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동시 탈분당 사태
여야 동시 탈분당 사태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당과 야당이 동시에 탈당 또는 분당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국민의힘의 이준석 전대표는 탈당 및 신당 창당에 59%까지 왔다며 가시화하고 있고, 민주당의 이상민 의원을 비롯한 복수의 비명계 의원들이 탈당을 고심하고 있다.일단 국민의힘은 이준석 전 대표가 탈당할 경우 그 자체만으로 2% 전후의 이탈표가 예상된다. 같은 당 윤상현 의원은 지난 11일 페이스북에 "이준석 신당은 국민의힘 후보 표를 잠식해 1,000여 표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수도권과 부산 등 영남지역에서 상당한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게다가 서울시민의 의중을 무시한 ‘서울 주변 도시 합병 (메가시티)’론이 불거지면서, 국민의힘에 대한 서울의 표심은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한편 민주당 역시 녹록치않다.비명계 의원들이 탈당 또는 분당해 내년 총선에 임한다면, 그동안 이재명 당대표에 불만을 품은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의 이탈은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전국적 지지를 얻고 있는 이준석 대표만큼의 파괴력보단 부족할 수 있다)가능성은 낮다고 하지만, 만약 국민의힘의 이준석 등과 민주당의 비명계가 손을 잡고 제3정당을 출범한다면?그동안 우리나라 총선의 역사를 볼 때 제3정당이 성공한 경우는 별로 없다. 지난 2016년 안철수 천정배 등이 창당했던 국민의당 정도가 성공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하지만 현재 거대 양당의 극단적 행태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반윤(反尹) 반이(反李) 중도세력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중도층이 20% 이상이라고 한다. 물론 막상 선거에서 중도세력이 제3정당에 표를 던질지, 또는 현재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제3정당에 얼마나 흡수될지 아무도 모른다.다만 이런 제3정당이 출범하면, 지역구는 몰라도 상당수의 비례대표를 가져갈 것에는 이견이 없다.여당과 야당이 동시에 엉망진창이어서, 양당 동시패션으로 탈분당을 앞둔 이번 총선.씁쓸하지만 관전하기엔 가장 재미있는 선거가 될 것 같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철새’ 김민석과 ‘사쿠라’
‘철새’ 김민석과 ‘사쿠라’ 더불어민주당의 친명계 김민석 의원이 이낙연 전 대표의 신당론을 놓고 연일 "사쿠라 신당"이라고 비판했다. 일본어로 벚꽃을 뜻하는 ‘사쿠라’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른 속셈을 가지고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 특히 여당과 야합하는 야당 정치인을 이른다’라고 되어 있다. 친명계 의원 입장에선 이낙연 전 대표가 ‘사쿠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민석 의원이 그런 말을 했다니, 헛웃음이 나온다. 김민석 의원은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불과 32살의 나이에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미래의 대통령이라고 할 정도로, 정말 촉망받는 젊은 정치인이었다. 다음 총선에서도 연달아 당선되었고, 민주당 최고위원까지 역임했다. 말 그대로 승승장구, 잘나가던 스타 정치인이었다. 그러던 김민석 의원이 딱 한 번의 판단 미스 내지 잔머리로, 스스로를 한 방에 훅 가게 하는 일을 벌였다. 바로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을 제일 먼저 탈당해 정몽준 후보 편에 선 것이다. 당시 야권에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양립하고 있었고 후보 단일화 분위기가 논의되고 있었는데, 김민석 의원은 정몽준 후보의 승리를 예상하고 발 빠르게 제일 먼저 탈당해 정몽준 후보 편에 섰다. 하지만 후보 단일화는 노무현 후보의 승리로 끝이 났고, 김민석 의원은 한마디도 ‘새’가 되었다. 물론 김민석 의원의 정치 인생도 거기에서 끝났다가 최근 다시 살아났으나, 철새의 이미지 때문에 과거 같은 스타성은 사라지고 한낱 ‘정치꾼’으로 버티고 있다. 그렇게 당을 배신했던 사람이 신당을 만든다는 사람들에게 ‘사쿠라’라고 할 수 있을까?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서 "그때 철새, 김민새 이런 별칭이 붙었습니다. 과연 사쿠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래서 저는 셀프 디스라고 보는 겁니다." 정세균계인 이원욱 의원은 "민주를 내재화하지 못한 민주당의 586정치인이 부끄럽다"라고까지 얘기했다. 어릴 때 서울대 총학생회 회장을 맡으며 민주화 운동을 했고 한때 젊은 스타 정치인이었던 김민석 의원이, 이렇게 망가져 버린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만 하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솜틀집은 아직도!
