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오(CASIO)의 몰락
카시오(CASIO)의 몰락얼마 전 계산기로 계산을 하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십 단위의 액정이 하나 고장난 것이다.(사진) 액정 하나 나갔을 뿐인데 계산기로서의 인생은 끝났다.생각해보니 이 계산기를 사용한 지 22년째다. 아쉬움이 남는다. 그동안 자주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 정도면 수명을 할만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지금도 계산기는 길거리든 인터넷이든 어디서나 무조건 카시오다. 그만큼 계산기 분야에선 세계적으로 경쟁이 없다. 필자가 대학교 다닐 때 이과생들이 가지고 다니던 값비싼 카시오 계산기가 있었다. 일반용과 다르게 가로로 길었고, 플라스틱 케이스가 있었다. 당시 가격으로 5~6만원 정도였으니, 술집 당구장 등에서도 외상 대신 받아주는 유일한 학생용품이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00만원 정도 가치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또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자시계’ 하면 카시오였다. 전자시계나 계산기 하나 정도 안 가진 국민이 없을 정도였고,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브랜드 중 하나였다.당시 가장 유명한 전자제품 브랜드가 소니였는데, 소니는 가격대가 비싼 제품이었다. 따라서 일반 국민이 가지고 있는 제품 비율로는 카시오가 앞섰을 것 같다. (순전히 근거 없는 필자 추측이고 주장임)그런 카시오가 지금은 완전히 한물갔다.우선 계산기는 전산화가 이루어지고 액셀이 보급되면서 계산기 사용할 일이 크게 줄었다. 게다가 결정적인 건 스마트폰의 등장이다. 그 안에 계산기가 있으니 굳이 별도의 계산기가 필요 없다. 계산기는 이제 컴퓨터가 없는 상점의 상인들이나 가지고 있는 제품이 되어버렸다.전자시계도 고급형이 나오면서 밀린데다, 역시 휴대폰이 보급되면서 시계가 필요 없어졌다. 굳이 패션으로 전자시계를 착용한다면 다른 브랜드를 선택한다.세계를 주름잡던 카시오는 이제 계측기 등 전문분야로 쪼그라들면서, 옛 명성을 잃었다.그나저나 계산기를 새로 사자니 돈이 아깝고, 스마트폰으로 계산하자니 약간 불편함은 있고...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했다.결국 고장난 계산기는 그냥 버리고, 스마트폰을 이용하기로 했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대연각호텔 화재사고를 잊지 말고
대연각호텔 화재사고를 잊지 말고 얼마 전 TV에서 대형 빌딩 화재 사고를 보다가, 갑자기 대연각호탤 화재가 떠올랐다.1971년 12월 25일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동에 위치한 21층짜리 초특급 대연각호텔의 화재사건은 대한민국 최악의 화재 사고를 넘어, 세계 최대의 화재 사고들 중 하나이자 호텔 화재 중에서는 단연 최대 사고라고 한다. 이 불로 총 사망자 166명(추락사 38명), 부상자 68명, 실종 25명이 발생했다. 이 화재를 TV로 생중계하며, 온 국민이 충격에 휩싸였다.당시 21층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빌딩 중 하나였다. 그런데 화재가 1층에서 발생하며 가연내장재를 타고 빠르게 올라갔다. 출입구가 화재로 막히자 투숙객들은 목숨을 걸고 추풍낙엽처럼 뛰어내렸다. 어차피 그냥 있으면 죽을 것, 이판사판이었다. 심지어 침대 매트리스를 들고 뛰어내리기도 했다(사진), 그런 장면들이 모두 TV에 잡히며,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특히 사건 당일은 성탄절이었기 때문에 호텔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던 상태라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기억나는 투숙객이 있다. 그 사람은 주한 대만 대사관 위셴룽(余先榮) 공사다. 11층에 묵고 있던 공사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이불 같은 것을 덮어쓰고 창가에 서서 구조를 기다렸다. 하지만 당시엔 11층까지 올라가는 사다리차가 없었다. 심지어 활에 실을 매달고 쏴서 구조를 하려고도 했다.(실을 통해 점점 굵은 줄을 올린 후 밧줄까지 올려보내려 한 시도다) 하지만 화살이 11층 창문에 번번이 빗나갔다. TV를 보던 사람들은 그때마다 안타까운 탄성을 자아냈다. 당시와는 다르겠지만, 지금 생각으론 세계적 양궁 강국인 우리나라가 그것 한 발을 못 맞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시 양궁 관련자 말로는 실을 매달고 위로 쏘는 것이기 때문에 힘들다고 설명했다. 그는 결국 10시간 만에 구조되었지만, 공사는 화재 당시 호흡기에 중화상을 입어 10일간의 투병 끝에 1972년 1월 4일 사망하였다. 이런 대형 사고는 항상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고, 모두 인재(人災)다.대연각호텔 화재도 1층 커피숍에 있던 프로판가스가 새어나온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런 화재를 잊지 말고, 화재 예방에 철저해야 한다. 화재 없는 이번 겨울이 되길 기원해 본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홍범도와 이승복
