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문편지 이야기 - ② 그래도 역할을 했다
위문편지 이야기 - ② 그래도 역할을 했다50~60년대 군대는 정말 춥고 배고픈 곳이었다. 하도 배가 고파 무를 뽑고 난 밭에 부러진 무 조각도 좋아라 주워 먹을 정도였다. 게다가 군기는 엄청나게 강했다. 말이 군기지 만날 두들겨 맞았다. 지금은 ‘가혹행위’라고 하지만 필자가 군에 이을 때만 해도 ‘구타 금지’가 표어처럼 있었다.물론 구타를 하는데도 나름 이유도 있었고, 구타가 좋아서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거라 믿고 싶다. 하지만 여름이면 밤에 속옷만 입혀 밖에 세워 놓고 ‘모기 회식’을 한다거나, 겨울에 찬물 속에 뛰어들게 하는 건 단순히 군기 차원은 아닌 것 같다.60년대까지만 해도 군 내무반엔 TV가 없었다. (일반 가정에도 잘 사는 집만 있었다)그런데 혈기가 넘치는 20대 남성들만 있는데 즐길 거리가 없었다. 그러니 딴 생각 못하게 괴롭히거나, 누군가를 괴롭히며 즐거움으로 삼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나마 유일한(?) 즐거움은 위문편지였다. 필자가 어렸을 때 그렇게 쓰기 싫었던 위문편지가, 고생하는 군인 아저씨들에겐 작은 ‘위문’이 되었다.70대 후반부터 군대 내 배식도 좋아지고, 무엇보다 TV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80년대 초에는 모든 내부반에 칼라TV와 VTR(비디오 플레이어)이 설치되었다. 보고 싶은 여성 가수나 탤런트도 보고, 영화도 빌려볼 수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 이후 구타가 줄어들기 시작했다.물론 군대 내에서 구타가 사라진 건 군 사병들의 의식 향상이 가장 큰 이유지만, 즐거움을 주는 ‘오락 거리’도 큰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더 재미있는 게 있는데, 굳이 즐겁기 위해 남을 괴롭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그 후 강제로 쓰는 위문편지의 인기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학생들이 쓰는 편지나 읽어볼 뿐, 남학생들의 편지는 찬밥신세였다.결국 언제부터인가 강제로 쓰는 위문편지가 사라졌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쓰는 ‘위문’의 효용성이 줄고, 국군장병아저씨들도 위문편지보다 TV나 비디오에서 더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역사학자들은 흔히 어떤 역사적 사건을 볼 때, 지금이 아닌 당시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한때 위문편지는 아무런 즐거움 없이 고생하는 군인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의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예전엔 ‘공부 못하는 애들은 운동이나 해라’라는 식의 사고 방식이 있었다.학생은 공부 잘하는 게 우선이고, 운동은 공부와 관계없다는 식이다. 물론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운동을 잘하면 돈과 명예가 따라오기 때문이다.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공부 잘하는 학생이 운동도 잘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릴 때부터 공부냐 운동이냐를 가르기 때문이다. 운동선수가 중학교 때까진 공부를 곧 잘해도,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사실상 운동에만 전념하게 된다. 따라서 특기생이 아닌, 공부를 잘해 대학에 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한편 서울대는 운동선수의 특기자 전형이 없다. 공부를 잘해야만 입학할 수 있다.또한 야구나 축구부 같은 팀도 그냥 운동이 좋아서 하는 순수 아마추어 팀이다. 대회에 나가면 단골 꼴등이지만, 그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훈련이나 성적을 위해 선배나 코치가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다. 오히려 훈련이나 경기에 빠지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상황이다.어쨌든 선수 출신이 서울대에 입학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일단 부족한 공부를 메워야 하는데, 오랫동안 손을 놓은 공부를 다시 한다는 게 정말 힘들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번에 고등학교 엘리트 야구 선수가 2명이나 동시에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진학했다.덕수고 출신 내야수 이서준과 신일고 좌완투수로 활약했던 엘리트 야구선수 출신 박건우다. 이서준은 4할대 타자였지만, 고등학교 내내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그는 ‘공부가 야구에 방해된 적이 없다’고 까지 말했다.박건우는 2021년 2월에 신일고를 졸업한 뒤 1년간 재수를 한 끝에 서울대에 당당히 합격했는데, 투수 출신으로는 최초의 서울대생이 됐다. 1년 동안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14시간씩 공부만 했다고 한다. 야구 선수로는 서울대 입학이 4번째라고 한다.사실 서울대 축구부에서는 간혹 스타 선수들이 배출되곤 했다.대표적인 선수가 ‘캐논 슈터’ 황보관이다. 황보관은 1984년 입학과 동시에 서울대 축구부를 대학선수권 준우승으로 이끌며 화제를 나았다. 졸업과 동시에 프로구단 유공에 입단해 신인상을 받았고, 국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 벨기에 전에서 ‘캐논’ 프리킥 골을 넣었다. 이 골은, 90 이탈리아 월드컵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고의 프리킥 골 중 하나로 평가받았고, 114km의 속도 역시 당시까지의 월드컵에서 기록된 가장 빠른 슈팅 기록이었다.어쨌든 이번에 서울대에 진학한 두 사람에게 축하를 보낸다.‘운동선수는 공부를 못한다’는 편견을 깨는 데 일조해서 더욱 뜻깊다. 앞으로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길 기대한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한국인 키가 커졌다는데...
