’ 염세주의에 빠져 인생무상 삶의 허무를 운운하며 깊은 고통의 수렁 속을 헤메었고 그때부터 아버지와 대화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철이 좀 들고 나서야 남동생 내외와 함께 사시던 아버지를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드릴까 생각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진지를 차려 드리기로 했다.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흰 쌀밥에 불고기를 차려 드렸더니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신다. 눈물의 보릿고개를 넘어온 옛 어르신들에겐 흰 쌀밥이 최고였다. 가끔 흰 바지를 빨아 햇빛에 널어놓고 하얀 신발도 닦아 드리고 다림질도 해 드리면 며느리는 안 해 준다고 은근 슬쩍 역성들어 달라고 하신다. 나는 딸이라 해드리는 거라고 하며 용돈을 두둑이 드리면 아버지는 금방 신이 나셔서 친구들 커피나 사 주어야겠다고 딸 자랑하러 가시곤 했다.내리 사랑 부모 마음은 나이 먹고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지만 많은 세월 지나고 보니 애틋한 기억이 마음 깊이 사무쳐 후회가 몰려오고 생각할수록 불효했던 것들이 자꾸 생각나 죄스럽고 마음이 무겁다.아련한 추억이 많이 쌓인 아버지와 지내온 오랜 시간은 그리움도 더 깊게 한다.낙엽 품은 가을 속에서 나도 이제 한 조각 구름이 되어 인생길을 홀로 걷는다. 엄마가 걸어갔고 아버지가 걸었던 그 길을 나도 따라가고 있다. 어릴 적엔 부모 사랑으로 꽃길인지 자갈밭인지 알지도 못하고 걸어갔고 결혼을 하고 나서는 사랑으로 잘 교육받아 남편과 함께 자녀를 양육하고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거칠고 힘든 길을 구비 구비 잘 돌아왔다.사랑을 몸으로 실천해 주신 아버지 엄마 덕분에 지금은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정순익’ 아버지께 이 글을 바치며 평생 말해보지 못한 “아버지~ 사랑해요!!”아버지와 소소한 추억을 내 인생 끝자락까지 기억하며 그리어 본다
<인터뷰> 30년간 '봉사'로 살아온 가수 - 태연아
[묻는다일보 객원기자=안현희] 열정, 상상력, 진실함이 묻어나는 늦깍이 가수 태연아 어려서부터 노래를 하고 싶어서 갈망하던 그 꿈을 이루고 다시 태어난 아이처럼 흥분하고 수줍어하는 그를 만났다. 어린시절 내 고향 한겨울에도 봄빛이 가득하고 바닷가 들녁엔 보리 싹과 쪽파가 겨울철내내 파릇하고 11월부터 춘삼월까지 장흥땅 어딜가도 붉은 동백꽃을 감상 할 수 있는 정남진 장흥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외할머니께선 그 옛날 약국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자랐다. 약사를 하신덕에 항상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어려서부터 어떤 가요도 따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노래를 해야지 하면서 꿈을 키웠어요. 그런데 꿈을 이루기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을 친구처럼 동행하면서요. 그 친구가 봉사였습니다. 저는 봉사활동은 나눔 그 자체이고 서로가 공유하며 함께 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봉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대한 적십자를 통해 내 이웃분들게 작게나마 25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수줍게 말한다. 노래는 어떻게 선곡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번 음반은 제가 너무 큰 애착을 가지고 찾았어요. 정남진연가는 제 타이틀곡 인데요. "정남진이란, 서울의 정남쪽에 있는 나루터이다. 서울 광화문의 도로 원표를 기준으로 전남 장흥군 관산읍 신동리518-15번지 정남진 좌표점입니다. 정남진 하늘아래 억불산 며느리바위 무슨 사연있었길래 저리도 말이 없을까 편백숲길 연인들은 천년사랑 꿈을 꾸는데 장흥아가씨 말래길 님 마중가네로 시작하는 제 노래가사랍니다. 