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규덕과 송학수
천규덕과 송학수얼마 전 옛친구들과 만나 담소 중 프로레슬링의 송학수 심판 얘기가 나왔다.필자가 어렸을 때엔 프로레슬링이 정말 인기였다. 쇼든 아니든, 프로레슬링 중계하는 날엔 온 국민들이 모여 열광했다. 특히 김일 선수가 박치기로 상대를 제압할 때면, 여기저기서 온통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픈 경기에 등장하는 일본 선수들은 대개 교묘히 반칙을 하는데, 안타깝게(?) 심판은 이를 보지 못하며 관중들의 화를 돋웠다. 하지만 반칙을 참아내던 정의의 우리 선수들이 결국 승리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당시 당수 천규덕 거인 박송남 등의 선수들이 기억난다.그중 당수 5단이라는 천규덕 선수는 미남에 스타킹을 입고 나오는 게 캐릭터였다. 그의 당수가 얼마나 센지 링에 빨간 벽돌을 들고 나와 한방에 깨트리는 시범도 보였다. 그러자 ‘천규덕 선수가 당수 두 방이면 황소도 때려 잡는다’는 말이 있었다. 결국 어느 경기에 앞서 실제로 링 밖에 황소를 묶어 놓고 천규덕 선수가 당수로 때려잡는 시범을 보였다. (사진) 사람들은 정말 두 세방의 당수면 소가 쓰러질 줄 알았다. 그런데 왠걸...빨간 벽돌을 한방에 깨던 천규덕 선수의 무시무시한 당수로 아무리 두들겨 패도 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묶인 채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소가 불쌍했다.아나운서가 처음엔 하나 둘 세더니, 수 십 대가 넘어가자 세는 걸 아예 포기했다. 목소리에 힘도 빠졌다.천규덕 선수는 망신살이 뻗쳤다고 생각했는지, 죽어라고 당수를 날렸다. 백대가 넘어갔나...그러자 소가 서 있기 피곤했는지 슬그머니 앉았다. (풀썩 주저앉은 게 아니다)그제서야 천규덕 선수는 임무를 완수했다며 양손을 들어 보였지만, 관중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한편 당시 중요 레슬링 시합에서 심판은 늘 ‘송학수 심판’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져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원래 송학수 심판도 레슬링 선수였는데, 연습인지 경기 중인지 장파열을 당하면서 선수 생활을 접고 심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송학수 심판의 특징은 대머리였는데, 가끔 선수들 틈에서 고생하며 웃음을 주기도 했다.(사진- 솔직히 송학수 심판이 맞는지 정확하지 않음)레슬링에선 상대의 양어깨가 매트에 닿은 후 심판이 세 번을 내리쳐야 이기는데, 송학수 심판은 우리 편이 이길 땐 빨리치고 질 때엔 천천히 치기도 했다. 지금 살아 있지도 알 수 없다.그래도 우리나라 프로레슬링 역사에서 주연급은 아니지만, 빼놓을 수 없는 감초같은 존재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정말 싫었던 여름방학 숙제
정말 싫었던 여름방학 숙제며칠 전 ‘학생들 개학했나?’ 했다가 핀잔만 들었다. 요즘은 개학이 8월 20일 전에 한단다. 필자가 어렸을 땐 늘 9월 1일이 개학일이었다.그러다보니 문득 어릴 적 여름방학 숙제가 생각났다.당시 방학이면 기본적으로 ‘방학책’이라는 자습서 내지 문제집 같은 게 하나 있었다.그 정도만 있으면 좋으련만 꼭 이상한(?) 숙제를 내줘서 마음 한편이 늘 무거웠다.제일 싫은 게 일기였다.당시 어린 마음엔 거의 매일 똑같은 나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집에 와서 밥 먹고 잤다. 