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구 후보 단일화만은 꼭!
지역구 후보 단일화만은 꼭! 전격적으로 합당을 선언했던 제3지대 정당(개혁신당)이 불과 11일만에 다시 쪼개졌다. 이낙연 전총리 측에서 탈퇴하고 ‘새로운미래’로 돌아가 버렸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거대 양당 구조에 신물을 느낀 필자 같은 중도층에겐 실망스러운 결과다. 사실 합당을 발표했을 때부터 전문가들은 물론 필자도 ‘잘 될까?’ 하는 의심이 들긴 했었다. 워낙 구성원들의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며 총선까지 치러주길 바랐었다. 도로 분당은 이낙연 이준석 두 전 대표들에겐 상당한 상처를 입히는 결과를 나았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두 정당(세력) 간의 협력 관계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라고 본다.현재 두 정당 모두 지지율이 낮다. 이럴 때 지역구마다 각자 후보를 낸다면 필패일 뿐이다. 따라서 두 정당은 반드시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 그래야 한 의석이라도 더 가져갈 수 있다. 특히 영호남 지역에선 후보 단일화도 어렵지 않다. 따라서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후보 단일화에 대한 협상과 협력을 시작해야 한다. 중도 정당들의 후보 단일화!극단적 양대 정당을 혐오하는 사람이으로서 마지막 기대를 걸어본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예전엔 왜 그렇게 추웠을까?
예전엔 왜 그렇게 추웠을까? 12월 초엔 봄 같은 날이 계속되더니, 갑자기 한파가 몰려 왔다. 며칠 전 그 와중에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필자 보다 열 살 정도 많은 분이 이런 얘길 했다. “이건 추운 것도 아냐, 내가 어렸을 땐 얼마나 추웠는데. 만날 영하 10 몇도 20도 내려가고. 귀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고...”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꼭 기온이 낮아서 추웠을까?“기상청 발표를 보면 지구 온난화로 인해 1975년부터 2019년까지 겨울철 평균온도가 약 1도 정도 올라간 걸 알 수 있다. (사진) 하지만 그 정도 차이로 예전엔 훨씬 추웠다고 할 수 있을까?필자는 기온보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를 꼽고 싶다.필자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은 단열재도 없는, 벽돌 한 겹짜리 집이였다. 아랫목은 따뜻하지만 윗목은 추웠다. 엉덩이는 뜨끈뜨끈해도 코가 시렸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윗목에 놓아둔 물이나 걸레가 꽁꽁 얼어 있었다. 춥게 자고 일어나면 하루종일 추운 느낌이 든다.학교에 가도 조개탄 난로 하나가 전부다. 상점에는 연탄난로가 있을 뿐이다. 좋은 건물에나 가야 난방이 제대로 되었다. 어딜 가나 추웠다.옷의 차이도 크다.요즘 필자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가볍고 따뜻한 패딩이나 파카가 없었다. 질 좋은 코트나 겨울옷도 드물었다. 그러니 내복은 필수였다. 그래서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내복을 사 드리는 게 관습이었다. 당시엔 어머니들의 솜씨가 좋아서, 아이들은 어머니들이 뜨게질로 손수 짜신 스웨터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추운 건 어쩔 수 없었다.이런 이유들로 예전이 더 춥게 느껴진 게 아닌가 싶다.필자가 어릴 땐 겨울에 바람을 맞다 보면 손이 잘 텄다. 당시엔 목욕이나 온수 시설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손이 트면 어머니는 대야에 더운 물을 담아 오셨다. 일단 손을 5분 정도 담가서 때를 불려야 했다. 따뜻한 물이 귀한 시절이라, 손을 담그고 있는 느낌이 참 좋았다. 하지만 좋은 것도 잠시, 때를 불리고 나면 어머니는 때수건으로 박박 문지르셨다. 튼 손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비누로 손을 씻고 나서, 어머니는 글리세린을 발라주셨다. 다음 날이면 금세 좋아졌다.예전엔 겨울 나기가 참 힘들었다. 하지만 당시엔 누구나 그러려니 생각했었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혼성 듀엣이나 그룹이 없다
