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준연대에 거는 기대
낙준연대에 거는 기대 어제(1월 11일) 이낙연 전 총리가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면서 제3지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아울러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와 ‘원칙과 상식’ 소속 김종민·조응천·이원욱 의원 등 극심한 양당체제를 거부하는 정치인들이 연대 또는 합동창당의 움직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사실 현재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엉망이다. 정치도 사라졌다.양당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을 빼곤, 소위 중도라고 할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제3지대 또는 제3정당을 지지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정당의 사(私)당화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이 좌지우지하고 있고, 민주당엔 이재명 대표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또한 양당은 서로를 협력해야 하는 ‘파트너’가 아니라, 무조건 쓰러트려야 할 ‘적’으로만 규정하며 대치하고 있다. 동업자 정신이 사라진 지 오래이고, 대화와 협상이 필수인 정치가 실종됐다. 이준석 전 대표의 경우 대선과 지선 승리의 결정적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내부 총질’한다며 쫓아냈다. 윤 대통령은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이낙연 전 대표와 원칙과 상식 의원들은 당내에서 다른 의견을 낸다는 이유만으로, 개딸들로부터 ‘수박’이란 모멸감을 받아왔다,배신이니 뭐니 할 것 없이, 이들이 탈당하는 건 당연한 결과다. 당이 나가도록 떠밀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들이 어떻게 서로 협력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모두가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낙연 이준석 연대 즉 ‘낙준연대’에 대해 기대가 크다.쿠키뉴스가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6~8일 전국 만 18살 이상 남녀 1007명에게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준석 신당’ 13.9%, ‘이낙연 신당’은 8.7%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YTN이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지난 7~8일 전국 유권자 1002명을 대상으로 신당이 창당되면 어느 정당에 투표할지 조사한 결과, ‘이준석 신당’은 11%, ‘이낙연 신당’은 7%의 표를 받을 것으로 나타났다. ‘각자 도생’은 ‘같이 망하는 길’이라는 결과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두 사람이 합당 또는 공동창당을 하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각자 신당을 창당하더라도 연대는 충분히 가능하다. 예를 들면 총선에서 지역구별로 후보자를 한 사람만 내는 것이다. 각자 강점이 있는 지역에서 합동 공천을 해야, 그나마 당선 가능성이 생긴다. 양극단으로 망해가는 한국 정치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줄 제3지대에 거는 기대가 크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양키아줌마 (PX아줌마)
