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외국어 2등, 한국어
제2외국어 2등, 한국어 주태국한국교육원(원장 김영진)은 2022년 태국 대입시험에서 7개 제2외국어 과목을 선택한 2만1천485명 중 한국어 응시생은 3천770명(17.6%)으로, 7천470명(34.8%)인 중국어에 이어 두 번째이자 3천672명(17.1%)인 일본어보다 많다고 29일 밝혔다.또한 태국 대학입시에서 제2외국어 응시 인원이 전반적인 감소세지만, 한국어 응시 비율만은 10%(2019년) -10.5%(2020년) - 13.3%(2021년) - 17.6%(2022년)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교육원측은 전했다.이는 K팝과 K드라마 등 한류 열풍에 따른 태국 중등학교의 한국어 학습 열기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교육원은 분석했다.아마도 한국어를 공부하면 취업 등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경제적 이유도 있을 것 같다.어쨌든 이런 현상은 한국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의미다. 사실 6~70년대까지만 해도 태국은 물론 동남아시아는 한국보다 국력과 문화에 있어 대체로 한 수 위였다. 1978년 필리핀 가수 프레디 아귈라(Freddie Aguilar)라는 가수의 ‘아낙’이란 노래는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거꾸로 우리나라 가수나 노래가 외국에서 인기를 끈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다.오죽하면 1970년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했던 제6회 아시안게임을 재정을 이유로 스스로 반납하는 사태가 있었다. 이전 개최국인 태국이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떠안으며, 2회 연속 개최를 하게 되었다. 한국은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함과 함께, 벌금 20만불을 지불해야 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태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열풍이 일고 있다니, 격세지감이다. 사실 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는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좀 하는 것만 봐도 신기해 했다. 외국인이 한국어 몇 마디만 해도 반갑고 고마워했다.방송에서 외국인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건 80년대 말부터다. 당시 독일인이었던 베른하르트 크반트(Bernhard Quandt)는 1986년 한국으로 귀화하면서 ‘이한우’란 이름으로 바꿨다. 잘생긴 외모와 학식으로, 사업은 물론 방송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그는 이후 이름을 ‘이참’으로 개명하고, 외국인 출신으론 최초로 한국관광공사 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그 다음 90년대 초 방송에 등장한 외국인이 로버트 할리(한국명 하일)과 이다도시였다. 이렇게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들이 늘어나고 방송에 자주 출연하고, 요즘은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잘하는 게 놀랍지도 않다.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한국어로 인터뷰하는 외국인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한류와 한국어 보급을 성장시키고 그 위상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역사적 사명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알랭 들롱도 세월엔...
알랭 들롱도 세월엔... ‘세계 최고의 미남’으로 불렸던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86)이 안락사를 결정했다. 알랭 들롱은 2019년 뇌졸중으로 수술을 받은 뒤 스위스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데, 스위스는 안락사가 허용된 국가라고 한다.알랭 들롱은 정말 미남이었다,60년대에서 80년대 초까지 미남의 대명사로 통했다. 특히 그의 파란 눈동자는 과히 압권이었다. 연예인을 그리 좋아하지 않던 필자의 누나도 알랭 들롱의 판넬을 사다 걸어 놓을 정도였다. 필자도 알랭 들롱이 출연한 영화를 보면서, 같은 남자지만 정말 매력있고 잘 생겼다고 생각했었다.알랭 들롱은 잘 생긴 외모만큼 여성 편력이 심했다고 한다.알랭 들롱은 1964년 비밀리에 나탈리와 결혼해 아들 앙토니를 출산했지만, 1969년 이혼했다. 유일한 결혼이었다. 알랭 들롱 주변엔 언제나 수 많은 여성들이 꼬였고, 알랭 들롱에게 잘 보이려고 서로 알랑 방귀를 뀌였을테니 굳이 결혼할 필요를 못 느꼈을 수 있다.하지만 천하의 알랭 들롱도 세월을 피할 수는 없었다.최근 사진을 보니 아름답던 외모는 사라지고 파란색 눈동자만 남았다.그는 2019년 수술 직전 “나이 든다는 건 끔찍하다”며 “우리는 나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평생 그렇게 대접받으며 자유롭게 살아온 그가, 막상 늙고 관심에서 멀어지고 여자들도 떠나가고 이젠 병을 얻어 죽으려 하니 얼마나 아쉽겠는가?필자는 올해 환갑이다.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자식 나서 키운 것 말곤 별로 한 게 없다. 알랭 들롱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 죽어도 아쉬운 건 없다.이럴 땐 ‘평범한 인생이 죽을 땐 아쉬운 게 없어 더 낫다’는 소시민적 생각이 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뉴스창 열기가 겁난다