한국인 키가 커졌다는데... 필자는 지하철로 출퇴근을 한다. 14개 정거장을 지나므로 가급적 앉아서 가려 한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바뀐 게 있었다. 바로 지하철 좌석의 수가 7개에서 6개로 줄어든 것이다. 7개였을 때엔 비좁다고 느낀 적이 많았는데, 6개로 줄면서 좌석이 커지니까 확실히 편안해 졌다. (대신 앉을 수 있는 확률은 그만큼 낮아졌다) 좌석이 커진 이유를 몰랐는데 이번에 알게 되었다. 국가기술표준원이 한국인 성인 6천 8백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인체 치수 결과를 발표했는데, 한국인의 평균 키는 남성 172.5 센티미터, 여성 159.6 센티미터였다. 40여 년 전 실시한 1차 조사 때보다 남성은 6.4 센티미터, 여성은 5.3 센티미터 커졌다. 게다가 남성 47%가, 여성은 23% 가까이 비만의 범주에 포함됐다.즉 국민들의 체격이 커지니까, 그에 맞춰 지하철 좌석의 크기도 커졌다는 얘기다. 위 조사는 성인 즉 20~69세 국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므로, 20대 젊은이들만 따로 떼어놓으면 훨씬 더 클 것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남자의 경우 177~178 센티미터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183~4 센티미터라고 한다. 키 얘기가 나오니 70년대 축구 국가대표 선수 중 김재한 선수가 생각난다.당시 김 선수의 키가 190 센티미터 정도였다. 다른 대표선수들이 보통 160~170대였으니, 축구선수로는 굉장히 컸다. 농구 선수와 비교해도 큰 편이었다. 그는 이회택, 박이천, 차범근, 김진국 등 당시로는 꽤 우수한 선수들과 함께 경기를 했다. 그래서 나온 작전이 ‘포스트 플레이’다. 김재한 선수를 골문 근처에 세워 놓고 좌우에서 센터링을 하면, 김재한 선수가 헤딩으로 골을 넣거나 공을 떨어트려 슛 찬스를 만드는 단순한 작전이다. 김재한 선수는 발재간은 없었다. 그는 오로지 헤딩만 생각했는지, 무릎쯤 오는 공도 머리로 들이 빋았다. 어쩌다 발로 골을 넣으면 그게 화제가 될 정도였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상근 부회장) 우리 국민들의 키와 체격이 커졌다니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세계 식량난에 대비해 인류 전체가 키와 체격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듣고 보면 그도 그럴듯하다. 키와 체격이 커지는 게 일하거나 보기에는 좋지만, 인류 전체의 미래를 보면 꼭 반가운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이다. 이미 커진 키와 체격을 줄일 수는 없지 않은가? <묻는다일보 배재탁 ybjy0906@naver.com>
우크라니아 국민들을 존경합니다
우크라니아 국민들을 존경합니다지난 해 전 세계인들은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당시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탈레반이 공격을 개시하자 가장 먼저 해외로 도망갔다. 아프간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부정부패로 개인 재산만 축적하다가, 여러 대의 트럭에 달러를 싣고 도주해버렸다고 한다. 정부군은 무기를 보린 채 미리 도망갔고, 탈레반은 교전조차 없이 수도를 함락했다.미군이 철수하는 공항에 아프간인 수 만명이 몰려 이룩하는 비행기에 매달렸다가 떨어져 사망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정부군과 일부 고위 장교는 탈레반에 의해 처형됐고, 현재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필자를 비롯해 이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했다.“저럴 것 같으며 목숨을 걸고 탈레반과 싸웠어야 하지 않았나?”불과 6개월 후 이번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아프간에서 충격을 받은 세계인들은 러시아군이 3~4일이면 우크라이나를 장악할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달랐다.우크라이나 질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의 ‘해외로 대피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결사 항전을 독려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인과 국민들의 저항도 거세다. 한 섬에 있던 200명의 우크라이나 젊은 장병들은 러시아의 투항 요구를 거부했다가 공격을 받아 전멸했다. 러시아 탱크의 진격을 막기 위해 목숨을 바쳐 다리를 폭파한 군인도 있다. 십 여 만명의 시민이 자원 입대하고, 어떤 젊은 부부는 일부러 결혼을 앞당겨 한 후 각자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심지어 시가전에 대비해 무기가 없으면 화염병으로 싸운다며, 화염병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이런 강력한 저항을 예상하지 못했던 러시아와 푸틴이 당황하기 시작했다.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고 있고, 전세계에선 반전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다.필자는 지난해 12월 13일 ‘3차대전은 우크라이나?’라는 제목의 칼럼을 올린 바 있다.‘원래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농토에 자영농이 많았는데, 소비에트 혁명 이후 군인들이 들이닥쳐 농토를 빼았고 농산물을 모조리 탈취해 갔다. 반항하면 단호히 처형했고, 자기가 농사짓고도 굶어 죽는 사망자만 400만명 정도다.’라는 내용이었다.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구 소련을 싫어하고 서방측에 가까워지려는 이유다.어쨌든 막강한 러시아를 상대로 장렬히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존경심을 보낸다.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우리나라에서 전쟁이 나면 대통령과 국민들이 도망가지 않고 장렬히 싸울까?”<묻는다칼럼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한시적 물가 상승일까?