제가 태어난 곳이며 지금도 저의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기도 합니다. 태연아 가수가 본 가수상은? 음악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어려서부터 선배님들이 만든 좋은음악을 들으면서 꿈을 키웠죠 그것이 지금껏 애타게 부르고 싶었던 가수의 꿈을 안고 살아 왔어요 그것이 원동력이 되고 힘이 되었고요. 음악은 귀로 듣기도 하지만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듣는사람 마음도 제가 알아야 하구요 제노래를 듣고 조금이나마 행복과 위안을 드릴수만 있다면 저는 소원성취 한 것이지요. 앞으로 계획과 꿈?전 이젠 끝까지 매달려 볼거에요 절 찾았잖아요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요 전력투구 해야 겠지요 성과가 나와야 한다는 무모한 생각은 제에게는 없어요.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든지 나이가 많아서 하는 배부른 소리도 저에게는 없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포기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겁니다. 적어도 제 인생 끝까지 최대한 흔들림없이 고민하지 않고 바보같이 달리겠습니다. 고향 장흥 억불산 편백숲을 거니는 장흥아가씨를 노랫말에 담아낸 정남진 연가와 같이 연리목나무가 서로 다른 꿈을 안고 살아가듯이요. 안현희 dorothy0900@naver.com
<인터뷰>인권의 불모지에서 종자를 심는 심정으로 - 진관스님을 만나다
불교인권위원회는 언제까지 자기 육신을 정제해야 꽃 한 송이 피워 올릴까? 스님은 농성 중? 시인이시며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이신 진관 스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 인터넷 자료를 뒤지다 보니 스님은 인권운동뿐만 아니라 불교 기원 역사 연구에 관한 책 그리고 여러 권의 시집을 비롯해 다수의 출판물을 내신 분이셨다. 올해 첫 시집을 한권 낸 필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조계사 경내에 들어섰다. 여느 날처럼 조계사는 신자와 관광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스님께 도착 전화를 드리니 불교대학 뒤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로 오라고 하였다. ‘이건 머지?’ 지난여름 내내 떠들썩했던 천막 단식농성도 다 끝난 상황이고 총무원장도 바뀌어서 조계사에 봄이 다시 온 줄 알았는데 ‘스님은 농성 중?’ 물어물어 찾아서 당도해 보니 정말 2층짜리 컨테이너 박스 앞에 인터넷에서 얼굴을 익힌 진관스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반갑게 맞이하는 스님을 따라 2층 컨테이너 사무실로 올라 가 보니 스님은 법화경 사경을 하고 계셨다. 서예를 조금 공부한 터라 그런 광경들이 낯설지 않았다. 사무실은 스님의 책과 탁상이 하나 놓여 있는 임시 사무실이었다, 사방으로 걸려있는 법화경 필사본이 그나마 사무실 인테리어를 빛내고 있었다. 차 한 잔 건넬 여유가 없는 사무실이기에 곧바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권의 불모지에서 종자를 심는 심정으로(불교인권위원회 창립동기)기자 불교 인권위원회는 언제 창립하게 되었고 동기는 무엇이었는지요?스님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의 5.18 광주만행을 저지른 뒤, 불교계가 전두환을 지지하지 않은 것에 앙심을 먹고 그해 10월 27일 조계종 스님 153명을 연행하고 전국 사찰 5731곳을 일제 수색했던 법난 사건이 있었어. 그런 일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군부세력에 저항하면서 인권이란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 기자 그럼 그때부터 불교 인권위원회라는 것이 생겼군요.스님 아니지. 