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용도 카바이트
다용도 카바이트필자가 어렸을 때, 포장마차를 비롯해 거의 모든 노점상들은 조명으로 카바이트를 사용했다. 전기보다는 덜 밝았지만, 나름대로 꽤 운치가 있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카바이트는 탄화칼슘(calcium carbide)이란 합성물질로, 원래 ‘카바이드’가 바른 말이지만 흔히 ‘카바이트’라고 부른다. 원래 열을 내는 공업용으로 발명했다.카바이트불은 촛불처럼 생겼지만 꽤 밝았다. 그리고 웬만한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다만 특유의 냄새가 났다.(몸에는 별로 좋지 않은 냄새였을 것 같다) 특히 다루기 쉽고 가격도 저렴해, 많은 사람들이 애용했다.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카바이트가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70년대 종로는 온통 학사주점이었고 막걸리집들이 가득했었다. 막걸리는 시간을 들여 스스로 발효가 되게 해야 제대로 된 막걸리 맛이 나는데, 당시에는 빨리 생산해 한 병이라도 더 팔려고 막걸리를 발효하는 과정에서 카바이트를 첨가했다. 돈 없는 청춘들은 싸구려 카바이트 막걸리라도 사 마셨다. 하지만 먹고 난 다음 날 어찌나 머리가 깨지게 아픈지, 안 먹고 싶은 술 1위였다고 한다.카바이트는 홍시를 빨리 숙성시키는데도 사용됐다.감이 홍시가 되려면 상당 시간이 필요한데, 기다리는 게 싫었던 사람들은 카바이트로 속성 홍시를 만들었다. 특히 카바이트를 사용하면 감 특유의 떫은 맛이 사라진다고 해서 더욱 애용되었다. 하지만 화학합성물질이 몸에 좋을 리 없었고, 지금은 퇴출되었다.지금은 일반인들이 카바이트를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하지만 조명으로는 꽤 쓸모가 있기 때문에, 전기를 사용하기 힘든 밤낚시나 야영 캠핑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사실 야외에선 전깃불 보단 카바이트불이 운치가 있긴 하다.다만 요즘 생산되는 카바이트 등에는 반사경이 붙어 있어, 예전에 흔히 사용하던 카바이트불의 형태와 좀 달라졌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레슬링은 ‘쇼’다?
레슬링은 ‘쇼’다?1965년 고 장영철 선수가 ‘레슬링은 쇼다’라고 한 발언은 당시 우리나라 프로레슬링계는 물론 국민들 가슴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았다.일단 그 발언의 상황을 검색해 보았다.1960년 경 천규덕과 장영철이 (부산)남포동 밤길을 걷는데 전파상 앞에 사람이 잔뜩 모여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뭔가 가보니, 일본 방송(부산엔 일본TV가 나왔다)에 역도산 선수가 미국 선수들을 가라테로 쓰러뜨리면 일본 관중들이 ‘환장’했다. 이 둘은 프로레슬링을 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나라 자생적 프로레슬링의 시작이었다.당시 거구의 선수들이 몸을 날리고 들어 메치는 장면에 국민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사실 장영철 선수는 지금 기준으론 일반인이지 거구라고 할 수는 없는 체격이었다. 다만 아마추어 레슬링을 했기에, 보다 화려한 기술을 선보였다) 특히 말레이시아가 지어준 장충체육관이 생기면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그런데 1965년 일본에서 맹활약하던 김일 선수가 국내로 들어오며 상황이 바뀌었다.김일은 귀국 이후 첫 이벤트로 극동헤비급선수권전을 열었다. 장영철의 상대는 일본에서 중상급 수준으로 알려진 오쿠마였다. 그런데 오쿠마의 새우꺾기 공격에 허리를 유린당한 장영철이 비명을 내지르자, 링사이드에 있던 장영철의 제자들이 경기장에 난입해 오쿠마에게 폭행을 가했고 난장판이 벌어진 끝에 경기는 중단됐다. 이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장영철이 "프로 레슬링은 쇼"라고 발언했다는 것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이 파동의 전말이었다.하지만 장영철은 "프로 레슬링이 쇼"라고 직접 말한 적이 없다고 억울해 했다. 장영철이 경찰 조사 과정에서 '프로레슬링은 특성상 반칙이 일부 허용되지만 여기에도 어느 정도 룰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한 것을 기자들이 '프로레슬링=쇼'라고 잘못 해석해 과장보도를 했다는 것이다.어쨌든 이 사건 하나로 장영철은 프로레슬링의 뒤안길로 사라진다.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잘 나가던 장영철은 졸지에 ‘배신자’ 비슷한 낙인이 찍혀버렸고, 프로레슬링계도 타격을 입었다.