솜틀집은 아직도!얼마 전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 소화전 구석에 붙은 ‘솜틀집’ 광고 스티커를 보았다. 갑자기 어렸을 적 솜틀집 생각이 났다.예전엔 ‘이불’ 하면 당연히 목화솜이 들어간 ‘솜이불’이었다.그런데 목화솜의 단점은 오래 사용하게 되면 굳으면서 단단해진다는 점이다. 습기에도 취약해, 갈수록 무거워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걸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이불이 두껍고 단단하다보니 햇볕에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그래서 등장한 게 ‘솜틀집’이다.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마다 있었고, ‘솜틀집’ 광고 벽보도 사방에 붙어 있었다. 필자가 결혼할 때만 해도 솜이불은 신혼부부의 필수품이자, 시댁 필수 예단이었다.필자도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솜틀집에 한번 가본 적이 있다.당시엔 이불 홑청을 뜯어 빨고 풀 입히고 말려고 다듬이질 해서 (가끔은 필자도 다듬이질을 했다) 따로 작업해 놓는다. 이와 별개로 안의 이불솜과 솜 주머니(? 그걸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만 솜틀집으로 낑낑 들고 깄다. (목화솜이라 꽤 무거웠다. 지금 같으면 차에 싣고 갈텐데...)솜틀집에 가보니 솜털 가루를 머리부터 눈썹까지 하얗게 뒤집어 쓴 부부(?)가 일하고 있었다. 커다란 통이 있는데 윙윙 큰소리가 나며 모터가 돌아가는 것 같았고, 그 안에 솜을 막대기로 넣으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솜을 튼(되살리는 작업을 한) 이불에 누우면, 정말 푹신하고 따뜻해서 새 이불 같았다.그런데 가끔은 솜틀집에서 솜을 빼낸다는 얘기도 있었다. 당시엔 솜값이 비쌌는데, 솜을 틀어 놓으면 부피가 가늠이 안 되어 일부를 빼돌려도 소비자가 모른다는 점을 악용한 절도였다.그런데 최근엔 솜틀집의 기능이 확장되었다. 이불을 통째로 가져가면 단순히 솜을 트는 것뿐만 아니라 살균 소독 이물질 제거에 전체를 리폼해 준다.요즘은 겨울에 난방이 잘되다 보니 두꺼운 솜이불은 무겁고 필요 없다. 따라서 오래 묵은 멀쩡한 솜이불 한 채를 틀면 두 채로 분리해 나누어 사용할 수도 있다. (솜이불이 상할 경우, 문제의 부분을 제거하면 그대로 한 채가 되겠지만)예전의 이불솜은 지금 돈 주고도 구하기 어렵다. 국내에서 목화재배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학섬유가 아닌 솜이불만의 매력이 있다.이불장 맨 밑에 눌려 신음하고 있는 솜이불을 가져다, 솜 한번 틀어 볼까?<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천규덕과 송학수
천규덕과 송학수얼마 전 옛친구들과 만나 담소 중 프로레슬링의 송학수 심판 얘기가 나왔다.필자가 어렸을 때엔 프로레슬링이 정말 인기였다. 쇼든 아니든, 프로레슬링 중계하는 날엔 온 국민들이 모여 열광했다. 특히 김일 선수가 박치기로 상대를 제압할 때면, 여기저기서 온통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픈 경기에 등장하는 일본 선수들은 대개 교묘히 반칙을 하는데, 안타깝게(?) 심판은 이를 보지 못하며 관중들의 화를 돋웠다. 하지만 반칙을 참아내던 정의의 우리 선수들이 결국 승리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당시 당수 천규덕 거인 박송남 등의 선수들이 기억난다.그중 당수 5단이라는 천규덕 선수는 미남에 스타킹을 입고 나오는 게 캐릭터였다. 그의 당수가 얼마나 센지 링에 빨간 벽돌을 들고 나와 한방에 깨트리는 시범도 보였다. 그러자 ‘천규덕 선수가 당수 두 방이면 황소도 때려 잡는다’는 말이 있었다. 결국 어느 경기에 앞서 실제로 링 밖에 황소를 묶어 놓고 천규덕 선수가 당수로 때려잡는 시범을 보였다. (사진) 사람들은 정말 두 세방의 당수면 소가 쓰러질 줄 알았다. 그런데 왠걸...빨간 벽돌을 한방에 깨던 천규덕 선수의 무시무시한 당수로 아무리 두들겨 패도 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묶인 채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소가 불쌍했다.