홍범도와 이승복최근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문제를 놓고 누군가 이렇게 얘기했다. “(홍범도 장군) 내가 언제 흉상 만들어 달라고 했더냐?”비슷한 사건이 생각났다. 바로 ‘이승복 어린이’ 사건이다.보도에 의하면 1968년 10월 울진/삼척지구 해상으로 침투한 북한의 무장간첩 중 잔당 5명이 추격을 피해 북으로 도주하다, 12월 9일 밤 11시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 이승복의 초가집에 침입했다. 무장간첩들은 가족 5명을 안방에 몰아넣은 채 "남조선(남한)이 좋으냐, 북조선(북한)이 좋으냐"고 질문하며 북한 체제선전을 하자,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답했다. 이 말에 격분한 간첩들이 이승복과 가족들을 끌고 나갔다. 이들은 먼저 모친 주씨의 머리를 벽돌만한 돌덩이로 쳐서 죽였다. 뒤이어 이승복 본인도 공비들의 양 손가락에 입을 찢기고 돌까지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동생 승수와 승자도 같이 살해되어 퇴비더미에 묻히고 말았다. (살아남은 가족들도 엄청난 정신적 충격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이런 사건을 접한 정부는 이승복 어린이를 ‘반공 소년’ 내지 ‘영웅’으로 만들었다.“무장 공비의 총칼 앞에서도 이승복 어린이는 당당하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무참하게 죽어 갔습니다. 이 연사 이렇게 외칩니다.....”라는 식의 웅변대회를 학교는 물론 단체에서도 개최했다. 교과서에도 실리고 만화나 영화로 제작되어 배포되었다.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여기저기 세워졌고, 기념관(사진)도 설립되었다. 학생들은 기념관을 참배하는 게 ‘반공 교육의 코스’이기도 했다.(이후 이승복 어린이 사건이 조작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정황 상 사실인 것 같다)무장 공비들이 얼마나 사상에 광신도적이었고,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잔인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거꾸로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는 것 역시 주입식 반공교육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가 체제 강화를 위해 이승복 어린이를 영웅으로 미화하고, 어린 고인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던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내가 언제 동상이나 기념관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이승복 어린이는 하늘에서 조용히 있고 싶을지 모른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권력에 중독된 엄마
권력에 중독된 엄마 ‘사랑의 매’라는 게 있었다.부모나 선생님이 아이들을 훈육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체벌을 하는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사랑의 매’란 단어가 이미 사라졌다. 어떤 상황에서든 폭력은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게 중론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2학년 학생을 주먹과 리코더 등으로 마구 폭행해 전치 9주의 상해를 입혔다. 그것도 만날 때마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이런 경우 학교는 응당한 조치를 하고 가해자와 부모는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게 기본이다.그런데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바로 가해 학생의 아버지가 김건희 여사 최측근이자 권력 실세라고 하는 김승희 대통령 의전비서관이었기 때문이다. 학교도 설설 기고 가해자 부모는 당당했다.문제가 불거지자 김승희 비서관의 아내이자 가해 학생의 엄마는 자신의 딸이 ‘사랑의 매’를 때린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남편인 김승희 비서관이 대통령과 같이 찍은 사진을 올리며, 자신 남편의 권력을 과시했다. 미친 거 아닌가?선생님도 아니고 불과 한 학년 높은 학생이 ‘사랑의 매’로 전치 9주의 상해를 입혔다?하지만 대통령과 친한 권력자이니 다들 찍소리 말고 찌그러져라? 문제가 불거지자 김 비서관은 즉각 사퇴하며 실업자가 되었고, 알량한 한 줌의 권력은 날아갔다. 아주 가벼운 처벌을 받으며 뵈는 게 없이 자란 철딱서니 딸도 꽤 기가 죽었을테다. 요즘 세상에 이런 젊은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게 신기하다.저런 부모 밑에서 자란 초등학교 3학년 가해 학생은 커서 뭐가 될까?상금 학생들로부터 전치 9주 짜리 ‘사랑의 매’를 맞아 봐야 정신 차릴까?그래도 정신 나간 부모들은 ‘사랑의 매이니 괜찮다’라며 참을까? 누구보다 길길이 날뛸 게 뻔하다.엄마가 이러니 애들도 배우지... 대한항공 가족을 보는 듯 하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무서운 여인