사실 ‘프로레슬링을 스포츠라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은 늘 있어 왔다. 너무나 쇼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스포츠 중 전적(몇 전, 면 승, 몇 패)을 밝히지 않는 유일한 스포츠 아닌가 싶다. 따라서 승패는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주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특히 10년 전쯤 방송된 MBC TV ‘무한도전’을 보면, 프로레슬링은 완전히 쇼였다. 화려한 공격일수록 공격을 받는 사람의 협력(?)이 더욱 중요해지고, 사전에 합을 맞췄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프로레슬링을 보면 연예인인지 레슬러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다.반론도 있다.레슬링 특성상 어느 정도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예를 들어 로프 반동을 했는데 상대 선수가 로프를 붙잡고 튀어나오지 않으면 경기가 안된다. 즉 어느 정도는 서로 맞춰 줘야, 게임이 된다는 얘기다. 즉 어느 정도의 룰에 서로 맞춰줘 가면서 경기를 한다는 의미다.필자 생각으론 많은 경기가 사전에 맞춰진 ‘쇼’는 맞는 것 같다.하지만 당시 모든 프로레슬링 경기가 ‘쇼’였을까?그러면 아무리 잘하는 선수라도 패전처리 역할만 해야 하나?경기에서 참패한 장영철이 ‘레슬링은 쇼다’라고 말하는 것도 좀 이상하다.쇼면 이겨야지 왜 참패를 당했을까?진검 승부에서 실력이 모자라 진 것 아닌가?요즘 프로레슬링은 사실상 사라졌고, 생존해 있는 유명 선수들도 없다..그러다 보니 ‘프로레슬링은 쇼’였을까 하는 의문을 풀 수 없게 되는 것 같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김일 선수는 박치기가 싫다고 하셨어~
김일 선수는 박치기가 싫다고 하셨어~우리나라 프로레슬링 역사에서 김일 선수는 빼고는 얘기가 안 된다.우리나라 프로레슬링은 장영철 등 국내파 선수들이 시작했지만, 전성기는 김일 선수가 활동했던 시기와 딱 맞아떨어진다.김일 선수는 씨름선수로 날리다가 일본으로 밀항해, 역도산 도장에서 안토니오 이노키 그리고 자이언트와 함께 3대 제자가 된다. ‘김일’ 하면 ‘박치기’다. 역도산은 김일에게 박치기를 전수해 주며, 특기로 삼으라 했다고 한다. 진짜 김일의 박치기 위력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역도산이 갑자기 사망하자, 이 세 제자가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이끌어 가게 된다.이때 우리나라에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의 간절한(?) 요청으로, 김일 선수는 한국으로 금의환향하게 된다. 장영철의 “레슬링은 쇼다” 사건이 있었지만, 김일은 출중한 실력과 일본의 친분을 활용해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높여 갔다. 특히 60년대 중반에 흑백TV 시대가 열리고 장충체육관이 완공되면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필자가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학기 초에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걸 작성해 제출해야 했는데, 거기엔 반드시 집에 있는 집기 등을 표시하게 되어 있었다. 필자가 국민학교 1학년 (1969년) 때만 해도, TV에 동그라미 치는 학생은 한 반(90명 정도) 중 5~6명이나 될까 싶었다. 그만큼 TV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만화가게에서 TV를 보던 것도 좀 지나서의 일이다.김일 레슬링을 하는 날이면 다방에 극장식으로 좌석을 배치했고, 사람들은 열광하며 시청했다. 그런 돈이 없는 사람들은 전파사 앞에 서서 구경해야 했다.김일 선수는 늘 갓이나 곰방대 호랑이 같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가운을 입고 등장했다. 대부분 상대방이 반칙을 하지만, 김일 선수가 박치기로 응징하며 통쾌한 승리로 끝난다. 특히 일본 선수들이 비열한 반칙을 할 땐 관중들이 흥분하다가, 김일 선수가 온몸을 날리는 박치기 한방에 관중들은 일본에 대한 서러움까지 풀어냈다. 가끔 서양 선수들은 오프너 같은 흉기로 김일 선수의 이마를 가격해 선혈이 낭자했다. 하지만 김일은 피가 철철 흐르는 이마로 박치기를 해 상대를 응징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승리하던 김일 선수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마저도 쇼라는 설도 있긴 하다)TV 중계할 때마다 김일 선수가 박치기할 땐 아나운서는 물론 관중들까지 모두 큰소리로 “박치기!”