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과 잡곡
쌀과 잡곡 잡(雜)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러 가지가 뒤섞여 순수하지 않음’ 또는 ‘아무렇게나 막됨’이란 뜻이라고 한다. 따라서 잡(雜)이란 글자가 단어 앞에 들어가면 주(主)된 건 아니고 뭔가 부족하거나, ‘잡상인’ ‘잡 놈’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인다. 주와 잡으로 나누는 대표적인 사례가 곡식이다. 우리나라에선 주곡(主穀)은 쌀이고, 나머진 죄다 잡곡(雜穀)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옛날 얘기다. 요즘은 쌀보다 잡곡이 훨씬 비싸다. 주와 잡의 입장이 바뀌었다. 그 계기가 된 게 바로 ‘통일벼’의 등장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흰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가졌다는 의미였다. (물론 정부미처럼, 좀 덜 희긴 하지만 값 싸고 질 낮은 쌀밥도 있긴 했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선 감자가 주식이고, 생일이나 명절에서야 흰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필자가 살았던 동네인 흑석동만 해도 도시락을 못 싸 오는 학생은 없었지만, 당시엔 실제 쌀이 없어 도시락을 못 싸 와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학생들이 있었다. 또 어떤 학생은 쌀이 없어 대신 도시락으로 감자를 쪄왔는데, 속사정을 모르는 친구들이 달려들어 맛있다며 빼앗아 먹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자기 도시락이라도 주면서 빼앗아 먹었어야지) 어쨌든 예전엔 쌀농사를 그렇게 많이 지었는데도 늘 쌀이 부족했다. 종자의 문제가 컸다. 키가 커서 비바람에 약하고 병충해에도 약할 뿐만 아니라, 종자 자체가 수확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가 개발한 종자가 통일벼였다, 통일벼는 키가 좀 작지만 병충해 등에도 강하고, 무엇보다 낱알 수가 크게 늘었다. 정부는 열심히 통일벼를 홍보하며 보급했고, 쌀 부족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 덕에 ‘혼분식 장려운동’과 ‘도시락이나 식당에 30% 이상 잡곡을 섞어는지 확인하는 검사’도 사라졌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통일벼의 가장 큰 단점은 ‘맛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떤 이는 요즘 서울의 일부 동남아 음식전문점에서 맛볼 수 있는 ‘알량미(안남미)’가 생각난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쌀 하면 대한민국.계속된 종자 개량 등으로 어느 순간 통일벼는 자취를 감췄다. 요즘 다수의 가정에서는 잡곡밥을 먹는다. 건강을 위해서나, 밥맛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노인 일부는 아직도 흰쌀밥을 고집한다. 어릴 적 ‘흰쌀밥’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부러움 때문이 아닐까?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독어 불어를 왜 가르쳤을까?
독어 불어를 왜 가르쳤을까? 세계적으로 한국어 열풍이다.한류에 힘입어 일반인이 자발적으로 배우는 것은 물론,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배우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태국에선 대학입시 제2외국어 과목으로 중국어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학생들이 응시한다고 한다. 필자가 고둥학교 다닐 때 제2외국어 과목이 있었다.대부분 남고는 독일어를, 여고는 프랑스어를 선택했다. 학교에서 정하는 것이므로 학생들의 선택권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애써 배운 독일어를 60 넘어 평생 단 한 번도 써먹어 본 적이 없다. (지나면서 다 잊어버렸지만)프랑스어를 배운 학생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아까운 시간 낭비한 것 밖에 안된다.그럼 왜 배운 걸까? 사실 당시엔 일본어를 배웠어야 했다.일본이 가깝기도 하고 교류도 많으며, 당시 일본은 무서운 기세로 세계 경제를 잠식해 나가던 신흥 경제 강국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고등학교 때 일본어를 배웠으면 일본 가나 문자라도 익히고, 일본에 가서라도 최소한의 기본적인 대화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엔 반일감정이 남아 있어서, 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걸 꺼려했다. 또한 당시엔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어서, 중국어를 배우긴 힘들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차라리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하지만 귀한 시간에 아무 쓸데없는(?)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가르친다는 발상 자체가 한심스럽다. 교육은 백년대계란 말이 있듯, 잘못된 교육 정책으로 쓸데없는 제2외국어를 배워서 60 넘어 지금도 아까워하고 있다.태국처럼 교육당국의 전향적이고 실용적인 자세가 필요했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으~~ 채변봉투