그때 당시는 인권이란 단어 자체가 생소했고 인권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때였어. 인권의 불모지에 이러한 저항활동이 불교계 인권운동의 종자 역할을 하게 되었지. 기자 초기 활동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스님 81년 5.18 광주사태와 10.27 불교법난 1주기 행사에 ‘대한 불교연합회’와 ‘승가 연합회가’ 전두환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시 낭송회를 가졌지. 기자 그렇게 총칼로 무자비하게 학살을 자행하던 시기에. 스님 용기가 대단하셨네요.스님 그때는 젊었고, 그 시기 마침 베트남에서 미 제국주의를 몰아내기 위해 스님들 40여 명이 분신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었거든. 나도 분신할까 하다가 너무 뜨거울 것 같아서 저항과 시위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지. 기자 스님, 어차피 스님 다비식 할 건데...스님 하하하... 그렇지. 그런데 그 온도가 2000 도를 넘는다고 해. 상상이 안가는 거야. 기자 10.27 법난 이후로 인권회복을 위한 저항 시위를 계속해 오신 거군요.스님 82년도에 4.19의거 기념 참배를 하면서 사회 인권에 참여하게 되었지. 그러니까 그때부터 가택 연금을 시키더라구. 그러다가 84년에야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면서 망자의 묘지를 끌어 안고 오열하는 선량한 중생들을 보면서 ‘수행자로 무엇을 해야 되나? 를 심도 있게 고민하게 되었지. 그러던 중에 84년 사회운동단체 문익환 목사가 의장으로 있던 민족통일국민회의에 감사가 되면서 적극 참여하게 되었지. 그 당시 아시안 게임이 있었고 88올림픽을 준비하는 시기라서 적극 사회 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지. 민족 통일 연합회 등과 연대해서. 기자 조계종 종단 네에서 지지를 받았었나요?스님 지지는 못 받았지. 정부와 사이가 안 좋으면 시끄럽고 귀찮아지니까. 종단에 지지를 못 받아도 대외 중생을 위한 인권 활동이니까 소신껏 밀고 나갔지. 그러다가 87년 박종철 사건시 조계사에서 타종을 하기로 했었는데 조계사 문을 걸어 닫아서 무산되기도 했었지. 그때 시위 당시 1000여 명이 연행되었는데 3명이 구속되었어. 그중에 하나가 ‘진관 스님’ 이었지. 기자 형량 좀 받으셨어요?스님 아, 근데 집행유예로 풀려났어.기자 어디 가서 ‘운동했다’고 명함 못 내미셨겠네요. 후 분신하기보다는 불타도록 뛰자(활발한 활동시기)스님 글쎄 말이야. 그러다가 1987년 6월 9일, 6.10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이한열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사망 했지. 본격적으로 6.10 항쟁에 가담 하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를 만나게 되었고, 성공회 담을 지선 스님이랑 넘어 들어가서 항쟁에 참여하기도 했지. 그로 인해 구속되었고. 석방된 후 광주 ’무빈 정사‘로 내려갔어. 광주는 각계각층에서 인권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불교계에서만 잠잠 하더라고. 그래서 90년 11월 20일 정식으로 불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하게 되었지. NCCK(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 위원회)와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을 모델로 활동을 시작했지. 그리고 그때부터 ‘분신하기보다는 불타도록 뛰자’라는 각오로 열심히 활동을 전개했지. 불교여성인권 위원회를 조직하여 ‘정신대 할머니 돕기 모금 운동’도 하고 인권침해 대책 위원회도 설립하고. 기자 그럼 불교인권상은 그때에 제정되었나요?스님 다음 해 91년 제정되었고, 제1회에 박종철 아버지에게 수여되었지. 기자 90년부터 불교 인권위원회가 정식 출범해서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고 보면 되겠네요.스님 그렇지. 그동안은 태동기였다고 보면 되고. 