라고 한마음으로 외쳤다. 어떤 아나운서는 ‘김일 선수의 박치기는 핵폭탄급 세계 최고의 위력’라며 한때 박치기를 “원자 헤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감상 박치기만 못하자 ‘원자 헤딩’은 슬그머니 사라졌다.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김일 선수가 ‘코브라 트위스트’나 ‘넉사자 굳히기’ 같은 새로운 기술을 선보였다. 이 기술을 걸면 굳이 박치기를 하지 않더라도, 꼼짝없이 기권을 받아냈다. 하지만 호응이 시원치 않았는지, 얼마 후 박치기가 다시 등장했다.그러다 김일 선수도 노쇠하고, 후원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데다, 미국 WWF 같은 자극적인 프로레슬링으로 인해 한국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급속히 식는다.이후 김일 선수는 1989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선수 시절 후유증 등으로 약 20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사망했다. 김일은 생전에 “나는 정말 박치기하기가 싫었다”면서 “머리가 아프고 귀에서 종소리가 들린다”고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박치기가 너무 힘들고 아파서 ‘코브라 트위스트’나 ‘넉사자 굳히기’ 같은 기술을 했지만, 통쾌한 박치기를 기대했던 국민들은 시시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고통을 참고 박치기를 다시 한 것이었다.이렇게 국민들을 생각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일 선수는 세상을 떠났다.레슬링이 쇼든 아니든, 김일은 한때 국민에게 통쾌한 선물을 주었던 영웅이었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김연아는 이제 그만
김연아는 이제 그만 TV 광고 속에는 일반인에서 단체장이나 기업 대표 등 다양한 사람들이 출연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연예인들이 다수다. 그런데 다른 직업 없이, 모델도 아닌데 광고 모델만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 이젠 좀 그만했으면 하는 사람, 바로 김연아다. 김연아는 세계 최고의 피겨스케이팅 선수였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감동을 줬던 레전드다. 하지만 그게 벌써 언제 적 얘긴가?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벌써 14년이나 지났다. 그동안 편당 10억원 정도의 모델료를 받으며 커피에서 은행 밥솥 통신까지 150편이 넘는 광고에 출연했으니, 그 수입만 1,500억원이 넘는다. 물론 김연아는 아직도 모델계에선 톱스타다. 하지만 필자는 김연아가 출연하는 광고를 볼 때마다 ‘김연아가 왜 아직도 광고에 나오지? 그렇게 모델이 없나?’ 라는 생각을 한다. 얼굴이 다른 모델보다 예쁜 것도 아니고, 광고 이외에 어떤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떼돈을 벌면서 하다못해 봉사나 기부 활동도 거의 없다. 그 정도 모델료라면, 다른 모델도 얼마든지 있을성 싶다. 하지만 김연아는 심하게 말하면 금메달 이미지 하나로, 반평생을 찜쪄먹고 발라먹고 우려먹는다고 할 정도다. 이러다 환갑 때까지 출연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다. 이에 대비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미인 ‘정윤희’나 톱 탤런트 겸 배우 ‘원미경’ 등이다. 그 정도의 스타가 잘나갈 때 은퇴한 후 평생 광고나 인터뷰 한번 없이, 조용히 지낸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지금의 김연아는 ‘피겨의 여제’를 넘어 ‘광고의 여제’로 변질(?)되어 버렸다. 김연아도 그동안 돈도 충분히 벌었으니,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이제 조용히 물러나면 어떨까 싶다. 솔직히 질린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철새’ 김민석과 ‘사쿠라’