아나운서가 처음엔 하나 둘 세더니, 수 십 대가 넘어가자 세는 걸 아예 포기했다. 목소리에 힘도 빠졌다.천규덕 선수는 망신살이 뻗쳤다고 생각했는지, 죽어라고 당수를 날렸다. 백대가 넘어갔나...그러자 소가 서 있기 피곤했는지 슬그머니 앉았다. (풀썩 주저앉은 게 아니다)그제서야 천규덕 선수는 임무를 완수했다며 양손을 들어 보였지만, 관중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한편 당시 중요 레슬링 시합에서 심판은 늘 ‘송학수 심판’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져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원래 송학수 심판도 레슬링 선수였는데, 연습인지 경기 중인지 장파열을 당하면서 선수 생활을 접고 심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송학수 심판의 특징은 대머리였는데, 가끔 선수들 틈에서 고생하며 웃음을 주기도 했다.(사진- 솔직히 송학수 심판이 맞는지 정확하지 않음)레슬링에선 상대의 양어깨가 매트에 닿은 후 심판이 세 번을 내리쳐야 이기는데, 송학수 심판은 우리 편이 이길 땐 빨리치고 질 때엔 천천히 치기도 했다. 지금 살아 있지도 알 수 없다.그래도 우리나라 프로레슬링 역사에서 주연급은 아니지만, 빼놓을 수 없는 감초같은 존재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김일 선수는 박치기가 싫다고 하셨어~
김일 선수는 박치기가 싫다고 하셨어~ 우리나라 프로레슬링 역사에서 김일 선수는 빼고는 얘기가 안 된다.우리나라 프로레슬링은 장영철 등 국내파 선수들이 시작했지만, 전성기는 김일 선수가 활동했던 시기와 딱 맞아떨어진다. 김일 선수는 씨름선수로 날리다가 일본으로 밀항해, 역도산 도장에서 안토니오 이노키 그리고 자이언트와 함께 3대 제자가 된다. ‘김일’ 하면 ‘박치기’다. 역도산은 김일에게 박치기를 전수해 주며, 특기로 삼으라 했다고 한다. 진짜 김일의 박치기 위력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역도산이 갑자기 사망하자, 이 세 제자가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이끌어 가게 된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의 간절한(?) 요청으로, 김일 선수는 한국으로 금의환향하게 된다. 장영철의 “레슬링은 쇼다” 사건이 있었지만, 김일은 출중한 실력과 일본의 친분을 활용해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높여 갔다. 특히 60년대 중반에 흑백TV 시대가 열리고 장충체육관이 완공되면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필자가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학기 초에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걸 작성해 제출해야 했는데, 거기엔 반드시 집에 있는 집기 등을 표시하게 되어 있었다. 필자가 국민학교 1학년 (1969년) 때만 해도, TV에 동그라미 치는 학생은 한 반(90명 정도) 중 5~6명이나 될까 싶었다. 그만큼 TV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만화가게에서 TV를 보던 것도 좀 지나서의 일이다.김일 레슬링을 하는 날이면 다방에 극장식으로 좌석을 배치했고, 사람들은 열광하며 시청했다. 그런 돈이 없는 사람들은 전파사 앞에 서서 구경해야 했다. 김일 선수는 늘 갓이나 곰방대 호랑이 같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가운을 입고 등장했다. 대부분 상대방이 반칙을 하지만, 김일 선수가 박치기로 응징하며 통쾌한 승리로 끝난다. 특히 일본 선수들이 비열한 반칙을 할 땐 관중들이 흥분하다가, 김일 선수가 온몸을 날리는 박치기 한방에 관중들은 일본에 대한 서러움까지 풀어냈다. 가끔 서양 선수들은 오프너 같은 흉기로 김일 선수의 이마를 가격해 선혈이 낭자했다. 하지만 김일은 피가 철철 흐르는 이마로 박치기를 해 상대를 응징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승리하던 김일 선수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마저도 쇼라는 설도 있긴 하다) TV 중계할 때마다 김일 선수가 박치기할 땐 아나운서는 물론 관중들까지 모두 큰소리로 “박치기!”