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아무도 몰랐을까?
정말 아무도 몰랐을까? 요즘 주변에서 온통 하는 얘기가 오스템임플란트 횡령 사건이다.재무관리팀장인 이 모씨가 상장사 사상 최대 금액인 2,215억원을 횡령한 내용이다. 금액이 계속 늘고 있어서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것도 불과 수 개월 사이에 벌인 일이다. 이 팀장은 지난 2020년에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유야무야 넘어간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이 회사의 최대주주이자 대표였던 최 모씨도 과거 횡령과 배임으로 물러났다. 이 회사는 횡령을 습관처럼 하는 모양이다. 다들 의구심을 갖는 게 ‘회사의 자본금보다 더 큰 금액을 횡령하는데 아무도 몰랐을까’ 하는 점이다. 이 팀장은 ‘윗선의 지시’라며 아랫 직원들까지 동원해서 서류를 조작했다고 하고, 윗선의 지시에 따라 횡령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회사 측에선 결코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부분은 수사에 따라 밝혀질 일이지만, 이 팀장이 횡령한 돈으로 금괴를 사 모으고 집을 사고 특히 주식을 해서 많은 돈을 날리기도 했다는 게 이상하다. 또한 아내와 처제 명의로 수십억원의 부동산을 사고 부친 집에 1kg 금괴 254개를 보관했다면, 가족들 역시 이상하게 생각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가족들은 한결같이 ‘몰랐다’고 주장한다. 가족들은 정말 몰랐을까?이 팀장이 그럴듯한 구실로 속여서 몰랐을까?의심은 가지만 돈을 주니까 그냥 넘어간 걸까?아무리 그래도 수십 수백억원이 왔다갔다 하는데 몰랐다는 것 역시 이상하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주주들이다.오스템임플란트 주식은 현재 거래정지상태지만 직전까지 주당 142,700원(액면가 500원)에 시가총액이 코스닥 19위인 우량주였다. 하지만 이 종목은 상장폐지가 될지, 아니면 상장폐지는 아니더라도 거래가 재개되면 대폭락은 분명하다. 주주들은 지금 빼도 박도 못하며 울고 있는 상황이다. 이 팀장의 단독 범행이든 공범이나 윗선의 지시가 있든, 최대한 회수하여 소액주주들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모색했으면 한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뭐 준다는 후보를 심판해야
뭐 준다는 후보를 심판해야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는 11일 한국기자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이재명, 윤석열 두 사람 다 병장 월급 200만원 준다는 걸 보고 '쌍 포퓰리즘'이라 생각했다"며, "지금 부사관 월급이 200만원이 안 되는데 병장 월급이 부사관 월급보다 높으면 어떻게 되나. 그리고 또 부사관 월급을 높이고 장교, 장군 월급 높이고 그런 것에 대해 입장을 밝혀야 되는데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안 후보는 이어 "뭐 나눠준다는 약속하는 후보 심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후보의 모병제 발언도 정말 위험한 발상이다. 급여가 올라가면 첨단 무기를 개발하거나 구입할 예산이 부족해진다. 그렇다고 국방 예산만 계속 늘일 수도 없다. 자연히 첨단 무기로 무장한 강군은 물 건너가게 된다. 게다가 늘어난 직업 군인이 전역한 후 받는 군인연금 역시 더 많은 세금으로 충당해 줘야 한다. 이 후보가 10~20대 남성 유권자에게 표를 얻고 싶은지 몰라도, 모병제라는 단어를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유다, 사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선심성 예산을 팍팍 플어 국고를 탕진했다. 문 정부에서만 국가부채가 404조2000억 원 증가했는데, 박근혜 정부(170조4000억 원) 이명박 정부(180조8000억 원) 노무현 정부(143조2000억 원) 등 역대 정권의 두 세 배에 달한다. 게다가 기초연금·아동수당 등 한 번 만들거나 올리면 되돌리기 어려운 의무지출 예산을 잔뜩 늘렸다. 다음 정권의 빚으로 만든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가 최근 각 부처에 앞으로 5년 간 재량지출의 10% 구조조정 등의 내용을 담은 ‘국가재정운용계획 수립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기존 사업 예산의 10%를 우선 삭감해야 신규 예산을 주겠다는 뜻이다. 자기들은 인심 얻으려고 펑펑 돈을 쓰고 나서, 다음 정부보곤 긴축하란다. 뿐만 아니라 이재명 후보는 입만 열면 돈 주거나 풀겠다고 한다. 당장 듣기엔 좋지만 그 많은 세금은 누가 내는지 빚내서 주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문 정부가 국고를 탕진했는데, 이재명 후보는 이를 본 받아(?) 나라를 빚더미 위에 올려 놓겠다는 얘기다. 안철수 후보가 "뭐 나눠준다는 약속하는 후보 심판해야 한다"고 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유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국민교육헌장‘을 되살리자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문(名文)은 무엇일까?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나랏 말쌈이...’로 시작되는 훈민정음 서문이다. 그 다음엔 ‘오 등은...“으로 시작되는 3·1 독립선언서이다.현대사에서 가장 명문으로 꼽으라면, 필자는 주저 없이 ’국민교육헌장‘을 꼽는다. 필자가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엔 누구나 외워야 했던 바로 그 ’국민교육헌장‘이다.