뉴스창 열기가 겁난다 필자는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켜고 ‘밤새 무슨 일이 있었나?’하는 생각에 뉴스창을 연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이 또는 약간의 설레는 마음으로 뉴스창을 열었다. 하지만 요즘은 뉴스창을 열기 전에 겁부터 난다. ‘밤새 또 무슨 사건이 터졌을까?’ 무서워서다. 국내 정치 뉴스는 짜증부터 난다. 정권 교체기라도 이렇게 시끄러운 적이 없었다. 게다가 ‘검수완박’에 지방선거까지 겹치면서 온통 아수라장이다.하다못해 ‘마스크를 지금 벗네 시기상조네’를 가지고도 싸우고 있다. 한쪽 편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자리 잡고 있다. 전쟁 자체는 물론 그로 인한 곡물과 에너지 가격 인상이 우리나라 물가 인상까지 몰고 왔다. 그야말로 자고 나면 오르는 물가다. 기다가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로, 앞으로 물가가 어디까지 오르고 경제가 얼마나 나빠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더니 이번엔 생각지도 못한 인도네이사 발(發) 팜유 사태까지 터졌다. 인도네시아가 팜유 수출을 금하면서 우리나라에 또 불똥이 튀었다.모든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공사를 진행 중인 건설사들이 수주가를 올려달라고 난리다. 게다가 북한은 요즘 툭하면 ‘핵무기가 어떻고 선제타격이 어쩌구’ 하며 협박을 해대고 있다. 일이년 전 필자가 주식을 할 땐 아침마다 뉴스창을 열며 ‘밤새 미국 증시가 어땠나?“하며 설레는 기대감도 있었다. 지금은 주식에서 손을 떼었기 때문에, 뉴스창을 여는 기대감이나 설레임조차 없다. 요즘 주식 시장이 좋지 않아서 주식(종목)을 갖고 있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는 점이다. 너무나 많은 상황들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아, 이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뉴스창을 열고 싶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한국인 키가 커졌다는데...
한국인 키가 커졌다는데...필자는 지하철로 출퇴근을 한다. 14개 정거장을 지나므로 가급적 앉아서 가려 한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바뀐 게 있었다. 바로 지하철 좌석의 수가 7개에서 6개로 줄어든 것이다. 7개였을 때엔 비좁다고 느낀 적이 많았는데, 6개로 줄면서 좌석이 커지니까 확실히 편안해 졌다. (대신 앉을 수 있는 확률은 그만큼 낮아졌다) 좌석이 커진 이유를 몰랐는데 이번에 알게 되었다.국가기술표준원이 한국인 성인 6천 8백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인체 치수 결과를 발표했는데, 한국인의 평균 키는 남성 172.5 센티미터, 여성 159.6 센티미터였다. 40여 년 전 실시한 1차 조사 때보다 남성은 6.4 센티미터, 여성은 5.3 센티미터 커졌다. 게다가 남성 47%가, 여성은 23% 가까이 비만의 범주에 포함됐다.즉 국민들의 체격이 커지니까, 그에 맞춰 지하철 좌석의 크기도 커졌다는 얘기다.위 조사는 성인 즉 20~69세 국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므로, 20대 젊은이들만 따로 떼어놓으면 훨씬 더 클 것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필자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남자의 경우 177~178 센티미터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183~4 센티미터라고 한다.키 얘기가 나오니 70년대 축구 국가대표 선수 중 김재한 선수가 생각난다.당시 김 선수의 키가 190 센티미터 정도였다. 다른 대표선수들이 보통 160~170대였으니, 축구선수로는 굉장히 컸다. 농구 선수와 비교해도 큰 편이었다. 그는 이회택, 박이천, 차범근, 김진국 등 당시로는 꽤 우수한 선수들과 함께 경기를 했다. 그래서 나온 작전이 ‘포스트 플레이’다. 김재한 선수를 골문 근처에 세워 놓고 좌우에서 센터링을 하면, 김재한 선수가 헤딩으로 골을 넣거나 공을 떨어트려 슛 찬스를 만드는 단순한 작전이다. 김재한 선수는 발재간은 없었다. 그는 오로지 헤딩만 생각했는지, 무릎쯤 오는 공도 머리로 들이 빋았다. 어쩌다 발로 골을 넣으면 그게 화제가 될 정도였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상근 부회장)우리 국민들의 키와 체격이 커졌다니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세계 식량난에 대비해 인류 전체가 키와 체격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듣고 보면 그도 그럴듯하다.키와 체격이 커지는 게 일하거나 보기에는 좋지만, 인류 전체의 미래를 보면 꼭 반가운 건 아닌지 모르겠다.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이다. 이미 커진 키와 체격을 줄일 수는 없지 않은가?<묻는다일보 배재탁 ybjy0906@naver.com>
마윈이 국가 전복을?