양키아줌마 (PX아줌마)필자가 어렸을 때 외화가 워낙 귀하다 보니 수입품이 엄청나게 비쌌다. 게다가 수입 금지 품목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제라면 사족을 못 썼다. ‘미제=무조건 좋은 상품’이었다. 그러다 보니 부자가 아니더라도 미제 물건 한 두 개쯤 사서 써보는 게 자랑이며 즐거움이었다.이때 활개를 친 사람들이 ‘양키(물건)아줌마’ 또는 ‘PX아줌마’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역시 대한민국 아줌마들은 대단하다)당시 우리나라에 주둔했던 미군이나 그 가족들이 미군 부대 내의 PX에서 사 가지고 나온 미국 상품을 웃돈을 얹어 우리나라 사람에게 팔면, 그 상품이 한두 단계 거치면서 양키 아줌마에게 흘러가게 된다. 그러면 돈이 없고 구두쇠였던 필자의 어머니까지도 가끔 그 물건을 구입하셨다.* 주공급원은 미군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들이었다. 미군 PX이므로 면세품이라 주한 미군이나 가족은 큰 부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직적 범죄가 아닌 한, 물건을 PX에서 사다 외부로 불법 판매한 미국인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말이 PX지, 기지 내 PX에는 지금의 우리나라 대형 마트처럼 없는 게 없었다.양키 아줌마는 커다란 가방에 물건을 넣어 갖고 집집마다 찾아다녔다. 하지만 너무 많은 양을 가지고 다닐 수 없어, 대부분은 주문 판매를 했다.하지만 엄연히 불법. 단속반에게 적발되면 갖고 있던 것 다 빼앗기고, 경찰서에 끌려가 벌금까지 물어야 했다. (가끔은 단속반이 물건만 빼앗고 그냥 보내주는 경우도 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그나마 다행이지만, 빼앗긴 물건이 어디로 갈 지는 다 알고 있다)그래서 (직접 보진 못했지만) 어떤 양키아줌마는 물건을 허리춤에 차고, 그 위에 한복 치마를 풍성하게 입기도 했다. 아무리 무서운 단속반이라도, 차마 여성의 치마를 들추진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한복 입는 여성들이 꽤 있었다)가장 인기 품목은 화장품이었다. (허쉬 초콜렛 같은 식품도 인기였지만, 잘 사는 집 아니면 언감생심이었다) 우리나라 사람과 미국인들의 피부가 다르기 때문에, 요즘 우리나라 부자들은 굳이 외국산 화장품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당시엔 국산 화장품의 질도 낮았을 뿐만아니라, 미제에 대한 환상으로 ‘콜드 크림’ 같은 미제화장품은 모든 한국 여성들의 동경이었다. 베이비 파우더 그리고 바셀린 연고(크림)도 많이 팔렸다. 남편이 원할 경우 양담배도 팔았다. (담배가 전매였던 시절이라, 양담배 팔다 걸리면 죄가 컸다)수입 자유화 이후 양키 아줌마들은 사라졌다.단속을 피해 억척같이 장사하며 아이들 키우던 아줌마들은 지금 잘 살아계신지 모르겠다.<묻는다이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자지러진 보충수업시간
자지러진 보충수업시간* 100% 실제 사건임필자가 고등학교 다닐 땐 보충수업이란 게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보충수업이 왜 필요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학력 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 낭비란 생각만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시 교사들의 부수입을 올리려 한 게 아닌가 싶다.어쨌든 고교 2학년 시절의 꽤 추운 날, 겨울방학 보충수업을 위해 여느 때처럼 등교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개를 데리고 교실로 들어왔다. 학교에 오는데 계속 따라오길래 보신탕집에 팔아먹으려고 데려왔단다. 순식간에 소문이 돌아 다른 반에서도 구경을 왔다. 개는 중형견보단 약간 큰 크기였는데, 척 봐도 어리바리하고 아무나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누군가 도시락으로 싸 온 밥을 떼어 주니 그 와중에 잘도 먹었다. 그 친구는 1교시가 끝나면 데리고 나간다며, 일단 교실 뒤에 묶어 놨다.1교시는 영어시간이었다.보충수업을 담당하시는 영어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경례를 위해 반장이 일어섰다. 그런데 그 반장의 구령이 좀 특이했다. 