그 후로 종군기자 이 인모 북송 운동을 비롯해 장기수 인권운동을 펼쳤지. 덕분에 안기부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지.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그때 종단 내에서는 서의현 총무원장이 삼선을 하려고 해서 반대 운동에 적극 가담해서 무산시키기도 했지. 기자 본격적인 활동이 전개 되었군요.스님 95년이었을 거야. 일본 승려들이 장기수 송환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거야. 그래서 살펴보니 그때가 해방 50년 되던 해이더라고. 발 빠른 일본이 먼저 활동을 시작 한 거였지. 우리도 망월동에서 판문점까지 걷는 평화 행진을 했고 일본을 방문해서 행진을 교류하기도 했지. 그러다가 다시 또 구속이 되었지. 기자 이번엔 형량 좀 받으셨겠어요.스님 그랬지. 그런데 그때 대법원 항소이유서를 천여 편의 시를 써서 올렸어. 기자 아궁... 어떻게 읽으라고.스님 그게 문제가 아니었어. 천편이면 시집 20권 분량이야. 그걸 9명이 읽어야 돼. 만장을 복사해서 각 장마다 지장을 찍어야 하거든. 그때 지문이 다 사라져서 지금 지문이 안 나와. 기자 그야말로 살신성인이시군요.스님 그렇지, 98년도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도 구속되었는데 김영삼 정권 때와 다르게 종이와 볼펜이 지급되더라고. 서면 진술을 시로 백 편씩 써서 제출하곤 해서 교도소 직원들이나 판사 검사들이 애 좀 먹었지. 기자 스님 그런데 약력에 보니까 조선대 교육대학을 늦게 전공하셨던데요. 선생님 하셨었어요?스님 어. 어느 날 재판을 받다 보니 판사가 서울대 출신인데 서울대 법대 제자들을 재판 과정에 참관 시킨 거야. 그리고 그때 전교조 선생님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 되고 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전교조 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쳐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그때 박승희 전남대생 분신 사건이 있어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랑 어울리다가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을 들어갔지. 기자 그럼 전교조 선생님은 하셨어요?스님 조선대 교수님들도 적극 말리고 해서 그때부터 ‘만해 연구’를 시작했지. 기자 인권운동은 어떻게 하시고?스님 김대중 정권 들어서면서 정권이 안정되어 차츰 활동이 줄어들었지. 그다음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효선이 미선이 사건시 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촛불시위에 참여했지. 그때부터 촛불시위가 시작된 거지. 그밖에 광우병 문제, 장기수 북한이송 문제 등에 가담했고 국가보안법 폐지, 사형제 폐지 운동 등에 참여했지. 그러다가 지금은 소강상태이지. 인권운동은 상생 운동이다. 자비심과 보살핌 아래 모두 행복한 중생이길 기자 스님 그런데 언제부터 컨테이너 박스에 계신 거예요?스님 원래는 10월 27일 불교 법난 사태 진상 규명 대책 위원회 사무실이 있어서 그곳에 있었어. 그런데 그 건물이 헐리면서 조계사에서 컨테이너 박스를 임시로 설치해 준 거지. 기자 건물이 다시 지워지면 들어가시면 되겠네요.스님 그러면 좋지. 기자 밤에도 여기서 주무세요?스님 응, 그런데 세 시간 정도 자. 계속 글을 쓰거나 요즈음 법화경 사경하느냐고. 지금은 자판을 하도 두드려서 손목 증후군이 왔어. 팔을 쓸 수가 없어서 쉬고 있어. 기자 조계종 내에 다른 불교 인권 관련 부서가 있나요?스님 그런 부서가 있긴 하지만 한 번도 법난 사건에 참여한 적도 없고 진상 규명을 외쳐본 적도 없지. 내 것을 가로채 간 것이지. 씨앗은 진관이. 열매는 종단이 꿀꺽 한 것이지. 기자 스님, 인권은 상생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스님 자비정신과 보살심이 펼쳐지겠지. 조선의 꽃씨필자가 스님에게 받은 책 중에 ‘조선의 꽃씨’라는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l
문재인 정부의 외교적 대참사!
