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싫었던 여름방학 숙제
정말 싫었던 여름방학 숙제며칠 전 ‘학생들 개학했나?’ 했다가 핀잔만 들었다. 요즘은 개학이 8월 20일 전에 한단다. 필자가 어렸을 땐 늘 9월 1일이 개학일이었다.그러다보니 문득 어릴 적 여름방학 숙제가 생각났다.당시 방학이면 기본적으로 ‘방학책’이라는 자습서 내지 문제집 같은 게 하나 있었다.그 정도만 있으면 좋으련만 꼭 이상한(?) 숙제를 내줘서 마음 한편이 늘 무거웠다.제일 싫은 게 일기였다.당시 어린 마음엔 거의 매일 똑같은 나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집에 와서 밥 먹고 잤다. 물론 중간에 만화가게에 가기도 하고 노는 놀이도 달랐지만, 어린 마음엔 다 똑같았다. 그런 생활에서 일기를 왜 매일 써야 하는지도 몰랐고 쓸 줄도 몰랐다. 하루 이틀 쓰다가 일기장을 처박아 놓고, 개학일 직전에 몰아서 썼다. 그런데 매일 일기는 거의 같았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날짜별로 기억이 나지도 않고, 특히 날씨는 기억날 리 만무했다.“오늘은 **와 **하고 놀았다. 참 재미있었다. 또 놀고 싶다” 주로 이런 내용으로 거의 똑같이 쓰고, 날씨도 대충 적었다.왜 하는지 몰랐던 숙제도 있었다. 바로 ‘동물(가끔은 식물) 채집’이다.당시 남자애들은 여름이면 산이나 숲에서 잠자리 메뚜기 매미 여치 사마귀 방아깨비 굼벵이 같은 걸 잡으며 놀았다. 다 아는데 굳이 숙제로 ‘곤충 채집’을 낼 필요가 없었다. 잡아 온 곤충을 그냥 비닐 같은데 담아 제출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곤충 채집 숙제를 제대로 하려면, 잡은 곤충을 박스에 잘 포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적당한 박스를 구해 거기에 수수깡을 적당한 길이로 잘라 기둥처럼 세워 붙인 다음, 수수깡에 곤충을 핀으로 꽂고 투명 비닐 같은 걸로 마무리했다. 곤충 밑에 해당 곤충의 이름도 써서 붙여야 했다.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어간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곤충 채집 숙제를 이렇게 하라고? 오죽하면 학교 앞 문구점에선 곤충 채집 해 놓은 것을 팔았다. 부잣집 애들이나 사서 제출했는지 모르겠다.그나마 다행스럽게 곤충 채집 숙제 안 했다고 크게 야단맞은 것 같지는 않다.워낙 많은 애들이 안 했기 때문이다.아이들이 가끔 잠자리채 들고 다니는 걸 보면 지금도 곤충 채집 숙제가 있나 보다. 하긴 요즘 애들은 우리 때와 달라, 한번 쯤 곤충을 잡아 자세히 관찰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마상원과 그의 악단
마상원과 그의 악단 지난 번 프로레슬링의 송학수 심판의 얘기를 쓰고 나니, 주인공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뒤에서 묵묵히 일했던 사람을 생각해 봤다. 그러다 ‘마상원과 그의 악단’이 떠올랐다. ‘마상원과 그의 악단’은 1975년 창단하여 ‘유쾌한 청백전’이나 ‘명랑운동회’에서 음악과 반주 때로는 악기를 이용한 음향효과를 담당하던 팀이다. 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던 변웅전 아나운서는 늘 프로그램 초반에 “마상원과 그의 악단을 소개합니다”라며 악단을 소개했다. 당시 필자는 어렸지만, ‘무슨 악단이 저래?’라는 생각을 했었다.우선 마상원 악단장의 인상이 별로 호감형이 아니었다. 예능 프로그램인데 웃음기도 없었다. 게다가 단원이라고 3~4인조가 전부다. 그 앞에서 지휘를 하는 모습이 너무나 엉성해 보였다. 