국가의 미래가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 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 12월 5일에 발표했다. 벌써 53년이나 지났다.필자가 어렸을 땐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외웠다.단어 하나하나의 뜻은 알지만 전체적인 의미를 몰랐었다. 그런데 나이 먹고 우연히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단어 하나하나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필자도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감히 쳐다볼 수 없는 경지의 글이다. 누가 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한 사람의 작품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주옥같은 말과 철학에 고개가 숙여진다.’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비범한 문구로 시작하여, 한 단어 한 문장도 허투루 버릴 게 없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이어서 당시로선 파격적인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라는 말이 나온다. ‘인류공영’이라니... 지금은 당연시하지만, 당시엔 꿈도 못 꾸던 말이다.교육 헌장이지만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든가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말은 한번도 안 나온다. 오히려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라고 한다. 과학과 기술이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기술에 소질 있는 학생들은 공부를 억지로 할 게 아니라 기술을 연마하는 게 개인적 국가적 이익이라 생각했다. 공업고등학교가 생기고 기술 발전에 힘을 기울인 끝에, 세계기능올림픽에 10여년간 우승을 독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또한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 그리고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등 창조와 창의를 강조한 교육을 지향했다. 당시 주입식 교육과는 상반된 말이다.당시엔 냉전이 최고조의 시절이었지만, 이념적 단어는 ’반공‘이란 단어가 딱 한 번 나올 뿐이다. (’애국‘이나 ’민족‘이란 단어가 나오긴 하지만, 이념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애매하다) 또한 ’통일 조국‘이란 말도 나온다. 그리고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고 끝맺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53년 전에 이런 교육의 지표를 삼았으니 얼마나 대단한가.’국민교육헌장‘ 제정 이후 세계나 사회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약간만 손을 본다면 지금도 유효한 ’국민교육헌장‘이 될 수 있다고 본다.의사에게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있듯이, 교육자나 학생에게 이런 헌장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굳이 정치적으로 박정희 전대통령이 했다는 걸 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장수 하면 행복할까?
‘최후의 19세기人’ 즉 1800년대에 태어나 지금까지 생존한 유일한 사람이 타계했다. 지난 22일(현지시간) 기네스북에 최고령자로 검증을 받고 있던 필리핀의 프란체스카 수사노가 124세의 나이로 눈을 감은 것이다.할머니는 스페인 통치 시절인 1897년 남부 네그로스 지역에서 원주민으로 태어나, 14명의 자녀를 뒀다고 한다. 수자노 할머니는 지난 9월11일에 124번째 생일을 맞았으니, 우리 나이론 125살이다. 한 세기 하고도 4반세기를 더 살았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고 ‘역사의 산증인’이다.요즘은 장수시대라 증손주까지는 많이 보고, 가끔은 고손주도 본다. 그러면 수자노 할머니는 현손은 물론 그 다음까지 봤을 수도 있다. (현손 다음이 뭔지 모르겠다)앞으로 ‘100세 시대’니 ‘120세 시대’니 하는데, 과연 장수 하면 행복할까?(최소한 제정신에 대소변을 가리고 식사는 자기가 할 정도의 건강 기준에서 말함)실제 100살이 넘게 장수 하시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가장 힘든 게 ‘외로움’이란다.우선 배우자도 없고 친구도 없다. 자식들도 7~80대라, 자기 자신 건사하기도 힘들다. 자신을 부양하는 자식들에도 미안하다. 그저 숨이 붙어 있으니까 사는 것이다.물론 사람들이 모두 다같이 오래 살면 덜 외로울 것이다.하지만 사회적으로 자신을 부양해야 하는 자식 세대를 보면, 꼭 오래 사는 게 좋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 살면 그만큼 늙어서까지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 즉 100살 넘어서까지 산다면 80살 넘어서까지 경제생활을 해야 하는데, 쉽지 않는 게 현실이다. 직장인이 보통 60세 이전에 정년을 마주하기 때문이다.어쨌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건 행복하지만, 너무 오래 사는 건 가정이나 사회적으로 불행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필자도 젊어서는 ‘잘 살아야지’ 했지만,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폐 끼치지 말고 잘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지긋지긋하게 많았던 성금