라고 한마음으로 외쳤다. 어떤 아나운서는 ‘김일 선수의 박치기는 핵폭탄급 세계 최고의 위력’라며 한때 박치기를 “원자 헤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감상 박치기만 못하자 ‘원자 헤딩’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김일 선수가 ‘코브라 트위스트’나 ‘넉사자 굳히기’ 같은 새로운 기술을 선보였다. 이 기술을 걸면 굳이 박치기를 하지 않더라도, 꼼짝없이 기권을 받아냈다. 하지만 호응이 시원치 않았는지, 얼마 후 박치기가 다시 등장했다. 그러다 김일 선수도 노쇠하고, 후원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데다, 미국 WWF 같은 자극적인 프로레슬링으로 인해 한국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급속히 식는다. 이후 김일 선수는 1989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선수 시절 후유증 등으로 약 20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사망했다. 김일은 생전에 “나는 정말 박치기하기가 싫었다”면서 “머리가 아프고 귀에서 종소리가 들린다”고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박치기가 너무 힘들고 아파서 ‘코브라 트위스트’나 ‘넉사자 굳히기’ 같은 기술을 했지만, 통쾌한 박치기를 기대했던 국민들은 시시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고통을 참고 박치기를 다시 한 것이었다. 이렇게 국민들을 생각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일 선수는 세상을 떠났다.레슬링이 쇼든 아니든, 김일은 한때 국민에게 통쾌한 선물을 주었던 영웅이었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한국은 끝났다
한국은 끝났다 ㅠ.ㅠ13일 일본 경제지 ‘머니1’는 ‘한국은 끝났다’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이 신문은 “한국의 경제신문에서조차 ‘한국은 끝났다… 0%대 추락은 시간문제’라는 어두운 전망의 기사를 내고 있다”며 이를 ‘피크 코리아론’라고 지칭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인구감소를 들었다.사실 필자도 지금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부흥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강대국 근처까지 갔으며,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적이 있었는가?그런데 저출산율은 세계에서 압도적 1위이고, 젊은이들은 연애나 결혼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학생들은 의대나 로스쿨로만 몰리니, 이 나라가 발전할 수도 없다.이러한 사태에 대해 누구를 탓하겠나?누구의 잘못이라 꼬집을 수 없으면서, 한편으론 우리 모두의 잘못이기도 하다.하지만 분명 지금이 피크가 맞는 건 같은데, 필자는 왜 피크를 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까?뭔가 시원하게 잘나가본 적 없이, 늘 먹고 살기 빠듯할까?그나마 ‘피크’인 덕에 이 정도라도 살고 있는 걸까?어쨌든 우리나라가 지속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선 저출산 극복 내지 젊은 인구 증가만이 해법이다. 모든 국가적 자원을 총동원해서라도 최우선과제로 해결해야 한다.문제는 저출산 극복이 단지 돈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사안이라는 점이다.젊은이들의 결혼과 출산에 대한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이렇게 대한민국은 점점 쇠락하다가, 결국 지도상에서 없어지는 날이 온다.안타깝지만 외부적 요인이 아닌, 자업자득이다.필자가 죽은 다음일테니, 그 꼴을 안 봐서 그나마 다행이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