혼성 듀엣이나 그룹이 없다요즘 아이돌 그룹이니 걸 그룹이니 하는 가수들이 많지만, 혼성 듀오나 그룹을 찾기 힘들다. 어찌 된 일일까?분명 가요계에 혼성 듀엣이나 그룹이 꽤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필자가 기억하는 최초의 혼성 듀엣은 ‘뚜와 에 무와’(불어로 ‘너와 나’라는 뜻)다. 통기타와 긴 생머리로, 남자가수 이필원과 여자 가수 박인희 (이후 한인경) 듀엣이 <모닥불> 등의 노래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박인희는 시인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나레이션 한 것도 큰 인기를 끌었다. 화장기 없는 생머리의 박인희는 솔로로 데뷔한 후에도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뚜와 에 무와‘가 인기를 얻자 1970년 한민과 은희의 혼성 듀엣 ’라나 에 로스포‘가 등장했다. ’라나 에 로스포‘ (Lana Et Rospo)는 불어로 ’두꺼비와 개구리'라는 뜻인데, 남자 가수 한민이 두꺼비처럼 생겼었다. 그 듀엣은 ‘사랑해’ 등의 히트곡을 냈지만, 여자 멤버는 계속 바뀌었다.1971년엔 고봉산과 하춘화가 부른 <잘했군 잘했어>가 공전의 히트를 쳤는데, 지금까지도 종종 불리고 있다. 1983년엔 혼성 듀엣 김희갑 최진희의 ‘한울타리’가 있었다. <그대는 나의 인생>은 최진희의 데뷔곡이기도 하다. 1985년엔 MBC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높은음자리(김장수, 임은희)의 <바다에 누워>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이후 90년대를 거치면서 인기 혼성 그룹이 등장했다. 1994년 데뷔한 쿨(김성수, 이재훈, 유리)은 10년 정도 정상을 달렸고, 같은 해 데뷔한 그룹 룰라(이상민, 고영욱, 김지현, 채리나)는 1995년 <날개 잃은 천사>를 히트시키며 정상에 올랐다. 1996년 데뷔한 영턱스클럽(최승민, 박성현, 한현남, 송진아, 임성은)이 등장해 일명 ‘뽕댄스’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1998년 데뷔한 코요테(김종민, 신지, 빽가)는 지금도 방송에 나오지만, 지금은 인기가 시들어져서 그룹 가수 활동을 한다고 보기 힘들 정도다.그 외에도 여러 혼성 그룹이 있었다.필자가 아는 한, 근래에 들어선 ‘악동 뮤지션(이찬혁 이수현 남매)’ 정도 외엔 기억나는 혼성 듀엣이나 그룹이 없는 것 같다. (‘악동 뮤지션’도 요즘은 듀엣 활동이 뜸한 것 같다)왜 그럴까?왜 남자 아니면 여자들끼리만 팀을 구성할까?최근 남녀 젠더 갈등의 영향일까?팬덤을 구성하기 어려워서일까?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혼성 듀오나 그룹이 등장하면 신선한 느낌이 들 것 같다.<묻는다일보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성난 사람들‘ 유감
’성난 사람들‘ 유감얼마 전 넷플릭스에 ‘성난 사람들’이란 드라마가 올라왔다. 주연과 감독이 모두 한국계라고 해서 시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뭐가 뭔지 도무지 재미가 없었다. 10분 정도 보다가 껐다.그런데 며칠 후 ‘이성진 감독(43)과 스티븐 연을 비롯해 한국계 제작진이 대거 참여한 ‘성난 사람들’이 지난달 15일(현지 시간) 열린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미니시리즈·TV영화 부문 작품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등 8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라는 기사를 봤다.필자는 순간 ’아, 내가 뭔가 착각했나 보다‘ 앞 부분만 보다 만 걸 후회하며 다시 ’성난 사람들‘을 켰다.그런데 아무리 참고 참으며 열심히 들여다 봐도 도무지 뭔 스토리인지 모르겠고,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필자가 성났다. 결국 꺼 버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보도가 나왔다.’2일 에미상 수상 이후 처음으로 한국 언론들과 화상으로 만난 자리에서 스티븐 연은 극 중 연기한 한인 이민자 2세 대니에 대해 “우리 모두가 가진 여러 모습의 수치심을 집약한 인물”‘이라며, ‘작품을 통해 특히 한국 시청자분들과 깊이 연대하고 공감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다.순간 ‘응?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도 한국 시청자인데 연대나 공감이 전혀 가지 않았다.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여서, 다른 이민자들의 생각에 공감을 하는 모양이다.하지만 이민한 경험이 없는 필자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겐 연대하기 힘든 스토리에 공감이라곤 전혀 할 수 없는 상황들이었다.미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나 보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나훈아와 남진