악단의 이름이 ‘마상원과 그의 악단’이니까, 악단장이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필자에겐 ‘유랑극단에서 일하던 사람들인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에 대해 글을 쓰려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마상원 악단장은 필자의 생각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처음 가수로도 활동했지만, 이후 작곡가와 악단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특히 어린이 만화영화 주제곡을 많이 만들었다. ‘그랜다이저’ ‘메칸더V’ ‘독수리 오형제’ ‘플란다스의 개’ ‘톰소여의 모험’ ‘캔디’ ‘가제트 형사’ ‘알프스 소녀 하이디’ ‘짱가’ ‘축구왕 슛돌이’ 등 수 백 곡을 훌쩍 넘어간다고 한다. ‘은하철도999’의 반주도 그의 작품이다. 이런 사실을 잡하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필자가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편견과 착각과 오해를 해 온 것이다.마상원 단장님께 미안한 마음이 마구 들었다. 마상원 악단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는 없다. (1940년생)그분께 죄송한 마음에서라도 오래오래 무병장수 하시길 바란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도배하는 날
도배하는 날필자 출근길 옆엔 상가 폐지 버리는 곳이 있다. 거기엔 ‘도배지 버리지 마시오’라고 씌어 있다. 요즘 도배지엔 종이 이외에 다른 것들이 많이 첨가 되는 모양이다.요즘은 한 번 도배하면 특별한 경우가 없는 한, 십 년 정도는 그냥 산다. 그리고 도배를 직접 하는 경우도 드물다.하지만 필자가 어렸을 때엔 도배는 연례 행사였다. 특히 옛날 집엔 천장이나 벽에 비가 새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쥐들이 오줌을 많이 싸서 색이 누렇게 변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방문이 창호지 문이었기 때문에 이래저래 뚫어지다 보니, 새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엔 어머니가 하숙을 하셨기 때문에, 도배해야 할 방이 많았다.도배하는 날은 아침부터 바쁘다. 도배를 하려면 일단 기존 벽지를 뜯어내야 한다.그런데 천장 벽지를 뜯으면 몇 년간 묻혀있던 온갖 더러운 것들, 특히 쥐똥과 쥐털 가끔은 쥐 시체까지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때는 쥐가 흔해서였는지, 그렇게 더럽다는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그냥 묵묵히(?) 빗자루로 쓸어 담았다. 밤마다 쥐들이 운동장처럼 천장을 뛰어다녀서, 친숙하게 생각(?)했기 때문인가 보다.시멘트벽에 벽지를 그냥 붙이면 떨어진다. 그래서 초벌로 신문지를 붙여 말린 후 벽지를 붙였다. 보통은 오전에 밀가루 풀을 쑤고(오공 본드가 등장한 건 70년대 중반 이후다) 벽지 뜯고 신문지 초벌로 붙이고 나서, 점심 먹고 오후에 도배지를 붙였다. 가족이 총동원이 되어야 했다. 특히 천장은 서너 사람이 의자를 징검다리 처럼 놓고 머리 위로 벽지를 올려 붙였다. 가족들이 모여 빗자루로 쓸어가며 붙이다 보면, 한편으론 재미있기도 했다.하지만 도배를 대충하는 건 아니었다. 틈이 없이 도배지를 꼼꼼하게 붙여야 했다. 연탄가스가 새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방문은 창호지를 뜯어낸 후 우선 문틀을 물로 씻었다. 붙어 있는 남은 창호지까지 긁어내야 했다. 그리고 창호지에 밀가루 풀을 발라 문틀에 붙였다. 문틈엔 문풍지도 달았다. 풀칠하는 붓이 없어서 구둣솔로 풀을 발랐다.사실 힘든 일이었는데 당시엔 그리 힘든 줄 몰랐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고, 어른처럼 일꾼으로 인정받는 것 같아 나름 재미도 있었다. 어려서 그랬나 보다. 환갑이 넘은 지금은 못할 것 같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서울시민 찬반투표부터 하라!