물론 중간에 만화가게에 가기도 하고 노는 놀이도 달랐지만, 어린 마음엔 다 똑같았다. 그런 생활에서 일기를 왜 매일 써야 하는지도 몰랐고 쓸 줄도 몰랐다. 하루 이틀 쓰다가 일기장을 처박아 놓고, 개학일 직전에 몰아서 썼다. 그런데 매일 일기는 거의 같았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날짜별로 기억이 나지도 않고, 특히 날씨는 기억날 리 만무했다.“오늘은 **와 **하고 놀았다. 참 재미있었다. 또 놀고 싶다” 주로 이런 내용으로 거의 똑같이 쓰고, 날씨도 대충 적었다.왜 하는지 몰랐던 숙제도 있었다. 바로 ‘동물(가끔은 식물) 채집’이다.당시 남자애들은 여름이면 산이나 숲에서 잠자리 메뚜기 매미 여치 사마귀 방아깨비 굼벵이 같은 걸 잡으며 놀았다. 다 아는데 굳이 숙제로 ‘곤충 채집’을 낼 필요가 없었다. 잡아 온 곤충을 그냥 비닐 같은데 담아 제출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곤충 채집 숙제를 제대로 하려면, 잡은 곤충을 박스에 잘 포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적당한 박스를 구해 거기에 수수깡을 적당한 길이로 잘라 기둥처럼 세워 붙인 다음, 수수깡에 곤충을 핀으로 꽂고 투명 비닐 같은 걸로 마무리했다. 곤충 밑에 해당 곤충의 이름도 써서 붙여야 했다.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어간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곤충 채집 숙제를 이렇게 하라고? 오죽하면 학교 앞 문구점에선 곤충 채집 해 놓은 것을 팔았다. 부잣집 애들이나 사서 제출했는지 모르겠다.그나마 다행스럽게 곤충 채집 숙제 안 했다고 크게 야단맞은 것 같지는 않다.워낙 많은 애들이 안 했기 때문이다.아이들이 가끔 잠자리채 들고 다니는 걸 보면 지금도 곤충 채집 숙제가 있나 보다. 하긴 요즘 애들은 우리 때와 달라, 한번 쯤 곤충을 잡아 자세히 관찰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마상원과 그의 악단
마상원과 그의 악단 지난 번 프로레슬링의 송학수 심판의 얘기를 쓰고 나니, 주인공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뒤에서 묵묵히 일했던 사람을 생각해 봤다. 그러다 ‘마상원과 그의 악단’이 떠올랐다. ‘마상원과 그의 악단’은 1975년 창단하여 ‘유쾌한 청백전’이나 ‘명랑운동회’에서 음악과 반주 때로는 악기를 이용한 음향효과를 담당하던 팀이다. 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던 변웅전 아나운서는 늘 프로그램 초반에 “마상원과 그의 악단을 소개합니다”라며 악단을 소개했다. 당시 필자는 어렸지만, ‘무슨 악단이 저래?’라는 생각을 했었다.우선 마상원 악단장의 인상이 별로 호감형이 아니었다. 예능 프로그램인데 웃음기도 없었다. 게다가 단원이라고 3~4인조가 전부다. 그 앞에서 지휘를 하는 모습이 너무나 엉성해 보였다. 악단의 이름이 ‘마상원과 그의 악단’이니까, 악단장이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필자에겐 ‘유랑극단에서 일하던 사람들인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에 대해 글을 쓰려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마상원 악단장은 필자의 생각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처음 가수로도 활동했지만, 이후 작곡가와 악단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특히 어린이 만화영화 주제곡을 많이 만들었다. ‘그랜다이저’ ‘메칸더V’ ‘독수리 오형제’ ‘플란다스의 개’ ‘톰소여의 모험’ ‘캔디’ ‘가제트 형사’ ‘알프스 소녀 하이디’ ‘짱가’ ‘축구왕 슛돌이’ 등 수 백 곡을 훌쩍 넘어간다고 한다. ‘은하철도999’의 반주도 그의 작품이다. 