보통은 ‘차려 – 경례’ 라고 하는데, 그 반장은 “동작 그만”을 먼저 하고, ‘차려 – 경례’라고 했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당황하시는 경우도 있었다.이번에도 반장이 ‘동작 그만’을 먼저하고 ‘차려’ 하는 순간, 선생님은 당연히 ‘경례’인 줄 아시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아차’ 싶었다. 창피한 선생님은 고개를 숙인 채 갑자기 출석부를 열어 뭔가를 적으셨다.다시 반장이 ‘동작 그만’ 한 후 ‘차려’ 하는 순간, 이 선생님은 또 고개를 숙이셨다. 또 ‘아차’ 하는데, 여기저기서 학생들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선생님도 고개 숙인 채 더이상 할 게 없자, 웃으시며 ‘그만해라’ 하고 넘어가셨다. 학생들은 자지러졌다.그런데 수업을 시작하려던 선생님 눈에 이상한 게 들어 왔다.“잰 누구니?”바로 맨 뒤에 묶어 놓은 개를 보신 것이다. 이 개가 비어 있던 맨 뒷자리 책상에 앞발을 올려놓고 서서, 고개를 위로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 얼굴 사이에 개 얼굴이 있으니 얼마나 이상했을까? 선생님께서 너무나 당황하셨나 보다. 학생들은 자지러졌다. 들킨 것도 웃기지만, 개를 보고 ‘쟤’라니...선생님: 쟨 누구니?학생들: 개요선생님: 개가 여기 왜 있냐? 누가 데려왔어?그 친구: 제가요선생님: 학교에 개를 왜 데려 왔냐고?그 친구: 집에 아무도 없어서, 밥이라도 챙겨 주려고요.선생님: 그렇다고 교실에 두면 어떻게 하니? 밖에 묶어 놔라.학생들의 자지러진 폭소 속에, 그 친구는 멍청한 개를 복도에 묶어 놔야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수업이 2분쯤 늦게 끝났다. 이미 복도엔 많은 학생들이 모여서 웅성거렸고, 개는 사라졌다. 힘 좀 쓴다는 친구가 팔아먹겠다고 데려갔단다.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장면 중 하나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다용도 카바이트
다용도 카바이트필자가 어렸을 때, 포장마차를 비롯해 거의 모든 노점상들은 조명으로 카바이트를 사용했다. 전기보다는 덜 밝았지만, 나름대로 꽤 운치가 있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카바이트는 탄화칼슘(calcium carbide)이란 합성물질로, 원래 ‘카바이드’가 바른 말이지만 흔히 ‘카바이트’라고 부른다. 원래 열을 내는 공업용으로 발명했다.카바이트불은 촛불처럼 생겼지만 꽤 밝았다. 그리고 웬만한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다만 특유의 냄새가 났다.(몸에는 별로 좋지 않은 냄새였을 것 같다) 특히 다루기 쉽고 가격도 저렴해, 많은 사람들이 애용했다.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카바이트가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70년대 종로는 온통 학사주점이었고 막걸리집들이 가득했었다. 막걸리는 시간을 들여 스스로 발효가 되게 해야 제대로 된 막걸리 맛이 나는데, 당시에는 빨리 생산해 한 병이라도 더 팔려고 막걸리를 발효하는 과정에서 카바이트를 첨가했다. 돈 없는 청춘들은 싸구려 카바이트 막걸리라도 사 마셨다. 하지만 먹고 난 다음 날 어찌나 머리가 깨지게 아픈지, 안 먹고 싶은 술 1위였다고 한다.카바이트는 홍시를 빨리 숙성시키는데도 사용됐다.감이 홍시가 되려면 상당 시간이 필요한데, 기다리는 게 싫었던 사람들은 카바이트로 속성 홍시를 만들었다. 특히 카바이트를 사용하면 감 특유의 떫은 맛이 사라진다고 해서 더욱 애용되었다. 하지만 화학합성물질이 몸에 좋을 리 없었고, 지금은 퇴출되었다.지금은 일반인들이 카바이트를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하지만 조명으로는 꽤 쓸모가 있기 때문에, 전기를 사용하기 힘든 밤낚시나 야영 캠핑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사실 야외에선 전깃불 보단 카바이트불이 운치가 있긴 하다.다만 요즘 생산되는 카바이트 등에는 반사경이 붙어 있어, 예전에 흔히 사용하던 카바이트불의 형태와 좀 달라졌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레슬링은 ‘쇼’다?