도대체 왜 이럴까?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어제 (1월 9일)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당시 한일 간 위안부 합의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2015년 합의가 양국 간에 공식 합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를 감안하여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필자는 지난 해 12월 29일 ‘문재인 정부, 이게 외교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 발표와 그 이후 진행상황을 보면서 정부 외교를 호되게 비판한 적이 있다.‘문재인 정부가 국민적 공분을 사게 해서, 기존 합의를 파기하는 동력으로 사용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외교는 냉정하게 봐야한다. 항상 상대방이 있기 때문이다.’라고도 썼다.게다가 불과 5일전에는 대통령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청와대로 모셔서 극진한 대우와 함께 대신 사과도 했다. 대통령은 “진실과 정의라는 원칙에 어긋나는 그런 합의였고, 또 절차적으로 피해자인 우리 할머니들의 의견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하며 재협상을 하겠다고 구체적으로 언급은 안했지만 그에 대한 의지는 재확인할 수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재협상은 문대통령의 중요한 대선 공약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게 뭔가? 재협상 요구를 하지 않겠단다! 문재인 정부에 묻는다. “두 주일 아니 5일 앞도 못 내다보고 외교를 하는가?” “이럴 거 같으면 국민적 공분을 사는 합의과정이나 이면 합의를 굳이 왜 발표해서 외교 사회에서 왕따가 되는 걸 자초했는가?” 물론 대선 공약이라고 다 지킬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현재의 한일관계 나아가 국제관계를 볼 때 재협상을 안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마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협상을 할 것처럼 하다가 느닷없이 안 하는 것으로 바꿨다는 점이다. 그것도 두 주일도 안 지나서....게다가 5일 전엔 위안부 할머니들까지 초청했는데, 그분들은 지금 정부에 배신감을 느낀단다. 차라리 그런 행사를 하지 말았거나 나중에 했어야 했다. 필자는 외교 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외교란 것은 국내 문제와 달리 항상 상대가 있다는 정도는 안다. 즉 국내 문제야 일다 저질러 놓고 나중에 수습할 수도 있지만 외교는 그렇지 않다. 협상의 산물이므로 비밀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번에 그 과정이나 이면합의를 홀라당 다 까발려서 국민적 공분을 사게 해놓고 그냥 넘어간단다. 당연히 상대방인 일본에서도 심기가 매우 불편할 것이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가? 외교가 어린 애들 간의 관계인가?덕분에 우리나라는 국제 외교가에선 비밀을 지킬 수 없는 나라로 불신의 낙인이 찍히면서 왕따가 될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것이야 말로 외교적 대참사다. 아마추어보다도 못한 이번 외교 참사를 엄중하게 다루어, 외교부 장관이 사퇴하는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한국인권대상 체육부문 양준혁 수상자와의 인터뷰
‘나눔과 비움은 다르지 않다’ 양준혁, 그는 현역 시절 삼성 라이온즈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하며 ‘양신’(梁神)이라는 위명을 떨쳤으며, 본인만의 독창적인 타격 폼으로 마치 만세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만세 타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010년 은퇴 이후에도 방송활동과 스포츠해설가로 활동한 양준혁은 야구선수로서 받았던 사랑과 관심을 다시 환원하고자 본인의 이름을 딴 양준혁 재단을 설립했다. 나눔을 통해 욕심 가득한 마음을 비우면 그 비움 속에 따뜻함이 가득 찰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앞으로도 소외 받은 이들에게 작은 손길이나마 베풀겠다고 말한다. Q. 야구재단 설립취지 및 소개를 해주신다면?양준혁 야구재단은 제가 야구선수를 하면서 받았던 사회적 관심과 사랑을 다시 환원하고자 2011년도에 설립하였습니다. 은퇴 후 사회에 나와서 보니 무관심 속에서 소외된 이웃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그래서 제가 야구를 통해 배웠던 것처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길로 걷는 법을 알려주고 도와주는 길잡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재단에서는 매년 전국단위의 초등학교 야구대회, 청소년 야구대회, 희망자선 야구대회 등을 개최해 야구를 통한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 나아가 한국 야구의 저변확대 및 한국 야구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서울, 시흥, 성남, 양주, 대구 총 6개의 멘토리 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는데 멘토리 야구단은 소속인원 모두가 사회 소외계층,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며 매주 야구훈련과 연 2회의 야구캠프 등을 통해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사회에 적응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멘토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Q. 야구 선수로의 회한과 팬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는지?