서울시민 찬반투표부터 하라! 갑자기 ‘메가 서울’(초거대도시 서울) 단어가 오르내리고 있다.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가 김포시를 서울로 편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견을 낸 이후 급부상하고 있다. 이 말 한마디에 김포 집값은 벌써 들썩이고 있단다.나아가 31일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김포뿐 아니라 광명, 구리, 하남 등도 서울시 편입을 검토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지역의 요구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국민의힘은 김포시를 비롯해 각 시의 주민들이 의외가 투표 등의 절차를 거쳐 서울시 편입이 가능하도록 당론을 정한다고 한다. '선거용'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과 관련해선 "총선 전략이라기보다는 지역의 숙원을 당에서 선제적으로 챙기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갑자기 한참 된 개그콘서트 유행어가 생각난다.“미친 거 아냐?” 대한민국 전체를 서울로 만들겠다는 것과 다름 없다.이런 중차대한 국토 계획이 얼렁뚱땅 순식간에 만들어 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인 ‘지역균형발전’도 안중에 없다. 더욱이 이번 발언은 김포시 등의 출퇴근 문제를 김포시나 경기도 또는 정부가 해결할 사안인데, 서울시에 떠넘기겠다는 의도이기도 하다.서울과 다른 시가 통합되면 가장 손해를 입는 사람들은 서울시민이다.통합되는 도시의 편의를 위해 서울시의 예산이 사용되어야 하고,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서울의 주거 생활 등 환경과 여건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주변 도시와 서울시를 합병하는데 있어 정작 가장 중요한 서울 시민의 의견을 묻겠다는 말은 없다. 서울 시민의 통합 찬반투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그런데 국민의힘은 서울 시민은 안중에도 없고, 주변 도시 시민들에게만 잘 보이고 싶은 모양이다. 국민의힘이 총선을 앞두고 수도권 표심을 얻으려는 얄팍한 속셈으로 보인다.그만큼 총선 전망이 어둡다는 방증이기도 하다.하지만 그만큼 서울시민의 표가 떨어져 나가는 건 생각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무시하는 걸까?서울은 아예 포기하나?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서울에서 참패를 해 봐야 정신차리려나 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올림픽 같았던 아시안게임
올림픽 같았던 아시안게임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진행 중이다.아시안게임 개막전, 어느 신문에 금메달 유망 종목이라 하면서 펜싱 양궁 태권도를 들었다.응? 펜싱?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는 등, 펜싱 강국 중 하나가 되었다.순간 어릴 적 생각이 떠올랐다.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건 언감생심이었다.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한동안 그랬다. 그러니 국민들에겐 아시안게임이 올림픽처럼 느껴졌다. 금메달을 딸 수 있었기 때문이다.사실 제9회 1982년 인도 뉴델리 하계아시안게임부터 중국이 참가하기 전까진 일본의 독무대였고, 국제적인 권위도 많이 떨어졌다. 필자의 기억으론 일본이 금메달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일본은 올림픽만 중시하고, 아시안게임을 가볍게 생각한다)어쨌든 당시 우리나라는 아시안게임에서 종합 2~4위 정도의 성적을 거두며 국위선양의 기회로 삼았고, 메달을 딴 선수들은 당연히(?) 카퍼레이드를 했다.그때 메달박스 즉 효자종목은 유도 레슬링 복싱 등 투기(鬪技)종목이었다.우리나라는 1986 서울 아시안게임에선 복싱 전체급 석권을 할 정도로 세계적인 복싱 강국이었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선 복싱 메달이 하나도 없다. 