레슬링은 ‘쇼’다?1965년 고 장영철 선수가 ‘레슬링은 쇼다’라고 한 발언은 당시 우리나라 프로레슬링계는 물론 국민들 가슴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았다.일단 그 발언의 상황을 검색해 보았다.1960년 경 천규덕과 장영철이 (부산)남포동 밤길을 걷는데 전파상 앞에 사람이 잔뜩 모여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뭔가 가보니, 일본 방송(부산엔 일본TV가 나왔다)에 역도산 선수가 미국 선수들을 가라테로 쓰러뜨리면 일본 관중들이 ‘환장’했다. 이 둘은 프로레슬링을 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나라 자생적 프로레슬링의 시작이었다.당시 거구의 선수들이 몸을 날리고 들어 메치는 장면에 국민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사실 장영철 선수는 지금 기준으론 일반인이지 거구라고 할 수는 없는 체격이었다. 다만 아마추어 레슬링을 했기에, 보다 화려한 기술을 선보였다) 특히 말레이시아가 지어준 장충체육관이 생기면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그런데 1965년 일본에서 맹활약하던 김일 선수가 국내로 들어오며 상황이 바뀌었다.김일은 귀국 이후 첫 이벤트로 극동헤비급선수권전을 열었다. 장영철의 상대는 일본에서 중상급 수준으로 알려진 오쿠마였다. 그런데 오쿠마의 새우꺾기 공격에 허리를 유린당한 장영철이 비명을 내지르자, 링사이드에 있던 장영철의 제자들이 경기장에 난입해 오쿠마에게 폭행을 가했고 난장판이 벌어진 끝에 경기는 중단됐다. 이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장영철이 "프로 레슬링은 쇼"라고 발언했다는 것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이 파동의 전말이었다.하지만 장영철은 "프로 레슬링이 쇼"라고 직접 말한 적이 없다고 억울해 했다. 장영철이 경찰 조사 과정에서 '프로레슬링은 특성상 반칙이 일부 허용되지만 여기에도 어느 정도 룰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한 것을 기자들이 '프로레슬링=쇼'라고 잘못 해석해 과장보도를 했다는 것이다.어쨌든 이 사건 하나로 장영철은 프로레슬링의 뒤안길로 사라진다.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잘 나가던 장영철은 졸지에 ‘배신자’ 비슷한 낙인이 찍혀버렸고, 프로레슬링계도 타격을 입었다.사실 ‘프로레슬링을 스포츠라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은 늘 있어 왔다. 너무나 쇼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스포츠 중 전적(몇 전, 면 승, 몇 패)을 밝히지 않는 유일한 스포츠 아닌가 싶다. 따라서 승패는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주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특히 10년 전쯤 방송된 MBC TV ‘무한도전’을 보면, 프로레슬링은 완전히 쇼였다. 화려한 공격일수록 공격을 받는 사람의 협력(?)이 더욱 중요해지고, 사전에 합을 맞췄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프로레슬링을 보면 연예인인지 레슬러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다.반론도 있다.레슬링 특성상 어느 정도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예를 들어 로프 반동을 했는데 상대 선수가 로프를 붙잡고 튀어나오지 않으면 경기가 안된다. 즉 어느 정도는 서로 맞춰 줘야, 게임이 된다는 얘기다. 즉 어느 정도의 룰에 서로 맞춰줘 가면서 경기를 한다는 의미다.필자 생각으론 많은 경기가 사전에 맞춰진 ‘쇼’는 맞는 것 같다.하지만 당시 모든 프로레슬링 경기가 ‘쇼’였을까?그러면 아무리 잘하는 선수라도 패전처리 역할만 해야 하나?경기에서 참패한 장영철이 ‘레슬링은 쇼다’라고 말하는 것도 좀 이상하다.쇼면 이겨야지 왜 참패를 당했을까?진검 승부에서 실력이 모자라 진 것 아닌가?요즘 프로레슬링은 사실상 사라졌고, 생존해 있는 유명 선수들도 없다..그러다 보니 ‘프로레슬링은 쇼’였을까 하는 의문을 풀 수 없게 되는 것 같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김일 선수는 박치기가 싫다고 하셨어~