이런 사실을 잡하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필자가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편견과 착각과 오해를 해 온 것이다.마상원 단장님께 미안한 마음이 마구 들었다. 마상원 악단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는 없다. (1940년생)그분께 죄송한 마음에서라도 오래오래 무병장수 하시길 바란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도배하는 날
도배하는 날필자 출근길 옆엔 상가 폐지 버리는 곳이 있다. 거기엔 ‘도배지 버리지 마시오’라고 씌어 있다. 요즘 도배지엔 종이 이외에 다른 것들이 많이 첨가 되는 모양이다.요즘은 한 번 도배하면 특별한 경우가 없는 한, 십 년 정도는 그냥 산다. 그리고 도배를 직접 하는 경우도 드물다.하지만 필자가 어렸을 때엔 도배는 연례 행사였다. 특히 옛날 집엔 천장이나 벽에 비가 새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쥐들이 오줌을 많이 싸서 색이 누렇게 변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방문이 창호지 문이었기 때문에 이래저래 뚫어지다 보니, 새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엔 어머니가 하숙을 하셨기 때문에, 도배해야 할 방이 많았다.도배하는 날은 아침부터 바쁘다. 도배를 하려면 일단 기존 벽지를 뜯어내야 한다.그런데 천장 벽지를 뜯으면 몇 년간 묻혀있던 온갖 더러운 것들, 특히 쥐똥과 쥐털 가끔은 쥐 시체까지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때는 쥐가 흔해서였는지, 그렇게 더럽다는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그냥 묵묵히(?) 빗자루로 쓸어 담았다. 밤마다 쥐들이 운동장처럼 천장을 뛰어다녀서, 친숙하게 생각(?)했기 때문인가 보다.시멘트벽에 벽지를 그냥 붙이면 떨어진다. 그래서 초벌로 신문지를 붙여 말린 후 벽지를 붙였다. 보통은 오전에 밀가루 풀을 쑤고(오공 본드가 등장한 건 70년대 중반 이후다) 벽지 뜯고 신문지 초벌로 붙이고 나서, 점심 먹고 오후에 도배지를 붙였다. 가족이 총동원이 되어야 했다. 특히 천장은 서너 사람이 의자를 징검다리 처럼 놓고 머리 위로 벽지를 올려 붙였다. 가족들이 모여 빗자루로 쓸어가며 붙이다 보면, 한편으론 재미있기도 했다.하지만 도배를 대충하는 건 아니었다. 틈이 없이 도배지를 꼼꼼하게 붙여야 했다. 연탄가스가 새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방문은 창호지를 뜯어낸 후 우선 문틀을 물로 씻었다. 붙어 있는 남은 창호지까지 긁어내야 했다. 그리고 창호지에 밀가루 풀을 발라 문틀에 붙였다. 문틈엔 문풍지도 달았다. 풀칠하는 붓이 없어서 구둣솔로 풀을 발랐다.사실 힘든 일이었는데 당시엔 그리 힘든 줄 몰랐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고, 어른처럼 일꾼으로 인정받는 것 같아 나름 재미도 있었다. 어려서 그랬나 보다. 환갑이 넘은 지금은 못할 것 같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서울시민 찬반투표부터 하라!
