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 프로스펙스와 나이키
26-09-28 09:05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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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펙스와 나이키
아시안게임 야구 경기중, 국가대표 선수 유니폼에 프로스펙스 마크가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운동화는 나이키다. 갑자기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일반 운동화나 캐주얼화 또는 구두를 신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운동화(러닝화) 붐이 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97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조깅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가볍고 충격 흡수가 잘 되는 전문 러닝화에 대한 수요가 폭발했기 때문이란다.
특히 여학생들은 ‘프로스펙스(PROSPECS)’나 ‘나이키(NIKE)’ 운동화를 신는 게 유행이었다. 워낙 선풍적인 인기를 끌다 보니 ‘프로스포츠(PROSPORTS)’나 ‘나이스(NICE)’ 같은 짝퉁이 판을 쳤다. 두 브랜드는 가격도 비슷하게 비쌌는데, (프로스펙스가 약간 쌌다) 당시로선 꽤 세련된 느낌이었다.
프로스펙스는 국산 브랜드이고 나이키는 해외 유명 브랜드였는데, 어떻게 둘이 경쟁하는 게 가능했을까?
그 배경에는 세계의 신발공장이라 할 수 있는 부산 신발공단이 있었다. (서울에서 살아온 필자에겐 생소한 곳임) 1980년대 이후 부산 신발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만 20만 명에 달했고,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 등 세계적인 메이저 브랜드 운동화 물량의 70~80% 이상을 부산의 국제상사 동양고무 등이 OEM으로 생산했다. 그만큼 기술력 또한 세계적이었다.
한국 신발 수출액은 1990년에 역사상 최대치인 43억 1,000만 달러를 기록할 정도였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은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2위의 신발 수출국이었는데, 특히 세계 최대 신발 소비국인 미국의 전체 수입 신발 중 약 30%가 한국산이었다.
당시 해외 유명 브랜드의 최대 생산 파트너 중 하나였던 국제상사는 "남의 브랜드만 만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축적한 최고의 기술력으로 직접 브랜드를 만들자"라며, 1981년 프로스펙스(PRO-SPECS)를 출범시켰다. 프로스펙스는 론칭 직후 미국 시장에 진출했는데, 당시 미국 최고의 러닝 전문지 <러너스 월드(Runner's World)> 제품 평가에서 프로스펙스의 조깅화가 최고 영예인 5성급(★5) 평가를 받으며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프로스펙스는 세계 10대 운동화로 선정될 정도의 높은 기술 수준이었다.
나아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공식 후원사로 선정되며, 해외에서도 수억 달러 규모의 수출을 달성하기도 했다.
한편 1981년 미국 나이키는 동양고무와 50:50으로 출자하여 합작법인인 '한국나이키컴퍼니'를 설립하며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이로서 프로스펙스와 나이키, 국제상사와 동양고무의 라이벌 경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두 회사는 신발 업계의 양대축으로 경쟁 관계였음)
하지만 국제그룹은 1985년 전두환 군사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고 프로스펙스가 한일합섬으로 넘어가면서, 사실상 성장 동력을 잃어버린다. (프로스펙스는 2007년 LS네트웍스로 편입되며 예전의 영광을 찾으려 하지만, 신통치 않음)
한편 동양고무 역시 나이키와의 계약 종료 후 1986년 독자 브랜드 르까프(LECAF)를 론칭했는데, 예전 프로스펙스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했다.
만약 국제상사가 프로스펙스를 계속 성장시켰다면, 오늘날 글로벌 스포츠용품 및 소재 산업 분야에서 상당한 위상을 가졌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제품력을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안타깝고 화 나는 일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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