마윈이 국가 전복을?지난 3일 오전 9시(현지시간) 중국중앙방송(CC-TV)는 항저우시 국가안전국이 ‘해외 반중(反中) 적대 세력과 손잡고 국가 분열 선동, 국가 정권 전복 선동 등 국가 안보 위해 활동 등의 혐의로 마모(馬某)에 대해 형사 강제 조치(구류)를 취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서의 마모(馬某)가 중국 인터넷 기업 알리바바 창업주인 마윈(馬雲·58)으로 추정되면서 홍콩 증시에 상장된 알리바바 주가가 보도 즉시 9.4% 급락한 92.50홍콩달러까지 떨어졌다.아직까지 마모가 마윈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마윈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그가 이미 시진핑 등 현 정부에게 찍혔기 때문이다.마윈은 지난 2020년 10월 24일 상하이(上海) 와이탄 금융 서밋에 참석해 “중국 정부가 혁신을 억누르고 있다”며 “기차역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공항을 관리할 수 없듯이,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미래를 관리할 수는 없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이 발언으로 시진핑 주석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후 알리바바의 금융 계열사 앤트그룹의 상장이 전격 중단되면서 알리바바에 대한 반독점 조사도 시작됐다. 마윈의 신변이상설이 급속히 퍼지기도 했었다.그런데 중국 최대 부호이자 ‘재물신’이라고까지 불리던 마윈이 굳이 ‘해외 반중(反中) 적대 세력과 손잡고 국가 분열 선동, 국가 정권 전복 선동 등 국가 안보 위해 활동’을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물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정권에 찍히며 손실을 한번 크게 보고 나니, 복수심이 발동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재산을 가진 그가 몸조심을 해야 할 시기에, 굳이 그런 모험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오히려 중국 정부가 사소한 일을 가지고 트집 잡아 마윈을 잡아 넣으려는 게 아닌가 싶다. 아직까지 보도에 나온 사람이 마윈이란 팩트는 없다.하지만 그동안의 경우를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특히 정부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사소해도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없는 죄도 만들어 강력한 처벌을 한다.한번 찍히면 법이고 인권이고 없이 골로 보내는 나라, ‘자칭 대국’ 중국이라 이런 추측을 낳는 게 아닌가?<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대한민국 최초의 TV가 경매에...
대한민국 최초의 TV가 경매에...문화예술 경매회사 코베이옥션은 7일 오후 6시부터 16일 오후 6시까지 코베이옥션 사이트에서 진행되는 온라인 경매에 1966년 8월에 출시된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인 금성사의 'VD-191'이 출품됐다고 밝혔다. 경매 시작가는 약 2500만원인데, 상태가 좋기 때문에 더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이 소식을 접하니 옛날 생각이 난다. (또 ‘라떼’애기임)필자가 어렸을 때엔 집에 TV 있는 집이 드물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빌려보면서 TV를 봐야 했다. 주로 코미디 ‘웃으면 복이 와요’ 같은 게 인기였다.아주머니들은 저녁시간이면 ‘아씨’ 같은 인기 드라마를 보러 주인집(당시엔 세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이나 이웃집에 슬그머니 모였다.또 국가대표 축구경기나 복싱 경기가 있으면 주로 남자들이 다방에 모여 중계를 봤다. 이런 날엔 중계한다는 걸 종이에 적어 다방 앞에 붙여놨다. 그리고 좌석도 극장식으로 바꿨다. 당연히 무대 쪽엔 TV가 한 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크기가 커봐야 19인치였다. 그것도 지금TV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질이 좋지 않은 흑백TV였다. 그래도 역시 스포츠 중계는 여럿이 모여 봐야 제맛이라, 사람들은 불만 없이 열광하면서 시청했다.초기에 생산된 TV는 진공관 식이었다. 그래서 TV 전체 크기에 비해 화면이 작았다. 그리고 워낙 고가여서 화면 앞에 문이 달린 장롱식 TV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트랜지스터 방식의 TV가 출시되면서 상대적으로 화면크기가 더 커지고 장롱식 TV는 사라졌다.필자의 기억으로 리모콘이 등장한 건 컬러TV가 나오면서다. 1977년에 AFKN(당시 2번)이 컬러방송을 시작했고 우리나라 지상파는 1981년 1월 1일부터 본격 컬러TV 방송이 시작되었으니, 그 때쯤 리모콘이 등장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전까진 로터리식 방식으로 채널을 손으로 돌려야 다른 채널을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리모콘 단추를 누르면서도 “다른 데(채널)로 돌려”라는 말을 쓴다. 방송사에서도 “그런 식이면 채널이 다른 데로 돌아가“라며 시청률 확보에 열을 올린다.처음 컬러방송이 시작되었을 때 정말 신기했다. 그런데 방송사 역시 경험이 없는데다, 컬러임을 강조하기 위해 ‘억지 컬러’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옷을 굳이 새빨간색 등 원색을 입는다든가, 전화기를 노란색으로 한다는 식이었다. 극히 부자연스럽고 촌스러웠지만, 당시엔 그 또한 재미였다.하지만 복싱 경기에서 붉은 피가 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흑백TV에선 피가 검게 보이기 때문에 피처럼 덜 느껴졌기 때문이다.어쨌든 앞서 언급했던 금성사의 'VD-191'는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이라는 상징성 그리고 당시의 전자통신 기술과 산업 발달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 등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청이 2013년 8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고 한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