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인권기자 | 동학농민혁명 유족 지원금 유감
26-08-26 09:50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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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유족 지원금 유감
25일 전북도는 "도내에 1년 이상 거주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723명에게 1인당 연 120만원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당초 계획인 연 60만원에서 2배 늘어난 것이다. 이는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정부(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공식 등록된 유족을 대상으로 한단다. 아울러 무분별한 지급이 아니라, 국가위원회 심의를 통해 4대(증손) 이내 유족으로 ‘엄격히 확인’·등록된 주민에게만 제한적으로 지급된다고 한다.
갑자기 동학혁명(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넘어간다)을 지원한다면, 임진왜란에서 싸운 의병들도 보훈혜택을 제공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이에 대해 전북도는 ‘1895년 을미의병 참여자부터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만, 바로 1년 전인 1894년 2차 동학 항일 투쟁 참여자들은 현행 독립유공자법상 지정받지 못하므로,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지자체가 예우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이란다.
하지만 동학혁명 지원금의 진짜 문제점은 따로 있다.
동학혁명 즉 1894년 2차 봉기(공주 우금치 전투(사진) 등)에서 일본군과 조선 관군 연합군에 몰살당한 후, 전국적인 탄압과 학살을 당한 사람까지 합하면 1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가족들 대부분은 보복이 두려워 동학 참가 사실을 숨기기 급급해, 실제 참가한 사람들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심의 자료 역시 130년 전 문중 사료나 족보 등 가문 기록에 의존하다 보니, 신뢰성을 두고 논란이 일기도 한다.
그럼 신뢰성이 떨어지는 문중 자료로 10만 명 중 고작 723명만이 지원금을 받는다. 차라리 임진왜란의 의병을 찾아도 이보단 많을 것 같다. 기억도 안 나는 4대손이 이 정도 수치라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더 큰 문제는 동학에 참여했다가, 이후 친일행위를 했는지를 현실적으로 걸러낼 수 없다는 점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될 정도의 악질 친일이라면 입증되겠지만, 당시엔 ‘생계형 또는 구조적 직업적 친일과 변절’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와 간부 이용구 등은 일본 망명 생활을 거치며 "조선이 수탈과 폭정에서 벗어나려면 무력 투쟁이 아니라 문명개화와 실력 양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바꿨다. 귀국 후 1904년 동학의 잔존 전국 조직망을 재건해 '진보회'라는 대중 단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부패한 관료들을 탄핵하는 민권 운동을 펼쳤으며, 문명화의 표시로 상투를 자르는 '단발 운동'을 전개해 10만명이 훨씬 넘는 대중 세력을 모았다.
하지만 조선 조정(고종 및 기득권층)은 진보회를 ‘동학 잔당의 재기’로 지목해 강경 진압에 나섰다. 생존 위기에 몰린 이용구와 진보회 지도부는 일제(일본군)의 후광을 입으면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부터 동학교도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판단(변절)하여, 1904년 12월 친일 조직인 일진회와 합병하기에 이른다. 변절자 이용구와 일진회는 이후 을사늑약 찬성에 이어, 1909년엔 '한일합방 청원서'까지 제출하는 매국노 집단으로 전락했다. (이용구 등의 변절 친일 행각에 손병희는 1906년 일진회 세력을 천도교(동학의 새 이름)에서 전원 출교(제명) 조치했다)
그런데 당시 일진회 유력인사들을 제외한 수(십)만 ‘동학 잔당’들의 명단을 현재 확인할 방법이 없다. 즉 처음엔 동학에 참여했지만, 이후 변절해 친일 매국 행위를 했는지 검증이 안 된다는 게 문제다.
이렇게 명확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전북도는 ‘엄격히 확인’한 유족들에게 지원금을 계획보다 두 배로 늘여 지급한단다.
말로는 ‘역사적 사실이 어쩌구’ 하면서, 정작 ‘엄격히 확인’이 불가능한 역사적 사실을 들먹이고 있다.
세금으로 ‘인기 영합’ 지원금을 준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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