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 <인터뷰>인권의 불모지에서 종자를 심는 심정으로 - 진관스님을 만나다
18-01-10 09:19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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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권위원회는 언제까지 자기 육신을 정제해야 꽃 한 송이 피워 올릴까?
스님은 농성 중?
시인이시며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이신 진관 스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 인터넷 자료를 뒤지다 보니 스님은 인권운동뿐만 아니라 불교 기원 역사 연구에 관한 책 그리고 여러 권의 시집을 비롯해 다수의 출판물을 내신 분이셨다.
올해 첫 시집을 한권 낸 필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조계사 경내에 들어섰다.
여느 날처럼 조계사는 신자와 관광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스님께 도착 전화를 드리니 불교대학 뒤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로 오라고 하였다.
‘이건 머지?’ 지난여름 내내 떠들썩했던 천막 단식농성도 다 끝난 상황이고 총무원장도 바뀌어서 조계사에 봄이 다시 온 줄 알았는데 ‘스님은 농성 중?’
물어물어 찾아서 당도해 보니 정말 2층짜리 컨테이너 박스 앞에 인터넷에서 얼굴을 익힌 진관스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반갑게 맞이하는 스님을 따라 2층 컨테이너 사무실로 올라 가 보니 스님은 법화경 사경을 하고 계셨다.
서예를 조금 공부한 터라 그런 광경들이 낯설지 않았다. 사무실은 스님의 책과 탁상이 하나 놓여 있는 임시 사무실이었다, 사방으로 걸려있는 법화경 필사본이 그나마 사무실 인테리어를 빛내고 있었다. 차 한 잔 건넬 여유가 없는 사무실이기에 곧바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권의 불모지에서 종자를 심는 심정으로(불교인권위원회 창립동기)
기자 불교 인권위원회는 언제 창립하게 되었고 동기는 무엇이었는지요?
스님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의 5.18 광주만행을 저지른 뒤, 불교계가 전두환을 지지하지 않은 것에 앙심을 먹고 그해 10월 27일 조계종 스님 153명을 연행하고 전국 사찰 5731곳을 일제 수색했던 법난 사건이 있었어. 그런 일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군부세력에 저항하면서 인권이란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
기자 그럼 그때부터 불교 인권위원회라는 것이 생겼군요.
스님 아니지. 그때 당시는 인권이란 단어 자체가 생소했고 인권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때였어. 인권의 불모지에 이러한 저항활동이 불교계 인권운동의 종자 역할을 하게 되었지.
기자 초기 활동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스님 81년 5.18 광주사태와 10.27 불교법난 1주기 행사에 ‘대한 불교연합회’와 ‘승가 연합회가’ 전두환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시 낭송회를 가졌지.
기자 그렇게 총칼로 무자비하게 학살을 자행하던 시기에. 스님 용기가 대단하셨네요.
스님 그때는 젊었고, 그 시기 마침 베트남에서 미 제국주의를 몰아내기 위해 스님들 40여 명이 분신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었거든. 나도 분신할까 하다가 너무 뜨거울 것 같아서 저항과 시위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지.
기자 스님, 어차피 스님 다비식 할 건데...
스님 하하하... 그렇지. 그런데 그 온도가 2000 도를 넘는다고 해. 상상이 안가는 거야.
기자 10.27 법난 이후로 인권회복을 위한 저항 시위를 계속해 오신 거군요.
스님 82년도에 4.19의거 기념 참배를 하면서 사회 인권에 참여하게 되었지. 그러니까 그때부터 가택 연금을 시키더라구. 그러다가 84년에야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면서 망자의 묘지를 끌어 안고 오열하는 선량한 중생들을 보면서 ‘수행자로 무엇을 해야 되나? 를 심도 있게 고민하게 되었지. 그러던 중에 84년 사회운동단체 문익환 목사가 의장으로 있던 민족통일국민회의에 감사가 되면서 적극 참여하게 되었지. 그 당시 아시안 게임이 있었고 88올림픽을 준비하는 시기라서 적극 사회 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지. 민족 통일 연합회 등과 연대해서.
기자 조계종 종단 네에서 지지를 받았었나요?
스님 지지는 못 받았지. 정부와 사이가 안 좋으면 시끄럽고 귀찮아지니까. 종단에 지지를 못 받아도 대외 중생을 위한 인권 활동이니까 소신껏 밀고 나갔지. 그러다가 87년 박종철 사건시 조계사에서 타종을 하기로 했었는데 조계사 문을 걸어 닫아서 무산되기도 했었지. 그때 시위 당시 1000여 명이 연행되었는데 3명이 구속되었어. 그중에 하나가 ‘진관 스님’ 이었지.
기자 형량 좀 받으셨어요?
스님 아, 근데 집행유예로 풀려났어.
기자 어디 가서 ‘운동했다’고 명함 못 내미셨겠네요. 후
분신하기보다는 불타도록 뛰자(활발한 활동시기)
스님 글쎄 말이야. 그러다가 1987년 6월 9일, 6.10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이한열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사망 했지. 본격적으로 6.10 항쟁에 가담 하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를 만나게 되었고, 성공회 담을 지선 스님이랑 넘어 들어가서 항쟁에 참여하기도 했지. 그로 인해 구속되었고. 석방된 후 광주 ’무빈 정사‘로 내려갔어. 광주는 각계각층에서 인권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불교계에서만 잠잠 하더라고. 그래서 90년 11월 20일 정식으로 불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하게 되었지.