무서운 여인인천지법 제15형사부(재판장 류호중)는 특수상해, 상해, 업무방해, 재물손괴 혐의로 기소된 A씨(39여)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고 지난 21일 밝혔다.A씨는 지난해 5월 4일 오후 9시쯤 서울시 영등포구 한 노래방에서 남자친구인 B씨(46)의 얼굴과 등을 손으로 마구 때려 전치 3주간의 치료가 필요한 고막 천공 등의 상해를 가했다. 또 10분 뒤 노래방 출구로 가던 중 카운터 부근에 서 있던 B씨의 얼굴을 깨진 맥주병 파편으로 그어 2주간의 치료가 필요한 상해를 가한 혐의다. 게다가 A씨는 이날 노래방에서 맥주병과 유리잔을 깨 소파에 박히게 해 재물을 손괴하고, 10여 분간 소란을 피워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도 함께 기소됐다.조사 결과 A씨는 B씨와 노래방에서 성관계를 하려다가 거절당하자 화가 나 범행했다고 한다.웃픈 사건이다.그 여성이 얼마나 섹스를 하고 싶었으면 저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남친에겐 “한번 좀 해주지”라는 생각도 든다.남자친구 입장에선 노래방에서 섹스를 하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아니면 그날 컨디션이 안 좋거나, 기능에 문제가 있거나 혹은 그만큼 친한 사이가 아닐지도 모른다.그런데 대부분의 남자들의 경우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나오면 ‘돈 드는 것도 아닌데, 까짓거 한번 봉사해주지’라고 생각할 것 같다. 하지만 술이 많이 취한 상태라면 좀 다를 수 있다. 여성이 저렇게 행패를 부린 걸 봐선 두 사람 다 술에 꽤 취했을 것 같다. 그럴 때 일부 남성들은 발기가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섹스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한다. 그걸 모르고 여성이 화를 불같이 내며 맥주병을 깨어서 얼굴을 긋는 등의 행패를 부렸을지도 모른다.그 여성이 맥주병으로 난동을 부리는 동안 피투성이가 된 남성과 주변인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피해자 B의 경우 얼굴을 찔려 두동맥이 절단될 정도의 위중한 상처를 입어, 구호조치가 조금만 늦었어도 치명적인 위험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다.그나저나 저 두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했다.판결문을 보니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점’이라고 나와 있다.하긴 죽을 뻔했는데, 필자 같아도 무서워서 못 만날 거 같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천규덕과 송학수
천규덕과 송학수얼마 전 옛친구들과 만나 담소 중 프로레슬링의 송학수 심판 얘기가 나왔다.필자가 어렸을 때엔 프로레슬링이 정말 인기였다. 쇼든 아니든, 프로레슬링 중계하는 날엔 온 국민들이 모여 열광했다. 특히 김일 선수가 박치기로 상대를 제압할 때면, 여기저기서 온통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픈 경기에 등장하는 일본 선수들은 대개 교묘히 반칙을 하는데, 안타깝게(?) 심판은 이를 보지 못하며 관중들의 화를 돋웠다. 하지만 반칙을 참아내던 정의의 우리 선수들이 결국 승리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당시 당수 천규덕 거인 박송남 등의 선수들이 기억난다.그중 당수 5단이라는 천규덕 선수는 미남에 스타킹을 입고 나오는 게 캐릭터였다. 그의 당수가 얼마나 센지 링에 빨간 벽돌을 들고 나와 한방에 깨트리는 시범도 보였다. 그러자 ‘천규덕 선수가 당수 두 방이면 황소도 때려 잡는다’는 말이 있었다. 결국 어느 경기에 앞서 실제로 링 밖에 황소를 묶어 놓고 천규덕 선수가 당수로 때려잡는 시범을 보였다. (사진) 사람들은 정말 두 세방의 당수면 소가 쓰러질 줄 알았다. 그런데 왠걸...빨간 벽돌을 한방에 깨던 천규덕 선수의 무시무시한 당수로 아무리 두들겨 패도 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묶인 채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소가 불쌍했다.아나운서가 처음엔 하나 둘 세더니, 수 십 대가 넘어가자 세는 걸 아예 포기했다. 목소리에 힘도 빠졌다.천규덕 선수는 망신살이 뻗쳤다고 생각했는지, 죽어라고 당수를 날렸다. 백대가 넘어갔나...그러자 소가 서 있기 피곤했는지 슬그머니 앉았다. (풀썩 주저앉은 게 아니다)그제서야 천규덕 선수는 임무를 완수했다며 양손을 들어 보였지만, 관중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한편 당시 중요 레슬링 시합에서 심판은 늘 ‘송학수 심판’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져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원래 송학수 심판도 레슬링 선수였는데, 연습인지 경기 중인지 장파열을 당하면서 선수 생활을 접고 심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송학수 심판의 특징은 대머리였는데, 가끔 선수들 틈에서 고생하며 웃음을 주기도 했다.(사진- 솔직히 송학수 심판이 맞는지 정확하지 않음)레슬링에선 상대의 양어깨가 매트에 닿은 후 심판이 세 번을 내리쳐야 이기는데, 송학수 심판은 우리 편이 이길 땐 빨리치고 질 때엔 천천히 치기도 했다. 지금 살아 있지도 알 수 없다.그래도 우리나라 프로레슬링 역사에서 주연급은 아니지만, 빼놓을 수 없는 감초같은 존재다.<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