‘철새’ 김민석과 ‘사쿠라’더불어민주당의 친명계 김민석 의원이 이낙연 전 대표의 신당론을 놓고 연일 "사쿠라 신당"이라고 비판했다. 일본어로 벚꽃을 뜻하는 ‘사쿠라’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른 속셈을 가지고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 특히 여당과 야합하는 야당 정치인을 이른다’라고 되어 있다. 친명계 의원 입장에선 이낙연 전 대표가 ‘사쿠라’일 수도 있다.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민석 의원이 그런 말을 했다니, 헛웃음이 나온다.김민석 의원은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불과 32살의 나이에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미래의 대통령이라고 할 정도로, 정말 촉망받는 젊은 정치인이었다. 다음 총선에서도 연달아 당선되었고, 민주당 최고위원까지 역임했다. 말 그대로 승승장구, 잘나가던 스타 정치인이었다.그러던 김민석 의원이 딱 한 번의 판단 미스 내지 잔머리로, 스스로를 한 방에 훅 가게 하는 일을 벌였다. 바로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을 제일 먼저 탈당해 정몽준 후보 편에 선 것이다. 당시 야권에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양립하고 있었고 후보 단일화 분위기가 논의되고 있었는데, 김민석 의원은 정몽준 후보의 승리를 예상하고 발 빠르게 제일 먼저 탈당해 정몽준 후보 편에 섰다. 하지만 후보 단일화는 노무현 후보의 승리로 끝이 났고, 김민석 의원은 한마디도 ‘새’가 되었다.물론 김민석 의원의 정치 인생도 거기에서 끝났다가 최근 다시 살아났으나, 철새의 이미지 때문에 과거 같은 스타성은 사라지고 한낱 ‘정치꾼’으로 버티고 있다.그렇게 당을 배신했던 사람이 신당을 만든다는 사람들에게 ‘사쿠라’라고 할 수 있을까?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서 "그때 철새, 김민새 이런 별칭이 붙었습니다. 과연 사쿠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래서 저는 셀프 디스라고 보는 겁니다."정세균계인 이원욱 의원은 "민주를 내재화하지 못한 민주당의 586정치인이 부끄럽다"라고까지 얘기했다.어릴 때 서울대 총학생회 회장을 맡으며 민주화 운동을 했고 한때 젊은 스타 정치인이었던 김민석 의원이, 이렇게 망가져 버린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만 하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성난 사람들‘ 유감
’성난 사람들‘ 유감 얼마 전 넷플릭스에 ‘성난 사람들’이란 드라마가 올라왔다. 주연과 감독이 모두 한국계라고 해서 시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뭐가 뭔지 도무지 재미가 없었다. 10분 정도 보다가 껐다.그런데 며칠 후 ‘이성진 감독(43)과 스티븐 연을 비롯해 한국계 제작진이 대거 참여한 ‘성난 사람들’이 지난달 15일(현지 시간) 열린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미니시리즈·TV영화 부문 작품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등 8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라는 기사를 봤다. 필자는 순간 ’아, 내가 뭔가 착각했나 보다‘ 앞 부분만 보다 만 걸 후회하며 다시 ’성난 사람들‘을 켰다.그런데 아무리 참고 참으며 열심히 들여다 봐도 도무지 뭔 스토리인지 모르겠고,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필자가 성났다. 결국 꺼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보도가 나왔다.’2일 에미상 수상 이후 처음으로 한국 언론들과 화상으로 만난 자리에서 스티븐 연은 극 중 연기한 한인 이민자 2세 대니에 대해 “우리 모두가 가진 여러 모습의 수치심을 집약한 인물”‘이라며, ‘작품을 통해 특히 한국 시청자분들과 깊이 연대하고 공감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순간 ‘응?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도 한국 시청자인데 연대나 공감이 전혀 가지 않았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여서, 다른 이민자들의 생각에 공감을 하는 모양이다.하지만 이민한 경험이 없는 필자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겐 연대하기 힘든 스토리에 공감이라곤 전혀 할 수 없는 상황들이었다. 미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나 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