은퇴한 후 사회에 나와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 과거의 나를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또 야구 해설을 하면서 새로운 기록이 생기고, 과거가 회상되고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그 때 더 잘할걸, 그 때 왜 그렇게 하지 못했나’ 하는 생각들이 들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무뎌지는 것 같더군요. 그렇지만 아직도 은퇴하는 그 날 팬들에게 썼던 편지 내용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그 당시 제 은퇴가 아쉬웠던 분들도 계셨겠지만, 팬 여러분들께 좋은 모습으로 기억될 때 떠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련 없이 은퇴를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팬 여러분들께 프로야구선수 양준혁이 아닌 일반인 양준혁으로 새로운 인생을 향해 또 다른 출발을 한다고 이야기 했었죠.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제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야구를 알리고 베풀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팬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는 많지 않지만, 야구를 향한 마음만큼은 현역 시절만큼 크고 계속해서 일반인 양준혁이 새로운 도전과 꿈을 향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라는 걸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Q. 한국인권대상 수상소감과 재단 경영철학은?일단 한국인권대상이라는 큰 상을 받을 수 있어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소외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야구를 통해 만난 아이들이 조금이지만 제 작은 손길로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기쁩니다. 처음 재단을 설립했던 것도 무관심 속 소외된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야구를 통해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민 했습니다. 그러다 운동을 하고 싶어도 비용 등의 문제로 어려워 하는 아이들을 봤고, 제가 야구를 통해 배웠던 정과 따뜻함을 그들에게도 나눠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풀고 베풀다 보면 그 따뜻함이 다시 돌아옵니다.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재단 경영 철학이 아닐까요? Q. 나눔과 비움이란?사전적 의미로 보면 나눔은 나눈다는 말이고, 비움은 비운다는 말이네요. 저는 그 두 개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기쁨은 나누면 나눌 수록 그 기쁨이 두 배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내가 가진 무언가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행복할 수 있다면 큰 보람이 있겠죠. 비움도 마찬가집니다. 나눔을 통해 욕심 가득한 마음을 비우면 그 비움 속에 따뜻함이 가득 찰 수 있으니 이를 통해 더 큰 행복을 채울 수 있겠죠 Q. 2018년의 계획, 비전은?올 한해도 재단과 함께 열심히 달렸던 것 같습니다. 제가 하는 일에는 단발성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2018년도에도 올해처럼 똑같이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양준혁 야구재단과 저 양준혁의 행보에 관심 가져주시고, 응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문재인 대통령 신년사에 기대를 걸어 본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보니 앞으로의 기대가 커진다. 필자가 항상 주장해 온 점들이 많이 언급됐기 때문이다. 이는 필자의 의견을 반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 많은 국민들의 생각이 어떻다는 걸 필자가 얘기했고 문재인 정부 역시 똑같이 느꼈다고 본다.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국민의 삶의 질, 즉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 보다 집중했다는 점이다. 적폐란 단어는 두 번 나왔고, 청산이란 단어는 한 번도 안 나왔단다. 즉 필자가 지금까지 계속 주장해 온 것처럼 ,지금 국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바로 경제다. 적폐청산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가 그렇다는 얘기다. 미래를 위해 남들과 경쟁하며 앞으로 나가기도 바쁜데 과거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이는 2017년 11월 3일에 필자가 쓴 ‘문재인 정부 메뉴판엔 과거만 있고 미래는 없나?’라는 칼럼과 2018년 1월 3일에 필자가 쓴 ‘문재인 정부, 경제가 우선 아닌가?’라는 칼럼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북핵문제라든가 여건이 되어야 한다거나 회담을 위한 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등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 역시 필자가 계속 주장해 오던 말이다.필자가 볼 때 다른 내용들은 예견했던 대목들이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필자는 2017년 12월 1일에 ‘1인당 국민소득 3만불 시대라고?’라는 칼럼을 썼다. 수출 호황으로 잘되는 업종에만 부가 집중되고 다른 곳은 경기가 너무나 나쁘다는 내용이다. 2018년, 집권 2년차를 맞은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와 기자회견에서 밝힌 대로, 모든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 체감할 수 있도록 하는 한 해가 되고 많은 분야에서 좋은 성과가 있기를 필자는 진심으로 기원한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