레슬링이나 유도도 퇴보하긴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은 배가 불러지다보니 헝그리 정신이 사라져서 그렇다고 한다. 힘들고 귀가 변형되는 운동을 더 이상 하기 싫다는 의미다.이후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많이 따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시안게임의 인기가 시들해져 갔다. 나중엔 아시안게임의 인기가 과거의 전국체전 수준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하지만 이번 아시안게임은 높은 시청율을 보이고 있다. 추석 연휴 기간에 열릴 뿐만아니라, 대회 초반 수영에서 깜짝 놀랄만한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박태환 같이 특출한 한 사람이 여러 금메달을 딴 게 아니라, 여러 선수가 고르게 메달을 획득했다.지금도 이런저런 종목에서 금메달 등 좋은 성적이 나오고 있다.하지만 20년 후에도 이럴까?젊은이들 즉 선수가 없는데 좋은 성적이 나올까?어느 면에서 보든, 지금이 대한민국의 최고 전성기인지 모른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신문 배달과의 전쟁
신문 배달과의 전쟁필자가 자주 지나가는 마트 앞에는 어김없이 한 아저씨가 만원 지폐 여러 장을 보이면서 신문 영업을 하고 있다. “8만원 받고 1년간 무료” 똑같은 말을 수도 없이 주저린다. 그걸 보니 또 옛날 생각이 난다. 필자가 어렸을 때 신문배달은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했다. 당시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 학생들을 ‘고학생’이라고 불렀다. 필자의 기억으론 80년대 까지만 해도, 신문을 보기는 쉬워도 끊기는 정말 어려웠다. 좀 과장되게 얘기하면 두 집 걸러 한 집엔 ‘○○신문 사절’ 이란 종이가 문 앞에 붙어 있었다. 당시엔 신문사마다 사활을 걸고 보급 확장에 나서며, 원래 필요 신문의 10% 이상의 신문을 배급소마다 확장분(프로모션)으로 무료 배포했다. (동시에 보급소에 확장에 대한 압력을 넣었다) 따라서 보급소 입장에선 ‘사절’이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더 넣는 건 돈 안 드는 일이었다. 보급소 소장이나 총무들은 고학생들에게 무조건 신문을 배달하라고 강요했고, 애꿎은 고학생들만 가운데서 욕을 먹었다.보급소장이나 총무들은 신문대금을 내지 않는 집에 일일이 직접 찾아가 미납 대금을 받아내야 했다. 하지만 미납 대부분은 이미 신문 사절을 통보한 집이었기 때문에 항상 실랑이가 벌어졌다. 보급소장이나 총무는 ‘이번 한 번만 내면 다시는 넣지 않겠다’라며 밀린 대금을 받아갔다. 하지만 대부분은 또 신문을 넣었다. 이쯤 되면 고객은 속았다는 생각과 함께 괘씸해서 화가 난다.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자 대문에도 ‘○○신문 사절’에서 ‘○○신문 절대 사절’ 내지 ‘○○신문 사절, 절대 돈 안 줌’으로 발전했다. 그래도 신문 보급소장이나 총무는 돈 달라고 찾아갔고, 심지어 “그동안 배달한 신문을 도로 달라”며 뻔뻔스럽게 나왔다. 사용해서 없어졌으니 돈 내놓으라는 것이다.이러다 보니 고객들에겐 ‘배달과의 전쟁’이 되었다.우선 고객들도 약아졌다. 해당 신문을 차곡차곡 고스란히 모아서, 신문값 받으러 오면 “여기 모아 놨으니 다 가져가라”라고 대응했다. 또한 석 달치가 밀렸을 경우 소장이나 총무가 “한 달치만 달라”고 하면, 고객은 “그 얘길 어떻게 믿냐?”며 영수증 뒤에 “더 넣을 경우 절대 대금을 받겠다고 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쓰라고 했다. 그럴 경우 더 이상 안 되겠는지, 정말 더 넣지는 않았다.이 정도로 고객들이 대응하고 나서야 배달과의 전쟁은 줄어들기 시작했다.하지만 국민 대부분은 무리한 배달과 신문 사절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마트 앞에서 “8만원 받고 1년간 무료”라고 하는 아저씨 말을 들으면, ‘저거 끊을 땐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도 같이 드는 이유다.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악착같이 신문 배달을 해서 ‘배달의 민족’인가?<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