서울시민 찬반투표부터 하라! 갑자기 ‘메가 서울’(초거대도시 서울) 단어가 오르내리고 있다.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가 김포시를 서울로 편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견을 낸 이후 급부상하고 있다. 이 말 한마디에 김포 집값은 벌써 들썩이고 있단다.나아가 31일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김포뿐 아니라 광명, 구리, 하남 등도 서울시 편입을 검토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지역의 요구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국민의힘은 김포시를 비롯해 각 시의 주민들이 의외가 투표 등의 절차를 거쳐 서울시 편입이 가능하도록 당론을 정한다고 한다. '선거용'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과 관련해선 "총선 전략이라기보다는 지역의 숙원을 당에서 선제적으로 챙기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갑자기 한참 된 개그콘서트 유행어가 생각난다.“미친 거 아냐?” 대한민국 전체를 서울로 만들겠다는 것과 다름 없다.이런 중차대한 국토 계획이 얼렁뚱땅 순식간에 만들어 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인 ‘지역균형발전’도 안중에 없다. 더욱이 이번 발언은 김포시 등의 출퇴근 문제를 김포시나 경기도 또는 정부가 해결할 사안인데, 서울시에 떠넘기겠다는 의도이기도 하다.서울과 다른 시가 통합되면 가장 손해를 입는 사람들은 서울시민이다.통합되는 도시의 편의를 위해 서울시의 예산이 사용되어야 하고,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서울의 주거 생활 등 환경과 여건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주변 도시와 서울시를 합병하는데 있어 정작 가장 중요한 서울 시민의 의견을 묻겠다는 말은 없다. 서울 시민의 통합 찬반투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그런데 국민의힘은 서울 시민은 안중에도 없고, 주변 도시 시민들에게만 잘 보이고 싶은 모양이다. 국민의힘이 총선을 앞두고 수도권 표심을 얻으려는 얄팍한 속셈으로 보인다.그만큼 총선 전망이 어둡다는 방증이기도 하다.하지만 그만큼 서울시민의 표가 떨어져 나가는 건 생각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무시하는 걸까?서울은 아예 포기하나?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서울에서 참패를 해 봐야 정신차리려나 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올림픽 같았던 아시안게임
올림픽 같았던 아시안게임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진행 중이다.아시안게임 개막전, 어느 신문에 금메달 유망 종목이라 하면서 펜싱 양궁 태권도를 들었다.응? 펜싱?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는 등, 펜싱 강국 중 하나가 되었다.순간 어릴 적 생각이 떠올랐다.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건 언감생심이었다.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한동안 그랬다. 그러니 국민들에겐 아시안게임이 올림픽처럼 느껴졌다. 금메달을 딸 수 있었기 때문이다.사실 제9회 1982년 인도 뉴델리 하계아시안게임부터 중국이 참가하기 전까진 일본의 독무대였고, 국제적인 권위도 많이 떨어졌다. 필자의 기억으론 일본이 금메달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일본은 올림픽만 중시하고, 아시안게임을 가볍게 생각한다)어쨌든 당시 우리나라는 아시안게임에서 종합 2~4위 정도의 성적을 거두며 국위선양의 기회로 삼았고, 메달을 딴 선수들은 당연히(?) 카퍼레이드를 했다.그때 메달박스 즉 효자종목은 유도 레슬링 복싱 등 투기(鬪技)종목이었다.우리나라는 1986 서울 아시안게임에선 복싱 전체급 석권을 할 정도로 세계적인 복싱 강국이었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선 복싱 메달이 하나도 없다. 레슬링이나 유도도 퇴보하긴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은 배가 불러지다보니 헝그리 정신이 사라져서 그렇다고 한다. 힘들고 귀가 변형되는 운동을 더 이상 하기 싫다는 의미다.이후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많이 따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시안게임의 인기가 시들해져 갔다. 나중엔 아시안게임의 인기가 과거의 전국체전 수준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이번 아시안게임은 높은 시청율을 보이고 있다. 추석 연휴 기간에 열릴 뿐만아니라, 대회 초반 수영에서 깜짝 놀랄만한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박태환 같이 특출한 한 사람이 여러 금메달을 딴 게 아니라, 여러 선수가 고르게 메달을 획득했다.지금도 이런저런 종목에서 금메달 등 좋은 성적이 나오고 있다.하지만 20년 후에도 이럴까?젊은이들 즉 선수가 없는데 좋은 성적이 나올까?어느 면에서 보든, 지금이 대한민국의 최고 전성기인지 모른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