나훈아와 남진 ‘가황(歌皇)’(누가 붙여준 별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언론에선 그렇게 불렀다) 가수 나훈아(77·본명 최홍기)가 데뷔 58년만에 '마지막 콘서트' 계획을 발표하며 사실상 가요계 은퇴를 시사했다.나훈아는 27일 소속사를 통해 공개한 '고마웠습니다!'라는 제목의 편지에서 "긴 세월 저를 아끼고 응원해줬던 분들의 박수와 갈채는 제게 자신감을 더하게 해줬고, 이유가 있고 없고 저를 미워하고 나무라고 꾸짖어 주셨던 분들은 오히려 오만과 자만에 빠질뻔한 저에게 회초리가 되어 다시금 겸손과 분발을 일깨워줬다"며 "박수칠 때 떠나라는 쉽고 간단한 말의 깊은 진리의 뜻을 저는 따르고자 한다"고 적었다.참 말도 잘한다. 하긴 수 많은 명곡들의 작사 작곡까지 했으니... 어쨌든 가요계에서 ‘라이벌’ 하면 이 둘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남진과 나훈아다.나훈아는 1947년생으로 1966년 <천리길>로 데뷔했다.남진은 1945년생으로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했다. 비슷한 연배에 비슷한 시기에 대뷔해, 조금 과장을 섞으면 70년대 한국 가요계를 한때 반분할 정도였다. 그런데 사실 당시엔 남진이 더 인기가 있었다. 원래 영화배우를 준비하던 만큼, 잘생긴 외모에 쇼맨십도 꽤 있었다. ‘동양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며 엘비스 흉내를 내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1971년 나훈아가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배후에 남진”을 얘기했지만, 사실이 아닌 걸로 드러났다. 나훈아는 1976년 7살 연상의 탑 여배우 김지미와의 동거를 발표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6년 후 결별함)2008년에 “야쿠자에게 성기 절단을 당했다”는 루머가 돌자 나훈아는 스스로 기자회견을 자청해선, 테이블 위에 올라가 “바지를 30초간 내려 보일까요?”하며 루머를 한방에 잠재우기도 했다.나훈아가 1987년 발표했던 ‘땡벌’을 가수 강진이 찾아와 자신이 부르도록 허락해 줄 것을 애걸하자 선뜻 허락했고, 그 하나로 강진은 평생 먹고 살게 되었다. 나훈아는 싱어송라이터(발표곡 중 30% 정도가 자작곡이라고 함)이면서도 신비주의를 고집한 가수다. 필자가 알기엔 광고 한번 출연하지 않았고, 방송에도 자주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까지 꾸준히 신곡을 발표하며,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터프한 외모에 체력관리도 잘해, 나이에 비해 언제나 열정적인 공연을 선보였다. 이번 마지막 공연에선 티켓 구하기가 아주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반면 남진은 80년대 이후 인기가 시들해졌다. 지금은 대형 단독 공연은 꿈도 못 꾸고, 전립선 건강식품 광고에도 출연하고 있다. 한때 라이벌이었던 두 가수의 노년은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졌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묘기 대행진’과 달인
‘묘기 대행진’과 달인필자가 어렸을 때인 1970대 언젠가 ‘묘기 대행진’이란 TV 프로그램이 있었다.‘묘기 대행진’엔 서커스 같은 묘기도 있었지만, 지금의 SBS TV ‘생활의 달인’에 출연할 말한 인물들이 출연했었다. 예를 들면 ‘주산왕’ 또는 ‘주산 9단’ 같은 사람들이다. (주산에 대해선 한번 올린 바 있으므로 넘어감)그야말로 ‘생활의 달인’들도 출연했는데 지금은 사라진 직업이나 작업들이다.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우편 소인 찍는 우체국 직원’이다.편지에 우표를 붙이거나 관제엽서를 우체국에 보내면, 소인을 찍어 우표를 확인하고 재사용을 막는 과정이 있다. 이를 위해 많은 우편물(편지나 엽서)을 잘 늘어놓고, 파이프 담뱃대 같은 소인도장으로 박자에 맞추듯 소인을 찍었다. 그런데 소인 도장에 잉크를 묻혀야 하므로, 스탬프 찍고 우편물에 소인을 찍으므로 말발굽 같은 소리가 났다. 관객들은 신기해서 박수를 쳤다. 지금은 기계로 한다.은행원들도 가끔 출연했다. 이들은 돈을 세러 나왔다. 지금이야 돈 세는 기계를 사용하지만, 당시엔 일일이 돈을 세야 했다. 그래서 ‘얼마나 지폐를 빨리 세는가’를 묘기 삼아 보여줬다. 한 번에 다섯 장씩 세기와 낱장 세기 등의 묘기였다. 나아가 한 번에 100장 집기도 보여줬다. 순전히 느낌으로만 정확히 100장을 집어내는 묘기였다. 지금은 순식간에 기계가 다 해 준다.수타면의 달인도 출연했던 것 같다.손으로 면을 아주 가늘게 뽑아서 바늘귀를 통과시키는 묘기다. 지금은 수타면 자체가 거의 없고, 유명 중국음식점에서도 기계면을 사용한다. 가끔 있는 수타면 음식점에선 대개 중국인들이 면을 뽑는다. 상당히 고된 일인가 보다.이렇게 그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다 보니, 지금도 사람들은 가끔 ‘묘기 대행진’이란 말을 쓴다. 아니, ‘묘기 대행진’이 보통명사화 된 것 같다.지금은 ‘생활의 달인’으로 발전(?)했지만, 왠지 옛날의 ‘묘기 대행진’이 더 대단한 느낌이었다. 당시엔 볼 거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TV에서나 유튜브에서나, 지금은 달인이 넘쳐 나는 세상이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