한시적 물가 상승일까? 요즘 물가가 무서울 정도로 오르고 있다. 주로 우크라이나 전쟁때문이다. 곡물값과 에너지(원유 천연가스 등)값 상승이 주도하고 있다.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공장’이라고 할만큼 곡창지대이며 곡물 수출국이다. 2020년 전세계 수출량 기준 옥수수는 13.2%로 4위, 밀은 8%로 5위다. 밀은 러시아가 세계 1위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수출량은 전세계의 40%에 이른다.게다가 우크라이나는 이번 봄에 파종을 못하면서, 가을 수확마저 접어야 하는 입장이다. 요즘 식당이나 빵집을 가면 가격이 오르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들다.5~8천원 사이의 음식은 약속이나 한 듯 1천원 정도씩 올랐다. 순식간에 13~20%씩 오른 셈이다. 곡물과 에너지 값이 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앞으로 얼마든지 더 오를 수 있다는 게 문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종료되면 식품이나 음식 가격이 제자리를 찾을까?그동안 밀 가격이 오르면 어김없이 라면 등 가공식품이나 짜장면 등 음식값이 올랐다. 하지만 밀 가격이 내렸다고 해서 가공식품이나 음식값이 내린 경우는 보지 못했다. 물론 밀값만 찔끔 내리고 다른 요소들이 모두 인상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채솟값처럼 수요 공급에 따라 가격이 오르내리거나, 원윳값이 내리면 국내 기름값도 내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이렇게 가공식품이나 음식 가격은 하방 경직성이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곡물과 에너지 가격이 6개월에서 1년 정도 후엔 제자리(물가 상승률 정도는 빼고)로 돌아왔다고 가정해 보자.그러면 가공식품이나 음식 가격이 내려갈까?필자는 아니라는데 손들고 싶다. 어디까지 오를지 모르지만, 가장 오른 가격으로 고착될 가능성이 크다. 인플레이션이나 스태그플레이션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사실 이런 물가 상승은 필자가 성인이 된 후 처음인 것 같다.그래서 지금의 물가 상승이 너무나 무섭게 느껴진다. 이젠 생존을 위해, 먹는 거라도 아끼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동안 먹던 걸 그리고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건 참으로 서럽다.글로벌 시대를 사는 소시민의 안타까운 자화상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대도’도 한낱 도둑일 뿐
‘대도’도 한낱 도둑일 뿐한때 '대도(大盜)'로 불렸던 조세형이 출소 후 한 달여 만에 또 절도를 저지르다 경찰에 붙잡혔다. 하지만 대도는 무슨 개뿔. 일개 도둑일뿐인 조세형은 84살 나이에, 이번에 구속되면 17번째로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조세형은 1982년 구속돼 15년 수감생활을 마친 뒤 선교활동을 하며 새 인생을 시작하는 척했지만, 결국 도둑질을 계속 저질러 왔다. 그동안 16번이나 교도소를 들락거렸다.조세형은 1980년 전후 사회 고위층만을 상대로 절도 행각을 벌여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당시 국민들은 조세형이 털었던 물건들을 보고 ‘(사회 고위층 피해자들이) 얼마나 해 처먹었으면, 저런 대단한 물건들이 집에서 쏟아져 나왔겠나?’ 하는 생각과, 함께 통쾌함(?)을 느꼈다. 피해자들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을 못 할만한 상황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조세형은 ‘도둑질은 하되 절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들키면 그냥 달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일반 좀도둑과는 다르게 ‘大盜(대도 – 큰 도둑)’이란 별명이 붙여졌다.하지만 도둑은 도둑이었다. 출소 후에도 ‘제 버릇 개 못 주고’ 도둑질을 꾸준히 이어 왔다. 열심히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특기(?)를 살려 이집 저집을 털었다. 하지만 이번엔 사회 고위층만 턴 게 아니었다. 대도는 결국 좀도둑으로 전락했다.80년대만 해도 CCTV 같은 게 없어서 도망가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도둑질 외길 인생을 걸어오며, 도둑질에 이골이 난 조세형도 번번이 잡혔다.84살 나이로 출소한 지 한 달만에 도둑질하다가 또 잡힌 조세형.‘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맞나 보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