김일 선수는 박치기가 싫다고 하셨어~우리나라 프로레슬링 역사에서 김일 선수는 빼고는 얘기가 안 된다.우리나라 프로레슬링은 장영철 등 국내파 선수들이 시작했지만, 전성기는 김일 선수가 활동했던 시기와 딱 맞아떨어진다.김일 선수는 씨름선수로 날리다가 일본으로 밀항해, 역도산 도장에서 안토니오 이노키 그리고 자이언트와 함께 3대 제자가 된다. ‘김일’ 하면 ‘박치기’다. 역도산은 김일에게 박치기를 전수해 주며, 특기로 삼으라 했다고 한다. 진짜 김일의 박치기 위력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역도산이 갑자기 사망하자, 이 세 제자가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이끌어 가게 된다.이때 우리나라에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의 간절한(?) 요청으로, 김일 선수는 한국으로 금의환향하게 된다. 장영철의 “레슬링은 쇼다” 사건이 있었지만, 김일은 출중한 실력과 일본의 친분을 활용해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높여 갔다. 특히 60년대 중반에 흑백TV 시대가 열리고 장충체육관이 완공되면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필자가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학기 초에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걸 작성해 제출해야 했는데, 거기엔 반드시 집에 있는 집기 등을 표시하게 되어 있었다. 필자가 국민학교 1학년 (1969년) 때만 해도, TV에 동그라미 치는 학생은 한 반(90명 정도) 중 5~6명이나 될까 싶었다. 그만큼 TV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만화가게에서 TV를 보던 것도 좀 지나서의 일이다.김일 레슬링을 하는 날이면 다방에 극장식으로 좌석을 배치했고, 사람들은 열광하며 시청했다. 그런 돈이 없는 사람들은 전파사 앞에 서서 구경해야 했다.김일 선수는 늘 갓이나 곰방대 호랑이 같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가운을 입고 등장했다. 대부분 상대방이 반칙을 하지만, 김일 선수가 박치기로 응징하며 통쾌한 승리로 끝난다. 특히 일본 선수들이 비열한 반칙을 할 땐 관중들이 흥분하다가, 김일 선수가 온몸을 날리는 박치기 한방에 관중들은 일본에 대한 서러움까지 풀어냈다. 가끔 서양 선수들은 오프너 같은 흉기로 김일 선수의 이마를 가격해 선혈이 낭자했다. 하지만 김일은 피가 철철 흐르는 이마로 박치기를 해 상대를 응징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승리하던 김일 선수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마저도 쇼라는 설도 있긴 하다)TV 중계할 때마다 김일 선수가 박치기할 땐 아나운서는 물론 관중들까지 모두 큰소리로 “박치기!”라고 한마음으로 외쳤다. 어떤 아나운서는 ‘김일 선수의 박치기는 핵폭탄급 세계 최고의 위력’라며 한때 박치기를 “원자 헤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감상 박치기만 못하자 ‘원자 헤딩’은 슬그머니 사라졌다.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김일 선수가 ‘코브라 트위스트’나 ‘넉사자 굳히기’ 같은 새로운 기술을 선보였다. 이 기술을 걸면 굳이 박치기를 하지 않더라도, 꼼짝없이 기권을 받아냈다. 하지만 호응이 시원치 않았는지, 얼마 후 박치기가 다시 등장했다.그러다 김일 선수도 노쇠하고, 후원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데다, 미국 WWF 같은 자극적인 프로레슬링으로 인해 한국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급속히 식는다.이후 김일 선수는 1989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선수 시절 후유증 등으로 약 20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사망했다. 김일은 생전에 “나는 정말 박치기하기가 싫었다”면서 “머리가 아프고 귀에서 종소리가 들린다”고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박치기가 너무 힘들고 아파서 ‘코브라 트위스트’나 ‘넉사자 굳히기’ 같은 기술을 했지만, 통쾌한 박치기를 기대했던 국민들은 시시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고통을 참고 박치기를 다시 한 것이었다.이렇게 국민들을 생각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일 선수는 세상을 떠났다.레슬링이 쇼든 아니든, 김일은 한때 국민에게 통쾌한 선물을 주었던 영웅이었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