으~~ 채변봉투 필자가 학교 다닐 때엔 일년에 한 번 학교에서 채변봉투를 나눠줬다. 정부가 국민건강에 적극 관여하던 시기였다. 봉투안엔 비닐 봉지가 들어 있었다. 안내 문엔 ‘깨끗한 종이 위에 변을 보고,소독저(당시엔 나무젓가락을 이렇게 칭했다)로 세군데 이상에서 변을 채취해 비닐 봉지에 넣고 묶으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그 채변 결과에 따라, 담임선생님이 해당 학생들을 앞으로 불러내 즉석에서 ‘회충약’을 먹였다. 앞에 나간 학들은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부끄러워했다. 똥이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지만, 보이기는 왠지 부끄러운 것이기도 하다. 또한 채변을 해서 가져가는 것 자체가 귀찮기도 했다. 따라서 채변봉투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있다. 어떤 학생은 개똥을 넣었다가, ‘사람에게선 나올 수 없는 기생충-개똥’이란 결과가 나왔다. (농담으로) ‘디지게’ 맞았다.어떤 학생은 친구 것까지 만들어 제출했다가, 그 친구랑 같이 회충약을 먹은 경우도 있었다. 가끔은 가족끼리 한 자녀의 똥으로 다른 자녀의 채변 봉투까지 만들어, 형제까지 같이 회충약을 먹은 경우도 있었다. 또 한 학생은 ‘변비’라는 쪽지를 대신 넣기도 하고, 또 다른 학생은 껌을 넣었다가 ‘이물질’ 판정을 받아 (농담으로) ‘디지게’ 맞기도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람 똥이 참 독하다는 걸 깨달았다.비닐로 싸고 종이로 싸도 냄새가 꽤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방에 도시락도 넣고 채변봉투도 넣어야 했으니, 참 기분이 묘했다. 요즘은 채변봉투는 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 년에 한 번 (또는 봄 가을 두 번) 구충제를 복용하라는 정부의 권고가 있었다. 지금은 농사 지을 때 인분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구충제(회충약)을 먹으라는 권유는 없다. ‘채변봉투’ 좀 지저분한 생각은 들었지만, 국가가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진행했던 좋은 사업이긴 했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생존의 기술
생존의 기술 필자는 요즘 ‘기러기 할아버지’ 신세다.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살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 혼자 살다 보니 할 게 참 많다. 밥 해먹고 치우고 설겆이는 기본, 청소에 빨래까지 혼자 다 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해야 할 일이나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걸 터득하게 되었다. 물컵을 여러 번 사용하는 건 기본이다. 사과를 깎으면서도, 껍질을 바로 음식물 쓰레기 모으는데 투하한다. 행주 대신 사용하는 1회용 행주티슈도, 밥 먹기 전에 한번 식탁을 닦고 식사 후에 뒤집어 식탁을 닦은 후 전기렌지까지 닦고 버린다. 저녁에 샤워하고 난 수건을 세탁기에 넣기 전에, 설겆이 할 때 가슴 가리개(행주치마 대용)로 사용한 후 세탁기에 넣는다. (행주치마가 있긴 한데 찾지 못하고 있음)식사의 경우 예를 들어 김치찌개를 사서 양파와 두부를 넣고 끓이면, 양이 늘어나고 맛도 좋아지면서 두 끼를 먹게 된다.설겆이도 기름기가 없어 그냥 수세미로만 닦는 것과 세제를 사용해 닦는 것을 분리해 닦는다.세탁기로 옷을 빨래를 해서 건조대에 널면, 마른 후에도 굳이 빨래를 걷어 개지 않는다. 빨래한 옷들을 그냥 건조대에 놔두고 하나씩 입는다. 누가 와서 볼 것도 아니고 혼자 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저분하게 살진 않는다. 설겆이나 청소도 제때 한다. 만약 누군가 불시에 와도, 빨래를 널어놓은 것 이외엔 깨끗하다. 이렇게 하다보니 어릴 적 생각이 난다.당시엔 따뜻한 물이 귀했다. 따뜻한 물을 얻기 위해선, 물을 받아다 연탄불에 데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엔 대야에 따뜻한 물을 대야에 담아, 세수하고 발 씻고 그 물에 걸레까지 빨아야 따뜻한 물이 수명을 다했다. 이런 식의 생활은 환경보호와 자원 절감 그리고 절약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생활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러기 할아버지’인 필자에게는 거창하게 ‘생활의 지혜’라고 하기 보다. 조금이라도 덜 움직이고 편하게 살려는 ‘생존의 기술’이 아닐까 싶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