지긋지긋하게 많았던 성금연말이 다가오면서 올해도 어김없이 기부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전주에는 22년째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도합 8억 원이 넘는 기부천사가 있다. 이름도 얼굴도 전화번호도 모른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약 7천만원의 현금을 놓고 사라졌다.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익명으로 기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연예계나 스포츠 스타들 중에도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필자가 어렸을 땐(또 ‘라떼’ 얘기다) 기부란 말은 사실상 없었다. 외국에서나 있는 말이었다. 어린 마음에 ‘기부를 왜 하지?’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어쨌든 필자가 어렸을 땐 학교에서 지긋지긋하게 ‘성금’을 거뒀다. 매년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야 했다. 당시엔 정말 못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정작 본인이 불우이웃인데도 성금을 내야 했다. 사실상 반 강제적이었다.성금은 ‘불우이웃돕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홍수가 나면 ‘수재민 돕기’ 성금을 거뒀다. 태풍으로 피해가 발생하면 ‘이재민 돕기’ 성금도 거뒀다.어느 해인가 가뭄이 심하자 농촌에 ‘양수기 보내기’ 성금을 모금했는데, 양수기를 보급할 때쯤 홍수가 나서 거꾸로 물을 퍼내는데 그 양수기를 사용한 적도 있었다,학교에서 학생은 물론 기업에서도 성금을 내야 했다. 사실상 준조세였다.성금은 주로 방송이나 신문사를 통해 모금했다. 방송의 경우 9시 뉴스 말미에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보내주신 분들입니다’라며 액수에 따라 차례대로 줄줄이 읽어줬다. 신문에도 액수가 크면 1면에 살렸다. 정부는 뒤에서 학교나 기업 단체에 대고 어느 방송 또는 신문사에 내라고 지시를 하며 분배했다. 성금의 백미는 ‘평화의댐’ 건설 성금이었다.1986년 정부는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는데, 그 물의 양이 어마어마해 한 번에 터트리면 수도 서울을 물바다로 만드는 수공(水攻)을 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 대응 댐으로 당시 6,0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공사를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정부는 극민들에게 불안감 조성과 애국심에 호소하며, 어마어마한 성금을 거뒀다. 당대 최고의 가수 조용필은 평화의댐 성금 모금을 위해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해야 했다. 진짜 필요한 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 댐은 잊혀져 갔다.지금은 강제적 성금은 없다.그나저나 과거에 이렇게 많은 성금을 내왔는데, 그 많은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불우 이웃’ 등 진짜 필요한 곳에 유용하게 쓰였는지, 중간에 줄줄 새면서 ‘잘사는 이웃’의 주머니만 채워 줬는지...
달력의 용도?
달력의 용도?어제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어떤 상점에 일력이 진열되어 있는 걸 보고, 반가워서 사진을 찍었다.(사진 참조) 불현듯 옛날 달력 생각이 났다.(또 ‘라떼’ 얘기임) 필자가 어렸을 때 흔히 달력이라 하면 월력과 일력이 있었다. 당시엔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라, 어떤 달력이든 환영을 받았다. 대개 좋은 종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발달하고 비용 절감 차원에서 달력을 많이 만들지 않아서, 막상 달력을 구하기 쉼지 않다. 특히 벽걸이형은 더욱 귀하신 몸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집에 하나쯤 걸어놔야 안심(?)이 된다. 사실 당시의 달력은 단순히 날짜만 보고 기록하는 게 다가 아니었다.70년대만 해도 주로 은행 같은 큰 회사에서 만드는 달력(월력)은 연말이면 몇 개씩 수집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 달력 종이로 새로 받아온 교과서를 쌌다. 당시 교과서는 표지의 종이질이 떨어지고, 특히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이래저래 손상이 잘됐다. 그래서 새 교과서를 받아오면 온 가족이 모여 달력 종이로 교과서를 정성껏 쌌다. 하지만 이 마저도 달력을 구할 수 있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집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일력 또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일력 종이는 습자지처럼 앏아서, 화장지 대용으론 최고였다. 당시엔 화장지를 사용하기 힘든 시절이라, 대개 신문지나 잡지책을 찢은 후 열심히 비벼서 사용했는데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따라서 얇은 일력 종이는 화장지 대용으론 최고였다. 하지만 하루에 한 장만 사용할 수 있으므로 가족간의 경쟁이 심했다. 그러다보니 미리 떼어가서, 일력은 대개 제 날짜보다 며칠씩 앞으로 가 있곤 했다. 어느 해인가 어머니께서 일력을 하나 더 얻어 오셔서, 그 해 일력은 늘 제 날짜를 가리킬 수 있었다. 이젠 교과서 표지를 쌀 일도 없고, 어느 화장실에나 화장지가 걸려 있다.그만큼 달력의 역할도 줄어 들고 있나 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