NCCK(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 위원회)와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을 모델로 활동을 시작했지.
그리고 그때부터 ‘분신하기보다는 불타도록 뛰자’라는 각오로 열심히 활동을 전개했지. 불교여성인권 위원회를 조직하여 ‘정신대 할머니 돕기 모금 운동’도 하고 인권침해 대책 위원회도 설립하고.
기자 그럼 불교인권상은 그때에 제정되었나요?
스님 다음 해 91년 제정되었고, 제1회에 박종철 아버지에게 수여되었지.
기자 90년부터 불교 인권위원회가 정식 출범해서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고 보면 되겠네요.
스님 그렇지. 그동안은 태동기였다고 보면 되고. 그 후로 종군기자 이 인모 북송 운동을 비롯해 장기수 인권운동을 펼쳤지. 덕분에 안기부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지.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그때 종단 내에서는 서의현 총무원장이 삼선을 하려고 해서 반대 운동에 적극 가담해서 무산시키기도 했지.
기자 본격적인 활동이 전개 되었군요.
스님 95년이었을 거야. 일본 승려들이 장기수 송환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거야. 그래서 살펴보니 그때가 해방 50년 되던 해이더라고. 발 빠른 일본이 먼저 활동을 시작 한 거였지. 우리도 망월동에서 판문점까지 걷는 평화 행진을 했고 일본을 방문해서 행진을 교류하기도 했지. 그러다가 다시 또 구속이 되었지.
기자 이번엔 형량 좀 받으셨겠어요.
스님 그랬지. 그런데 그때 대법원 항소이유서를 천여 편의 시를 써서 올렸어.
기자 아궁... 어떻게 읽으라고.
스님 그게 문제가 아니었어. 천편이면 시집 20권 분량이야. 그걸 9명이 읽어야 돼. 만장을 복사해서 각 장마다 지장을 찍어야 하거든. 그때 지문이 다 사라져서 지금 지문이 안 나와.
기자 그야말로 살신성인이시군요.
스님 그렇지, 98년도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도 구속되었는데 김영삼 정권 때와 다르게 종이와 볼펜이 지급되더라고. 서면 진술을 시로 백 편씩 써서 제출하곤 해서 교도소 직원들이나 판사 검사들이 애 좀 먹었지.
기자 스님 그런데 약력에 보니까 조선대 교육대학을 늦게 전공하셨던데요. 선생님 하셨었어요?
스님 어. 어느 날 재판을 받다 보니 판사가 서울대 출신인데 서울대 법대 제자들을 재판 과정에 참관 시킨 거야. 그리고 그때 전교조 선생님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 되고 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전교조 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쳐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그때 박승희 전남대생 분신 사건이 있어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랑 어울리다가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을 들어갔지.
기자 그럼 전교조 선생님은 하셨어요?
스님 조선대 교수님들도 적극 말리고 해서 그때부터 ‘만해 연구’를 시작했지.
기자 인권운동은 어떻게 하시고?
스님 김대중 정권 들어서면서 정권이 안정되어 차츰 활동이 줄어들었지. 그다음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효선이 미선이 사건시 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촛불시위에 참여했지. 그때부터 촛불시위가 시작된 거지. 그밖에 광우병 문제, 장기수 북한이송 문제 등에 가담했고 국가보안법 폐지, 사형제 폐지 운동 등에 참여했지. 그러다가 지금은 소강상태이지.
인권운동은 상생 운동이다. 자비심과 보살핌 아래 모두 행복한 중생이길
기자 스님 그런데 언제부터 컨테이너 박스에 계신 거예요?
스님 원래는 10월 27일 불교 법난 사태 진상 규명 대책 위원회 사무실이 있어서 그곳에 있었어. 그런데 그 건물이 헐리면서 조계사에서 컨테이너 박스를 임시로 설치해 준 거지.
기자 건물이 다시 지워지면 들어가시면 되겠네요.
스님 그러면 좋지.
기자 밤에도 여기서 주무세요?
스님 응, 그런데 세 시간 정도 자. 계속 글을 쓰거나 요즈음 법화경 사경하느냐고. 지금은 자판을 하도 두드려서 손목 증후군이 왔어. 팔을 쓸 수가 없어서 쉬고 있어.
기자 조계종 내에 다른 불교 인권 관련 부서가 있나요?
스님 그런 부서가 있긴 하지만 한 번도 법난 사건에 참여한 적도 없고 진상 규명을 외쳐본 적도 없지. 내 것을 가로채 간 것이지. 씨앗은 진관이. 열매는 종단이 꿀꺽 한 것이지.
기자 스님, 인권은 상생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스님 자비정신과 보살심이 펼쳐지겠지.
조선의 꽃씨
필자가 스님에게 받은 책 중에 ‘조선의 꽃씨’라는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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